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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0/08/03 14:36:31
Name happyend
Subject [일반] 굿바이 피지알
1.
지난 주 이 시간에 저는 중국 베이징 자금성 안에 있었습니다. 이맘때 베이징을 간다는 것은 사람과 더위를 찾아가는 일이란 것은 아시는 분은 아실 것입니다만, 제 의지에 의한 여행이라기보다는 한무더기의 덤핑물건 취급받으며 떨궈진 터라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자금성 여행의 특징은 ‘일방통행’이었습니다. 입구와 출구가 외길이라 우리는 길고 긴 줄을 따라 발걸음을 옮겨야 했습니다. 총 9개의 문을 지나야 황제를 만날 수 있고, 자객이 두려워 바닥을 돌로 채우고 나무도 심지 않은 터라 척 보기엔 더워 보였습니다만 문과 문 사이를 통과할 때마다 생기는 바람과 지형적 이유로 형성되는 난류가 땀을 간간히 식혀줬습니다. 게다가 궁궐의 높은 천정은 ‘최고의 단열재인 공기’를 충분히 머금게 해서 궁궐생활이 그렇게까지 덥지는 않겠다 싶었습니다.

누구나 자금성을 보면 질문할 것입니다. 저희 일행도 제게 건넨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으니가요.
“뭐가 두려워 이렇게 담을 높이 쌓고 숨었을까?”

그 말 그대로입니다. 담벽은 어지간한 성벽만했고, 그것도 아홉겹...자객이 숨을까 나무도 호수도 용납하지 않고, 땅굴팔까 두려워 두텁께 깔아놓은 석재바닥까지....한국 궁궐의 여백의 미학이나 자연미학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황제는 두려웠을지도.황실은 늘 자객과 죽음의 공포가 드리운 곳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저 높은 담벽을 쌓고 그 너머 백성과 완벽하게 유리된 채 살았던 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일행의 질문에 저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마치 장기판과 같아서 왕을 잡으면 게임은 끝이 납니다. 선조임금이 임진왜란 당시 야반도주를 한 것에 대해 비겁하다고 손가락질 할지 모르지만 만일 임금이 왜군에게 잡혔다면 전쟁은 끝났습니다. 따라서 그 시대의 가치로 보면 적어도 도망간 것에 대해서만은 선조는 비난 받을 만한 일을 했다고 보기 어려울 지도 모릅니다.마찬가지로 대한제국 말기에 고종이 차라리 망명을 선택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2.

전날은 만리장성을 올랐는데요, 운동으로 단련된 터라 그 지독한 더위와 습도는 참을 만 했습니다만, 반대길로 내려오는 중국인들에게서 나는 특유의 땀냄새는 정말 견디기 어렵더군요.비위가 워낙 약해서 (그래도 지금은 꽤 강해졌습니다만) 손수건으로 코를 틀어막고 올라야 했습니다. 정말 사람많았습니다. 중국인들에게 만리장성은 그런 존재라고 하더군요.‘제국’과 ‘통합’의 상징.어떤 종교적 보편성과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치 메카를 순례하는 것처럼.


“이 돌계단 하나하나가 만리장성을 쌓던 사람들의 시체숫자입니다.”
현지인 가이드가 말한 그대로 계단은 정말 하나하나 보기만 해도 공력이 느껴졌습니다. 게다가 이화원을 가서 보면 어처구니가 없어질 지경이더군요. 그 넓은 호수(그들은 바다라고 하더군요)를 파서 뒤에 산을 만들었다니....그 산과 호수만큼의 피와 땀과 눈물과 한숨이 느껴졌습니다.

그런데도 중국인들에게 자금성이든 이화원이든 만리장성이든 이 대규모 건축사업은 비난거리가 못된단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춘추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분열’의 댓가가 ‘제국’을 위한 희생보다 결코 작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차피 전쟁터로 끌려다니며 죽으나 돌계단을 쌓다 죽으나 그들에게 현실은 고달픔 그자체였을테니까요.역사가 묘하다고 느낄 때가 이럴 때입니다. ‘이이제이’의 정치력으로 한국 당쟁의 뿌리를 근간에서 흔들어버린 숙종의 처사는 왕권의 안정을 가져왔을지 모르나 결국은 변화의 가능성마저도 함께 흔들렸으니까요.

3.

1949년,미국인 선교사 헐버트가 다시 한국땅을 밟았을 때 어쩌면 007시리즈를 방불케하는 일들이 벌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겐 판도라의 상자라 여길 수 있는 문서들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었기 때문인데요, 그것이 바로 고종황제가 국제적 독립활동자금으로 맡긴 거액의 비자금 예탁증서입니다.

격동의 구한말. 고종을 손에 넣는 나라가 대한제국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미국인 선교사들은 물론이고 행정가들과 결탁한 일본,러시아,중국은 이권사업을 손에 넣기 급급했고,이렇게 저렇게 국부는 빠져나갔습니다.

누군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매일매일 가문의 영광을 위해 금강산에서 굿을 한 명성황후가 나라의 국부를 외국에 팔아먹은 것보다 나쁘냐고요. 금강산에서 굿을 한 떡을 먹은 것은 결국 우리나라 사람 아니냐고요.

뭐, 그럴 수도 있겠지요.

고종의 비자금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그것은 왕실이 돈을 꼬불쳐서 사치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정치자금이었다고요. 우리나라 왕들은 검소한편이니 그 말도 일리는 있어보입니다. 백성들을 갖가지 명목으로 쥐어짜서 왕실로 왕실로 들어온 돈, 이권을 팔아서 챙긴 돈을 손에 쥔 고종. 이러저러하게 한국의 정치세력 중 신뢰도나 경제력이나 황실이 최강이었습니다. 그 돈과 그 영향력으로 고종은 뭘했을까요?

일설에 의하면 이러저러하게 외국에 조선의 독립을 알려주겠노라고 말해서 챙겨간 약삭빠른 사람들이 부지기수라고 합니다. 소위 독립운동자금으로 뿌려진 돈들로 인해 외국은행의 큰손은 고종황제였고, 그 중간에 약삭빠른 사람들은 곶감 빼먹듯 빼먹었습니다.

무엇이 그를 최고의 물주로 만들고 글로벌 호구로 만들어간 걸까요?

헐버트씨가 한국을 찾은 목적이 그 비자금을 우리정부에 돌려주기 위한 것이었는지는 모르나 일주일 후에 그는 세상을 떠남으로써 이 미스테리는 이제 역사가들의 몫으로 남겨지고 말았습니다.

4.

역사공부를 하다보면 사람에 대한 평가는 참 다면적이 됩니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쉽게 판단하지 않아야겠다...하는 결론에 늘 이르곤 합니다. 특별히 역사의 분기점에서 사람들은 큰 물줄기를 보기보다 작은 결함에 더 열광합니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그것도 역사적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래도록 근현대사에 관한 토론을 전개하지 못해왔는데요, 개인적 사정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런 점 때문이기도 합니다.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에 관심을 가진 저에게 ‘평가’를 우선시하는 작업은 맞지 않아서인 듯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제가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싶은 것이죠.

경술국치100년이라는 결코 기쁘지 않은 시점에서 이 불씨를 되살리려는 작업은 아무래도 제 일이 아닌 듯 합니다. 저의 도량으로는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작업을 하는 것이 맞지 않아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일년가까이 미뤄오던 토론은 이시점에서 ‘불가능’선언을 해야 할 듯 합니다.

아울러,그동안 말과 글을 나누었던 피지알과도 작별을 고해야 할 듯 싶습니다. 이제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저로 인해 고통받았던 분들은 너그러운 용서를 바랍니다.
(굳이 이런 글을 쓸 필요는 없는데 싶은 분들이 있을 듯 해서 오해를 피하고자 말씀드리면, 근현대사 토론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제 능력으로 안되니 할 수 없다는 선언을 하기에 지금이 적당한 듯 싶어서입니다. 안하고 넘어가도 되겠지만, 어찌되었든 책임을 져야 할 듯 합니다.
그동안 주제넘은 글들을 써서 많은 분들에게 빚을 남겼던 점 거듭 죄송합니다. 더 많은 빚을 남기기 전에,정산을 해야 하겠네요.)

제가 묶어놨었다고 혼자 생각해온 근현대사란 주제,혹은 역사라는 이야기꺼리가 한뼘 더 자유로워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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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청년
10/08/03 14:38
수정 아이콘
무슨일이 있으셨는지 잘모르겠지만 기운내세요.^^
가만히 손을 잡
10/08/03 14:41
수정 아이콘
좀 아쉽네요.
happyend님의 시각과 글이 피지알에 많은 도움이 됬다고 생각했는데요.
sangsinyouzi
10/08/03 14:47
수정 아이콘
항상 좋은 글 감사히 보고 있었는데, 이렇게 가신다니 정말 안타깝습니다.
오전 일을 생각하니, 더 안타깝네요.
항상 건승하시고, 건강하세요.
루크레티아
10/08/03 14:48
수정 아이콘
약간 아쉽습니다.
hppyend님께서 그 동안 토론이라는 것에 너무 얽매어 계셨던 것이 아닌가도 싶습니다. 그냥 저 개인적으로는 happyend님의 역사글이 좋고, 그것을 보고, 읽는 것만으로도 큰 즐거움이고 기쁨이었습니다. 굳이 토론을 하지 않아도 좋으니 그냥 글이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어쩔 수는 없겠지요. 그 동안 좋은 글 감사했습니다.

역사라는 것, 그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 사람이 저지른 행위이기에 언제나, 어디서나 다른 사람들에게 판단되어지고 평가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평가라는 것이 단지 그 사람 나름의 결론일 뿐이지 단순한 평가를 내리는 사람에게 어떠한 학술적 자격이란 없다고 봅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가 나쁘다고 판단하는 것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유치원생 아이들도 약간의 예만 들어주면 쉽게 판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wish burn
10/08/03 14:51
수정 아이콘
설마 오전에 질게에 올리셨던 글때문에 떠나시는 건 아니겠죠? 혹시나해서 여쭤봅니다.
콜록콜록
10/08/03 14:53
수정 아이콘
아 결국 우려했던 일이..
happyend님처럼 재미있고 흥미로운 글들을 많이 써주시는 분이 피지알에 작별 인사를 고한다는 것이 많이 아쉽습니다..
피지알을 찾는 재미를 주신 분인데..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나중에 여유가 생길 때 다시 이 곳에서 좋은 글들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10/08/03 15:00
수정 아이콘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아픈 일이 있으셨다면, 잠시 글쓰기는 끊으시더라도, 가끔 들려서 유게투어도 하시면서 즐기세요.
꼭 심도있는 역사얘기가 아니더라도, 피지알은 신변잡기를 늘어놓고, 시덥잖은 댓글놀이 하기에도 좋은 곳이잖아요?
happyend님의 글들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워간 사람 중 한명으로서, 굿바이라는 말은 너무 가슴이 아프네요...
DavidVilla
10/08/03 15:14
수정 아이콘
진심으로 happyend님 덕분에 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토론에 대한 불가능 선언'은 어찌어찌 받아 들이더라도(그런데 무슨 일 때문인가요..) 역사글 자체를 전혀 안 올려주신다면 너무 섭섭하고 허전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도 저는 happyend님이 느끼고 있고, 또 이미 느꼈을 감정들을 1%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게 그저 아쉬울 뿐이네요. 후우..

그와는 별개로 지금 이 글을 읽으면서도 전 정말 기분이 좋았습니다. '왜 제목이 굿바이 피지알이지? 혹시 제목 잘못 단 게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들었는데, 상황은....
태바리
10/08/03 15:39
수정 아이콘
한동안 글을 안쓰신다 했더니 무슨일이 있으셨는지...
저를 포함 글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으니깐 다시 돌아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두미키
10/08/03 15:55
수정 아이콘
happyend님 이리 떠나시면 안됩니다.. 해피엔드님의 역사 관련된 글 너무나 좋아했습니다......
여유를 찾아 다시 오셨음 하는군요..

ps.헐.. 벌써 탈퇴하셨군요;;
10/08/03 16:11
수정 아이콘
오전에 있었던 질게의 글이 직접적인 원인인지 아니면 여기에 쓰신대로 '근현대사 토론의 한계' 때문인지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확실히 최근에 happyend님의 글이 뜸하다 여겼고, 오전의 질문에 대해서는 대단히 옳지 못하다 여겼기에 비판적인 스탠스를 짤막하게 드러냈습니다만, 이렇게 갑자기 확 떠나시는 모습을 보니 좀 그렇네요..

다른 곳에서라도 원하시는 바를 이루시길 바랍니다.
점박이멍멍이
10/08/03 17:10
수정 아이콘
님의 글과 댓글에 있던 글은 제 생각의 폭을 많이 넓혀줬습니다...
어떤 일이 있으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굳이 이곳을 떠나지 않으셔도 되는 상황이시라면, 그냥 편하게 오가는 사이트로 계속 남아주셨으면 합니다.
여역님도 그렇고 오래전부터 보아오던 아이디가 안보이는 것이 참 가슴아프군요...
릴리러쉬
10/08/03 17:27
수정 아이콘
해피엔드님 어디가세요.
해피엔드님 때문에 많은 도움이 되었는데...
10/08/03 18:09
수정 아이콘
응? 이게 뭔가요???
자유 게시판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던 글들을 써주시던 happyend님께서 절필을 선언하시다니요!!!

언제든 어떤 곳이든 다시 happyend님의 재미있는 글을 보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10/08/03 20:45
수정 아이콘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편안히 쉬시고 다시 뵐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바나나 셜록셜
10/08/03 21:05
수정 아이콘
언젠가 꼭 만나보고 싶었던 분인데 이렇게 탈퇴하시면 아니되옵니다.
YellOwFunnY
10/08/03 21:22
수정 아이콘
사고 하는 방식의 폭을 넓혀 주시던 분이 가셨네요.
안타깝습니다.
zanhokcheonsa
10/08/04 00:44
수정 아이콘
오랜기간동안 글들을 보면서(눈팅) 가장 좋아하던 글이 happyend 님의 글이었는데 아쉽네요....역사는 반복되기에 돌아볼 가치는 많다고 생각합니다..살면서 어려운 일이 있을때 ..역사를 반추하면 ..해답이 나오죠..어디에 계시든 역사에 대한 공부와 성찰은 그치지 마시고 건승하시길 바랍니다.
10/08/04 18:07
수정 아이콘
happyend님 글 제일 좋아했는데, 휴가 갔다왔더니 이게 무슨..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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