1.
이번 주말, 열두해째 응원을 갑니다.
졸업을 하고 취업을 했던 해에는 양복을 입고 간 적도 있었지만,
역시나 반바지에 운동화가 응원하기엔 제격이죠.
2.
중학교 시절이 담겨있는 앨범에,
남들 다 남색의 체육복을 입고 있는데
혼자 청자켓에 청바지를 입고 우쭐거리며 서 있는 제 사진이 있습니다.
각각 분교가 두개씩 딸린 국민학교 네 개가 모인 동네에서
청룡-백호-주작-현무 네 팀으로 나눠서 하던 체육대회는 제법 큰 행사였지요.
왜 거기서 내가 응원단장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네요.
응원단장이 하는 일은 별거 없었습니다.
오전 시작 즈음에만 깃발을 흔들며 분위기를 띄울 뿐,
기마전과 줄다리기, 계주가 있는 오후에는
시키지 않아도 다들 정신없이 응원을 하게 되니까요.
3.
인문계 비평준 고등학교.
지역 명문인 1류고등학교의 뒤를 바짝 쫓고 있다고 생각하는 선생님들 덕분에
여름방학 3일, 겨울방학 4일을 제외하곤 하루도 쉴 날 없던 고등학교 시절에,
체육대회는 '야자'가 없는 몇 안되는 행복한 날 중 하나였습니다.
그 정점을 찍었던 고3 체육대회.
미대를 지원하는 친구가 도안을 해서 만든 반티를 입고
밑에는 교련복 바지를 입고(전국적으로도 몇 안되는 컬러 교련복이었습죠. 냐하하하~) 입장..
그날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첫경기 열혈응원 - 예상치 못한 승리(선후가 바뀐 것일 수도 있죠) - 응원 분위기 Up!! - 승리 - 응원 - 승리...
전종목 결승에 올라가서, 한종목 준우승 나머지 전종목 우승이라는 쾌거를 일궈냈습니다.
4.
저는 줄다리기가 응원을 제일 잘 활용할 수 있는 경기라고 생각합니다.
그 고3 체육대회를 기점으로 줄다리기에서 져 본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군대에서... 본부중대에 있었는데, 중화기 중대에 압도적으로 발린? 기억은 있습니다만)
응원으로 구령을 맞추고, 순간적인 기합으로 이길 수 있는 경기지요.
제 덩치가 그리 녹록한 편은 아니지만, 줄다리기 경기에는 늘 응원을 자처합니다.
5.
이듬해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입학 전, 새로배움터를 가기전에 하루짜리 오리엔테이션이 있었죠.
학교 잔디광장(해방광장이란 굉장한 이름을 가졌던..)에서 주욱 둘러앉아 자기소개를 하고 노래를 합디다.
새빨간 머리(졸업식전날, 말도 안되는 반항심에 염색을 했었죠. 나중엔 형형색색의 염색이 유행하긴 했지만
적어도 96년 초엔 멀쩡한 아이들은 그렇게 하고다니진 않았던 것 같네요)에
옷도 때마침 빨간 체크남방.
학교의 대표색상도 빨강 계열이었죠.
선배들 난리났죠. 소개가 끝나니 다들 열광하더군요. 분위기를 이어 노래를 부릅니다.
고3때 최고 히트였던 응원가였습니다.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건너! 건너! X나게 건너!!)"
94학번 누나들의 제지로 노래가 중단되고, 시덥잖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라이벌 학교의 응원가라 부르면 안된다네요.
아... 이런 촌스런 사람들...이라고, 뭐 신입생이었으니 속으로만 말했죠.
그리고 한달도 되기전에, 저도 그네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
아니죠. 더한 놈이 되고 말았죠.
6.
온 몸의 세포까지 크림슨 색으로 물들었던 가을,
당연하게도 축제가 취소되었습니다.(96년 연대사태..라고 하면 아실런지요..)
학창시절 단 한번뿐인 '신입생 시절의 가을 축제'가 사라진 것이죠.
그때의 아쉬움이 저와 제 친구들을 '응원에 미친 놈' 수준으로 만들어 버린것일 수도 있습니다.
2년차였던 97년, 후배들과 같이 처음 가을축제를 맞이할 수 있었죠.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을, 역시 처음겪는 후배들에게 가르쳐주면서 말이죠.
- 그리고, 왜 우리는 신입생때 응원단에 들어가지 않았나 하는 자책을 하기도 했죠.
그냥 건축공학과 특수응원단이라고 떠들면서 희희낙락했던 신입생 시절에 대한 반성과 함께요..
7.
2002년 월드컵 거리응원 이후,
사람들에게 설명하기가 쉬워졌습니다.
그전에는, 도대체 니들은 왜 거기서 그렇게 미친짓을 하고 있는거냐... 란 질문을 들었거든요.
아니, 소위 명문대생이라는 녀석들이 지들끼리 노는게 별로 보기 좋지 않다는 질타를 들었었죠.
말 그대로 그릇된 집단의식 생성이라는 말도 많았구요.
월드컵도 마찬가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깟 공놀이'에 전 국민이 열광하는거죠.
게다가, 거리응원에 가 보시면 아실테죠.
경기에 이기는 것도 좋지만, 응원 자체에도 무진장한 카타르시스가 있거든요.
8.
야구를 좋아합니다.
야구장도 무지 좋아하죠.
그런데, 일방적인 응원이 이뤄지는 야구장보다는
얼추 비슷한 인원이 모여 응원하는게 좋습니다. 투지도 생기고.
잠실 라이벌전이나,
롯데나 기아의 잠실 원정경기...
선수들은 상대 선수들과 경기를 하고
팬들은 팬들끼리 기세싸움을 하고 응원전을 벌이는 것이죠.
9.
학교 축제를 좋아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실력이 떨어진다고 생각되는 경기도 뒤집고,
수많은 경기중 단 한경기인데도 선수들은 눈물을 보입니다.
경기 시작전부터 끝난 이후까지 목이 터져라 응원을 합니다.
뭐,
아까 말씀드린 줄다리기의 응원과 같은 효과는 별로 없습니다.
이건 그냥 응원을 즐기는 거죠.
열 한번의 축제, 수많은 정기전 경기에서 이긴 경기는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 좋죠. 이기고 지는 것은 다음 다음 문제라고 합니다.
그저 목청껏 선수들을 응원하고, 응원하는 우리들을 응원하고, 응원하는 내 자신을 응원하는 겁니다.
10.
물론,
지하철 소란이라든지, 경기장 난입으로 잔디를 훼손한다든지... 그런 것들을 옹호하는 건 아닙니다.
매년, 축제가 끝날때마다 불거지는 이런 논란들... 특히나 기차놀이같은 것들은,
선배들이 그릇된 인식을 심어주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올해는 그런 소리를 안 들었으면 좋겠는데... 쉽지는 않겠죠...
11.
나이가 드니, 이틀간 소리지르며 응원하는 것도 힘듭니다.
작년부터는 밤샘하는 후배들 응원(?)하는 것도 건너뛰고 있습니다.
졸업한지 6년, 이제는 아는 후배들이 없네요.
'올해까지만...' 이라고 생각하던 것이 벌써 열두번째네요.
그래도 당연한 듯이 연차휴가를 쓰고, 엠피쓰리엔 응원곡을 넣어서 듣고 있습니다.
올해에는 정말 죽이 잘 맞는 97학번 후배도 함께한다고 하니 더욱 기대가 되네요.
12.
평범한 직장인, 유부남, 아기아빠.
회사를 응원하고 아내를 응원하고 아들을 응원하며 사는 일상중에
단 이틀, 어린 날의 열정을 꺼내보는 것도 좋은 것 같네요.
제발 비가 비껴가길 빕니다.
13.
이런 글은 학교 게시판에 써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긴건지도 모르고, 제가 활동하는 단 두군데의 커뮤니티 중 하나에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혹시 게시판 성격에 맞지 않는다면, 운영진의 처분이 있겠지요.
월요일 저녁입니다. 눈치보며 글을 쓰다보니 벌써 퇴근시간이 코앞이네요.
다들 건강하고 행복한 한 주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