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pa_11412013&tabid=k
역사서라곤 삼국지 이외에 읽어본적이 없는 저인데,
갑자기 병자호란에 대한 위키를 보다가 조선실록에는 병자호란이 어떻게 기록되어있을까.. 궁금했습니다.
인조 14년 12월이라는 것만 알고 조선실록 사이트로 찾아가
찾아보니 보기 쉽게 년도별로 잘 정리해놨더군요.
어려운 말이 많아 사전을 찾아가며 보았습니다.
13일부터 청군의 평안남도 안주에 도착했다는 기록과 함께
병자호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적혀있습니다.
큰 틀은 위키에서 보던 것과 다를바가 없었는데,
문제는 그 기록이 너무도 자세하다는 거였습니다.
다른 역사서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삼국지만 읽었던 저로서는
이정도로까지 디테일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내용이 구체적이었습니다.
좋은 부분에 대해서 구체적인 것이면 좋겠지만
병자호란만큼 조선 역사상 아무것도 못하고 당한 일이 없고 구체적일 수록 내용은 치욕적일 텐데
그 내용이 그대로 담겨 있었습니다.
일부를 발췌하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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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33권, 14년(1636 병자) 12월 26일
(전략)
상(왕의 높임)이 이르기를,
“경이 적의 진영에 가서 어떻게 말할 것인가?”
하였다. 대답하기를,
“‘십 년 동안 우호를 맺어온 나라가 지금 무단히 군사를 일으켰다.
너희는 맹약을 저버렸지만 우리는 옛날의 우호를 잊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선물을 가져왔다.’고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화(싸움을 멈추고 평화롭게 됨)하는 뜻은 언급하지 말고 세시(설날)의 선물이라고만 말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인조 33권, 14년(1636 병자) 12월 27일
이날 소와 술을 노영(虜營)에 보내려 하는데 대신이 들어와 청하기를,
“재신(宰臣)을 보내었다가 구류되면 도리어 나라의 체면이 손상될 것이니,
이기남(李箕男)을 시켜 보내 주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간 김반(金槃)과 승지 최연(崔葕)은 사람을 보내지 말기를 청하였고,
교리 윤집(尹集)은 상소하여 논의를 주도한 자를 목베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고, 이기남으로 하여금 소 두 마리, 돼지 세 마리, 술 열 병을 가지고 가게 하였다.
노장(虜將)이 받지 않으며 말하기를,
“황천(皇天)이 우리에게 동방을 주셨으니, 팔도의 주육(酒肉) 등 모든 물건은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국왕이 현재 석혈(石穴)에 처해 있고 내외가 통하지 않아서, 종신(從臣) 이하가 모두 굶주릴 것인데,
이것을 어디에서 얻었는지 모르겠다. 너는 가지고 가서 굶주린 신민에게 나누어 주라.”
하고, 또 말하기를,
“원병이 어느 곳에 도착했기에 우리가 3천 군사로 모조리 죽였고,
또 다른 곳에서 2천 병사를 보내 모두 죽였다. 황제가 이미 나온 것을 너희 나라는 듣지 못하였는가?”
하니, 기남이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하고 돌아왔다.
*괄호의 해석은 제가 넣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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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이것은 아직 조선이 그래도 베짱을 부릴 여유가 있을 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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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34권, 15년(1637 정축 / 명 숭정(崇禎) 10년) 1월 3일
다시 홍서봉·김신국·이경직 등을 파견하여 국서(國書)를 받들고 오랑캐 진영에 가게 하였다. 그 글에,
“조선 국왕 성(姓) 모(某)는 삼가 대청(大淸) 관온 인성 황제(寬溫仁聖皇帝)에게 글을 올립니다.
소방이 대국에 죄를 얻어 스스로 병화를 불러 외로운 성에 몸을 의탁한 채 위태로움이 조석(朝夕)에 닥쳤습니다.
전사(專使)에게 글을 받들게 하여 간절한 심정을 진달하려고 생각했지만 군사가 대치한 상황에서 길이 막혀 자연 통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듣건대 황제께서 궁벽하고 누추한 곳까지 오셨다기에 반신반의하며 기쁨과 두려움이 교차하였습니다.
이제 대국이 옛날의 맹약을 잊지 않고 분명하게 가르침과 책망을 내려 주어 스스로 죄를 알게 하였으니,
지금이야말로 소방의 심사(心事)를 펼 수 있는 때입니다.
(중략)
명나라는 바로 우리 나라와 부자(父子) 관계에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전후에 걸쳐 대국의 병마(兵馬)가 관(關)에 들어 갔을 적에 소방은 일찍이 화살 하나도 서로 겨누지 않으면서
형제국으로서의 맹약과 우호를 소중히 여기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토록까지 말이 있게 되었단 말입니까.
그러나 이것 역시 소방의 성실성이 미덥지 못해 대국의 의심을 받게 된 데서 나온 것이니, 오히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지난날의 일에 대한 죄는 소방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있으면 정벌했다가 죄를 깨달으면 용서하는 것이야말로
천심(天心)을 체득하여 만물을 포용하는 대국이 취하는 행동이라 할 것입니다.
만일 정묘년에 하늘을 두고 맹서한 언약을 생각하고 소방 생령의 목숨을 가엾이 여겨
소방으로 하여금 계책을 바꾸어 스스로 새롭게 하도록 용납한다면, 소방이 마음을 씻고 종사(從事)하는 것이 오늘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대국이 기꺼이 용서해 주지 않고서 기필코 그 병력을 끝까지 쓰려고 한다면,
소방은 사리가 막히고 형세가 극에 달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기를 스스로 기약할 뿐입니다.
감히 심정을 진달하며 공손히 가르침을 기다립니다.”
하였는데, 최명길이 지은 것이다.
청나라의 연호(年號)를 쓰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삼사가 간하여 중지시켰다.
당시 문서가 최명길의 손에서 많이 나왔는데, 못할 말 없이 우리를 낮추고 아첨하였으므로,
보고는 통분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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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에선 청나라를 오랑케라 칭하지만 청국으로 보내는 문서 그 자체에는 이보다 더 낮출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나라의 왕의 국서라고 보기 힘들만큼의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는 그 내용이 고스란히 다 담겨 있습니다.
또 조선이 항복을 결정하고 항복하는 방법에 대해 적의 장수와 토의하는 부분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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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34권, 15년(1637 정축 / 명 숭정(崇禎) 10년) 1월 28일
(전략)
홍서봉(洪瑞鳳) 등이 나가서 칙서를 맞았는데, 용골대(청나라 장수의 이름)가 말하기를,
“그대 나라가 명나라의 칙서를 받을 때의 의례(儀例)는 어떠하였소?”
하니, 홍서봉이 말하기를,
“칙서를 받든 자는 남쪽을 향하여 서고 배신(陪臣)은 꿇어앉아 받았소이다.”
하자, 여기서 의거하여 주고 받은 뒤에, 용골대는 동쪽에 앉고 홍서봉 등은 서쪽에 앉았다. 용골대가 말하기를,
“요즈음 매우 추운데 수고스럽지 않소?”
하니, 홍서봉이 말하기를,
“황상께서 온전히 살려주신 덕택으로 노고를 면하게 되었소이다.”
하였다. 용골대가 말하기를,
“삼전포(三田浦)에 이미 항복을 받는 단(壇)을 쌓았는데, 황제가 서울에서 나오셨으니, 내일은 이 의식을 거행해야 할 것이오.
몸을 결박하고 관(棺)을 끌고 나오는 등의 허다한 절목(節目)은 지금 모두 없애겠소.”
하니, 홍서봉이 말하기를,
“국왕께서 용포(龍袍)를 착용하고 계시는데, 당연히 이 복장으로 나가야 하겠지요?”
하자, 용골대가 말하기를,
“용포는 착용할 수 없소.”
하였다. 홍서봉이 말하기를,
“남문(南門)으로 나와야 하겠지요?”
하니, 용골대가 말하기를,
“죄를 지은 사람은 정문(正門)을 통해 나올 수 없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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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용포도 입지 못하고 죄인으로 취급받아 정문을 이용하는 부분까지 그대로 기록되어 있지요..
그리도 당연히 압권은 삼배구고두례를 했을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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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34권, 15년(1637 정축 / 명 숭정(崇禎) 10년) 1월 30일
(전략)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臚唱:의식 순서를 소리내어 읽는 것)하게 하였다. 상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용골대 등이 상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쪽에 앉게 하였다.
대군(大君) 이하가 강도(江都:강화도)에서 잡혀왔는데, 단 아래 조금 서쪽에 늘어섰다.
용골대가 한의 말로 상에게 단에 오르도록 청하였다.
한(청나라 왕)은 남쪽을 향해 앉고 상은 동북 모퉁이에 서쪽을 향해 앉았으며,
청나라 왕자 3인이 차례로 나란히 앉고 왕세자가 또 그 아래에 앉았는데 모두 서쪽을 향하였다.
또 청나라 왕자 4인이 서북 모퉁이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 두 대군이 그 아래에 잇따라 앉았다.
우리 나라 시신(侍臣)에게는 단 아래 동쪽 모퉁이에 자리를 내주고,
강도에서 잡혀 온 제신(諸臣)은 단 아래 서쪽 모퉁이에 들어가 앉게 하였다.
차 한잔을 올렸다. 한이 용골대를 시켜 우리 나라의 여러 시신(侍臣)에게 고하기를,
“이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었다. 활쏘는 솜씨를 보고 싶으니 각기 재주를 다하도록 하라.”
하니, 종관(從官)들이 대답하기를,
“이곳에 온 자들은 모두 문관이기 때문에 잘 쏘지 못합니다.”
하였다.
용골대가 억지로 쏘게 하자 드디어 위솔(衛率) 정이중(鄭以重)으로 하여금 나가서 쏘도록 하였는데,
활과 화살이 본국의 제도와 같지 않았으므로, 다섯 번 쏘았으나 모두 맞지 않았다.
청나라 왕자 및 제장(諸將)이 떠들썩하게 어울려 쏘면서 놀았다. 조금 있다가 진찬(進饌)하고 행주(行酒)하게 하였다.
술잔을 세 차례 돌린 뒤 술잔과 그릇을 치우도록 명하였는데, 치울 무렵에 종호(從胡) 두 사람이 각기 개를 끌고 한의 앞에 이르자
한이 직접 고기를 베어 던져주었다. 상이 하직하고 나오니, 빈궁(嬪宮) 이하 사대부 가속으로 잡힌 자들이 모두 한곳에 모여 있었다.
용골대가 한의 말로 빈궁과 대군 부인에게 나와 절하도록 청하였으므로 보는 자들이 눈물을 흘렸는데, 사실은 내인(內人)이 대신하였다고 한다.
용골대 등이 한이 준 백마에 영롱한 안장을 갖추어 끌고 오자 상이 친히 고삐를 잡고 종신(從臣)이 받았다.
용골대 등이 또 초구를 가지고 와서 한의 말을 전하기를,
“이 물건은 당초 주려는 생각으로 가져 왔는데, 이제 본국의 의복 제도를 보니 같지 않다.
따라서 감히 억지로 착용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의(情意)를 표할 뿐이다.”
하니, 상이 받아서 입고 뜰에 들어가 사례하였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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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가 청나라 황제에게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행위라던지
조정의 신하가 청황제의 명령으로 잘 쏘지도 못하는 활을 광대처럼 쏘아대는 것.
그리고 조선의 왕이 청나라 장수의 말의 고삐를 잡고 끄는 것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400년전 이야기이니 그래도 그러려니 하지. 이게 근대의 일이었다면
정말 이보다 치욕적일 수 있을까 싶을정도의 내용들이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그 일을 겪었던 조선의 왕과 대소신료들은 얼마나 더 비참하고 치욕적이었겠습니까.
그럼에도 그 기록을 삭제하거나 조작하려 하지 않고 그대로 담았다는 것에
조선사기가 얼마나 있는 그대로를 담으려 노력했는지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두시간이 넘게동안 한달 반동의 기록을 보면서
이정도로 사실적으로 그리고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기에 실록을 읽으면서 딱딱한 역사서를 읽는 느낌보다는
그 당시의 상황뿐만 아닌 느낌이나 분위기까지 그대로 느껴져 마음이 다 아팠습니다.
이토록 생생한 역사 기록을 남겨준 선조들에게 감사를 느끼며,
앞으론 삼국지 뿐 아니라 조선왕조실록도 시간날 때마다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