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도 PGR 에 이런 잡담 형식의 글을 남겨 보지는 않았는데, 처음으로 해 보게 되네요.
(우연찮게도 글을 쓰다보니 바로 아래 슈라님의 잡담글이 있어서 잡담 말머리가 두개나 올라오게 되었네요; 양해를;)
지금 저는 타이페이 공항의 텅빈 소파에 누워서 노트북을 배에 얹고 있습니다. 팔자 좋네요. 흐흐.
한국으로 귀국하는 길인데, 경유지인 이곳 타이페이 공항에서 경유시간이 16시간이나 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여기에 샤워하는 곳이 있어서(타월과 샴푸 등도 주더군요) 샤워도 하고,
안마 의자가 있는데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해 주어서 안마도 받고,
음식값도 6불 정도로 생각보다 저렴해서 밥도 맛있게 먹고, 타이페이 공항에 대한 인상이 생각보다 좋네요.
원래 이 곳에서는 법적으로 심야 시간에 공항 체류가 안 된다고 알고 있었는데, 공항 면세점 직원분들에게 물어보니 괜찮다고 하네요.
그래서 의도찮게 영화 '터미널' 찍고 있는 중입니다.
SIGGRAPH 라는, 컴퓨터 그래픽스 학회 중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학회에 참가하기 위해서 미국으로 출발한 지, 이제 거의 14일 가까운 시간이 지났네요.
미국 여행이 처음이었기에 PGR 질게에 이런 저런 질문 올리면서 많은 답변 들었는데, 그것이 여행중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번 SIGGRAPH 2010 은 LA 에서 열렸습니다. 컴퓨터 그래픽스를 하는 사람은 한번쯤은 꼭 가봐야 하는 학회라고 할 수 있지요.
예상대로 작년말 개봉했던 AVATAR 에 대한 관련기술 발표가 굉장히 많았고, 그 외에도 ILM, Pixar, Dreamworks 등등 유수의 헐리우드 스튜디오들의 기술 노하우 발표 시간들이 많았습니다.
물론 그래픽스 전공자들의 논문 발표도 훌륭했지만, 사실 시그라프 논문 발표는 학회 후에 앙코르 DVD 로 다시 복습할 수 있기 때문에, 정말 꼭 들어야겠다싶은 논문 발표가 아니라면 주로 프로덕션 세션에 들어가는 것이 좋았습니다.
학회 이후에는 살판 났죠. 처음 가는 미국 여행, 네비게이션도 없는 렌트카로 LA -> 라스베거스 -> 그랜드캐년 -> 샌프란시스코 -> LA 의 긴 여정을 무사히 소화해 냈습니다.
LA 에서는 Rhythm & Hues 라는 영화 '나니아 연대기', '박물관이 살아있다' 등을 제작한 유명 CG 회사를 방문했고, DreamWorks Animation Studio 와 Walt Disney Animation Studio 를 방문했습니다. 모두 거기에서 일하시는 한국분들의 초청을 받아서 방문했지요.
아, 드림웍스는 정말 최고였습니다. 드림웍스는 금요일마다 뷔페를 마련해두고 회사 직원들이 가족이나 친구 서너명을 데리고 와서 함께 점심식사를 하도록 했는데, 음식도 너무 맛있고, 한국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너무 좋았습니다. 회사 자체도 참 아늑하고 아름다운 건물로 되어 있어서 (소문에는 원래 이 곳을 노인 요양원으로 만들려고 했다는... 분위기를 대충 아시겠죠?) 일하기 정말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라스베거스에서는 유명 호텔들을 구경하고, 여러 놀이기구들과 쇼를 보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물론 도박도 조금 했죠. 저는 모든게 처음이라 빅 휠, 룰렛, 블랙잭 3개만 딱 경험해 보았습니다.
첫날 블랙잭으로 5불을 30불로 만들어서 '아, 이것이 라스베거스구나' 를 만끽했는데, 그 뒤로는 줄곧 잃기만 하더라고요.
결국 라스베거스에서의 손익계산을 해 보았을 때 10불을 잃었습니다. 뭐 재미있게 놀았으니 된 거죠. 흐흐.
호텔은 조금 저렴한 '서커스 서커스' 라는 호텔에서 이틀, 그리고 유명한 '벨라지오' 호텔에서 이틀을 묵었습니다.
호텔에서 묵어본 결과, 어차피 보통 객실에서 잘 거라면 메인 스트립에 있는 싸고 저렴한 호텔이 가장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숙박료는 정말 저렴합니다. 서커스 서커스 호텔의 경우 주중에 4인이 묵는 숙박료가 30불이 안 됩니다; (3만원도 안된다는 거죠)
그리고 한번쯤이라도 고급 호텔의 고급스러움을 느껴보고 싶다면 딱 하루라도 스위트룸에서 묵어보는 것이 좋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꿈에도 그리던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방문했습니다.
지인이 없으면 방문하기가 정말 어려운데, 정말 어렵게 어렵게 스튜디오 방문을 허락받았습니다.
시그라프 학회 기간때 픽사에서 오신 분의 발표가 있었는데, 발표 이후 그 분과 이야기를 잠깐 나눈 것이 계기가 되어
샌프란시스코를 떠나기 바로 전날 메일을 보냈는데, 회사에 들러도 좋다는 메일이 드라마틱하게도 도착했습니다.
스튜디오에 가서 알고보니 픽사의 캐릭터 FX 수퍼바이저라는, 사실 픽사에서도 꽤나 높은 직급에 있는 분이었습니다.
뭘 모르니 그런 분에게 직접 픽사 구경시켜 달라고 떼를 썼죠; 크;
그리고 한국말은 못하셨지만, 한국인 2세이셨습니다. 픽사에서 일하시는 다른 한국인 분들도 소개해 주셨고요. 뿌듯했습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보름이었지만, 참 별별일이 다 있었습니다.
출발하는 당일 인천에서 지갑을 잃어버려 수중에 있던 700불로 15일을 보내야만 했고,
고속도로에서 과속하다가 미국 경찰에게 잡혀본 적도 있고, (손을 총에 올려놓고 이야기하더군요;)
그랜드 캐니언은 시간을 잘못 맞추어 가서 딱 도착하자 해가 져버려서 흑암 속의 그랜드캐니언을 보았고,
시그라프 학회장에서 참 예쁘게 생긴 아가씨가 있어서 용기내어 말을 걸어 보았더니 시그라프 체어의 딸이었고;
좋은 일도 많았고 당황스러운 일도 많았지만 참 우여곡절 많았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겠군요. 많이 보고 들은 만큼, 그만큼 제 스스로가 커져 있어서
돌아간 그 곳에서 좀더 훌륭하고 나은 결과물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잡담치고 길었네요. 안녕히들 주무세요.
Th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