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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0/07/17 00:16:00
Name 헥스밤
Subject [일반] 우리, 술먹자.
"핸드폰이 고장난 덕에 여러 일정을 말아먹었어. 며칠 전부터 자꾸 꺼지더라구. 그리고 문자는 되는데 통화가 안 돼. 지도교수는 연구실 전체 공지 메일의 PS에다가 굵은 글씨로 '그런데 X야, 너 또 전화를 아예 꺼두었구나. 어쨌든 다음 회의는 수요일이다'라고 코멘트했고, 받아야 할 택배는 하숙방 옆 친구에게 핸드폰을 빌려서 지랄생쇼를 한 덕에 한바가지 욕과 함께 겨우 받았고, 일년만에 연락한 휴가나온 후배라거나 전에 사귀었던 친구의 전화는 받을 수 없어서 갑갑했고. 이봐요, 나는 전화를 꺼두지 않았아요. 지도교수님. 택배기사님. 후배님. 옛 사랑님. 그렇다고 해서 내 잘못이 아닌 건 아니겠지요. 이미 지도교수가 있다거나 급하게 받아야 할 물건을 주문했다거나 오랫동안 얼굴을 보지 않은 후배가 있다거나 옛 사랑이 있다는 게 잘못일테니까.

물론 전화기가 꺼진 덕에 편하긴 했지. 전화 없이도 해야 할 일들은 충분히 많았으니까. 날아 온 글을 번역해야 하고, 편집해야 하고, 내일은 학원에서 강의를 해야 해. 그리고 프로젝트의 기획서는 아마 어제까지 썼어야 했을 거야. 다행히 담당자한테 전화가 오지 않는 이유는 결국 내가 짤렸거나 담당자도 자기 파트를 못 끝맞췄거나 둘 중 하나겠지(그래도 지난 기획서까지는 담당자의 칭찬을 받을 정도로 잘 썼으니, 후자일꺼야). 담배도 피워야 하고. 심심하면 하숙방 벽을 기어다니는 개미를 꾹 눌러 잡아야 하기도 하고. 그래, 일한답시고 브라우저를 켜놓은 채로 감옥탈출이라거나 하는 소소한 게임들을 하기도 하겠지. 솔직히 말하면 소소하지 않은 게임도 했던 것 같아. 두어 판의 홀덤을 치고 전방에 백여 개의 수류탄도 투척한 것 같으니. 그렇게 바쁘지는 않은데 바빴어. 그리고 핸드폰은 고장났고. 그런데 비까지 온 하루였네. 우산을 쓰고 핸드폰을 수리받으러 나가며 계속 착잡했어. 수리비 많이 나오면 어쩌지. 침수는 고객실수라 고객부담이 상당히 컸던 것 같은데. 다행히 지난 프로젝트에서 번 돈이 들어왔으니 어찌되었건 수리는 할 수 있으니까. 그래도 오늘은 오늘에 대한 핑계가 있으니까. 오늘은 핸드폰도 고쳤고, 내일이 마감인 원고 하나를 대충 번역했고, 지도교수에게 사과문을 썼고, 나는 소위 3호봉으로 진급했고. 열두 시가 넘었고.

내일은 출근해야 해. 그리고 학생들에게 논술의 기초에 대해서 가르쳐야겠지. 다행히 저녁 출근이지만 출근은 저녁에 하든 아침에 하든 괴로워. 내일은 지도교수가 시킨 일을 마무리해야 돼. 대학원생을 욕하지 마세요. 그들은 단지 잘못한 선택을 한 것 뿐이랍니다 하는 심슨의 명대사가 떠올라. 내일은 다른 원고 하나를 번역해야 해. 목구멍은 포도청이니. 내일까지는 프로젝트 초기 기획서를 마무리해야 해. 이건 아마 절대로 불가능할 거야. 내일은...내일은. 내일이니까.

바쁜 척을 하느라 바쁜 삶이네 그야말로. 사실은 그리 바쁘지 않아. 모든 바쁨은 나의 태만함과 악덕에 기인하지. 절약하는 습관이 있었더라면 지금 하는 일들 중 반 이상은 그만둬도 되었을 것이고, 성실한 습관이 있었더라면 했어야 할 일들을 다 해두었겠지. 글을 쓰는 습관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징징거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렇게 살다가 어찌 될 지 모르겠네. 어쩌면 과거에, 그러니까 군대에 가기 전이라든가, 아 군대 이야기가 나왔으니 예비군 문제도 처리해야 되는데 잘못하면 동원가게 생겼네 아이고야 아무튼, 아무튼 과거에 꿈꿔왔던 종류의 생활일지도 모르겠어. 잡다한 일들을 하고, 삶을 나름대로 즐기고, 어느 정도 바쁘고, 어느 정도 폼도 잡고. 인문대에 입학해서 대학원에 진학하게끔 선험적으로 '예정'된 사람들의 삶이란, 그런데 불성실하고 몰집중한 삶이 닿을 수 있는 곳이란. 그렇게 가끔 성당에 가고 가끔 도박을 하고. 그런데 별로 감흥은 없어. 차라리 내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성격이라면, 아니면 적당히 좋은 회사에 들어가서 열심히 살 수 있는 성격이라면. 공부 잘하고 성실한 애들만큼 부러운 게 없는 나날이야.

그래도 돈이 들어왔잖아. 오랜만에 통장 잔고가 백만 단위를 넘겼어. 물론 이리저리 경비 빼면 내손에 들어올 돈은 몇 푼 안되겠지만. 내일 할 일이 많다고 해도 마시지 않을 수 있나. 마시자고. 적당히 마시고 내일 일어나서 생각하는 거야. 짜증나는 일들은 적당히 잊혀지겠지. 이를테면 떠나간 옛사랑 같은 거야. 좋은 일만 기억하자구.

그러니, 우리 술먹자. 어디가 좋을까. 탱커레이를 베이스로 쓰는 가격이 비싼 모바의 마티니도 괜찮을 듯 하고(하지만 거긴 남자혼자 가기 좀 위험하잖아?). 오천원짜리 파전도 낫 배드. 간단히 맥주 한 잔 하는것도 좋겠지. 오늘같은 날에는 역시 씁쓸한 에일일까. 뭐가 되도 좋아. 우리, 술먹자. 사람들에도 조금은 지쳤어. 모두가 자신의 힘듬을 나누고 있는 건 지겨운 일이야. 차라리 그 시간에 이언 해킹이나 브루노 라투어를 읽겠어. 아니, 즐거운 일이고 그래서 사람들은 친구를 만들고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하는거고 아니 사람들은이 아니라 나도 그래왔고 그럴 거지만은 아무튼 오늘은 좀 지친다.

그러니, 일들을 대충 정리하고 우리 술먹자. 둘이 술마시는 건 오랜만이잖아"

하고 화장실 거울을 보며 지껄였다. 오랫만에 혼자 술마시러 나가야지. 웃흥. 모두 좋은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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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프의대모험
10/07/17 00:20
수정 아이콘
저도 내일모레 휴가나오는 친구랑 바닷가에서 한번 부을 계획인데..
글이 착착 감기네요
크크 지금 저는 술안먹은지 오래돼서 술이 보고싶은지 친구가 보고싶은지 구별이 안되는 상태..
츄츄다이어리
10/07/17 00:26
수정 아이콘
헤엑 혼자 술마시러 나가시기두 하나요?
좋은 밤 보내세요~
10/07/17 00:27
수정 아이콘
저는 오늘 집에서 방콕을..
잔고는 2천원..어제 축구화 주문으로 통장잔고는 5천원
그렇지만 아직 발송조차 안해..어젯밤부터 비가 너무 와서 운동장도 젖었어.
축구할 생각에 돈 다 썼는데 대책이 없습니다..
술생각도..노래방생각도..축구생각도 무지 나는 하루입니다..
내일은..점심먹으면서 Cj응원하다가 나가 보렵니다.
축구 못하면 사람 구경이라도 할겸
10/07/17 00:30
수정 아이콘
집 근처에 (요즘은 한국에도 이게 있다고 하던데) 술 판매 전문점이 생겼습니다. 해서 요즘은 종종 안먹어본 맥주 한팩씩 사다가 먹는 맛이 쏠쏠하지요. 어제는 LandShark 라는 라거를 먹다가 잠들었는데, 맛이 괜찮더군요.

좋은 밤 되세요~ 웃흥~
착한밥팅z
10/07/17 00:32
수정 아이콘
와, 정말 제가 쓰고싶은 글이네요. 정말 잘 읽었습니다.
이런 멋진글을 쓰고 싶어서 끄적끄적 자게에 올려보지만 현실은... ㅠㅠ
10/07/17 00:44
수정 아이콘
목요일날 출근 해서 지금까지 일하고 있는 중 입니다.

술이 필요 합니다.
헥스밤
10/07/17 00:48
수정 아이콘
이제 나갑니다- 모두 즐거운 밤 되세요 웃흥.
10/07/17 00:56
수정 아이콘
왠지 리쌍의 '우리지금 만나.'라는 노래가 생각나네요.
몽정가
10/07/17 01:03
수정 아이콘
소소한 듯 하면서 뭔가 여운이 느껴지는 이런 글 너무 좋습니다.
술이란 놈이 참 오묘한 것이 여럿이 마셔도 좋고 혼자 마셔도 참 좋다는 것이지요.
비도 추적하니(사실은 미친듯이...)오는 새벽이네요. 술이 맛날 환상의 시간인 것 같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세요~!
10/07/17 01:52
수정 아이콘
우연히 문득 자기좀 주어달라는 제목을 가진 잡지를 주어보았는데 피지알에서 핵스밤님이 썼던 글이 올라온 거 보고 깜작 놀랐었답니다.
혹시 이 글도 나중에 또 주어달라던 그 잡지에서 다시 보게될라나요?
참 글을 맛깔나게 쓰시는 것 같아 부럽습니다.
10/07/17 02:22
수정 아이콘
여운이 있어요.. 글 잘 읽었습니다.
켈로그김
10/07/17 05:23
수정 아이콘
에헤헤... 난 술먹고 왔는뎅
대구청년
10/07/17 05:41
수정 아이콘
저도 어제 살짝한잔 했습니다..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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