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곳에 쓴 일상적인 이야기인 덕에. 반말입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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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에 나는 두 개의 이사를 한다. 자취하던 원룸을 빼고 고시원으로 옮기게 되는 것과, 서울에 있던 본가가 경기도로 이사하게 되는 것. 두 경우 모두 경제적인 다운사이징이지만 그리 슬프거나 위축되지는 않는다.
각각의 이사는 내게 각각 두 번 째의 이사이다. 나는 세 번 째 자취방과 세 번 째 본가로 옮기게 되는 것이다. 어느 것 부터 이야기를 할까. 본가에 대해서? 본가.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서울의 변두리의 하나의 <상징>이 될 수 있던, 상도동이었다. 철거민. 주변부. 위험한 치안. 저개발 등의 단어와 썩 잘 어울리는 공간. 나는 그 공간을 매우 좋아했었고, 상도동에서 지금 내가 사는 공간으로 옮겨왔을 때 기분이 꽤 언짢았었다. 나는 그 공간과 그 집과 그 위에 펼쳐졌던 추억들을 사랑했었다. 태어나서 스물 두 살 까지 슬픔이 무엇인지 알 턱이 없는 시기를 보낸 곳에 대한 기억이 나쁘기란 힘든 법이다. 그곳에서 나는 많은 <첫> 일들을 겪었다. 처음 태어났고, 처음 입학했고, 처음 군대를 갔고. 누구나 겪을 법한 그런 처음. 처음 사랑을 했었고 처음 섹스를 했었고 처음 술을 마셨고 처음 담배를 피웠고 처음 데모에 나갔고.
구식이고 조금은 비좁고 비효율적으로 공간이 배치되어 있으며 자주 고장나는 수도와 보일러로 무장한, 그러나 마당이 있던 아담한 2층짜리 단독주택은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가족들과 함께 사는 집에서 따로 한 층을 쓴다는 것은 매우 평안한 단절을 의미한다. 자취의 강점과 가족과 같이 사는 것의 강점만을 갖춘 그런. 까뮈식 표현으로 solidaire와 solitaire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던 그러한 공간이었다.
이사의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아마도 군대에 있던 시절에 이사를 했던 것 같고, 이사 전후로 신경써야 할 일들이 많았었다. 나는 그저 휴가를 나와 다른 집으로 들어가는 이사가 끝났다. 한참 후에, 아끼던 두어 권의 책이 사라진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이사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데서 잃어버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지금 사는 집은 그럭저럭한 아파트다. 그런저런 동네에 있고, 그런저런 편의성이 있다. 경기도로 통하는 길목에 있기에 급할 때 택시가 뭣같이 잡히지 않는다는 단점과, 주위에 온통 주택 뿐이라 일상의 모험이 없다는 단점과, 버스든 지하철이든 타려면 몇 개의 신호등을 지나쳐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반경 500m 내에 치킨집이 여섯 개 정도 있다는 장점이 있다. 나는 치킨을 매우 좋아한다. 여기서 나는 많은 것들을 그만두었다. 그만두지 않은 것은 술과 담배 정도가 아닐까. 여러 가지 일들로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꿈을 꾸는 대신 잠을 많이 잤다. 이사를 가게 될 집은, 모르겠다. 지금 살고 있는 집 앞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 더 경기도 쪽으로 들어가면 나온다니, 아마 지금 사는 집과 대체로 비슷할 것 같은 느낌이다. 큰 관심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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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내 공간"을 구한 것은 내가 복학한 학기였다. 이런저런 일들을 시작했고, 의욕차게 보내려는 마음에 학교 뒷산에 접한, '학교 가기에는 최적의, 그러나 나가 놀기에는 최악의' 고시원에 들어갔다. 비슷한 성향의 친구들이 자주 들락날락하던 그런 곳이었다. 같은 건물의 2층에 살던 친구는 "자신의 공간이 있다면 신이 된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불을 끄면 세상이 온통 어두워지고 불을 켜면 세상이 온통 밝아진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산 중턱에 있는 건물 5층 내 방 창문에서 보이는 야경은 신이 된 느낌보다 황홀했었다. 야경을 그리고자 생각으로 집에서 놀던 캔버스를 옮겨왔다. 살던 내내 야경은 그리지 않았다. 어이없이 죽어버린 어떤 가수의 초상과, 좋아하는 색으로 떡칠된 초현실주의적 자화상 정도가 그때 그린 전부였다. 와우를 시작했었다. 고시원 방에서 주말에 홀로 앉아 와우를 하는 일이 주는 나른한 행복감과 교묘한 비참함을 만끽했었다. 시내가 멀었기에 술을 먹지 않고 조용히 명상하며 보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실패했다. 고시원에서 무료로 지급되는 밥과 김치만으로, 나는 2층에 살던 친한 친구와 일주일에 다섯 번 정도 술을 마셨다. 옥상에 올라가서, 옥상 배전반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안테나를 우리 둘 사이에 두고.
방은 한국 문학적인 잡동사니로 가득 차 있었다. 기형도. 공지영. 김종삼. 성석제. 하루키. 맑스. 레닌. 니체. 프로이트. 빈 술병과 담배갑들. 캔버스. 물감. 쓰다 만 습작들. 쓰다 만 레포트. 쓰다 만 편지. 쓰지 않은 콘돔과 다 쓴 콘돔. 웃고 떠들던 사람들의 체취와 체모. 말라비틀어진 과일. 3도 정도 기울어지고, 혼자 조용히 누워 자도 격렬하게 삐걱거리던 침대. 소웰을 자주 마셨다. So well. 별 것 아닌 소주와 웰치스로도 행복 비슷하게 흉내낼 수 있던 슬픔과 함께하던 날들. 그렇게 살다가 돌아왔다. 이사할 때 군화를 잃어버린 덕분에 예비군 훈련 때마다 골치가 아프다.
1년간의 고시원 생활을 접고 돌아와 집에서 통학하다가 대학원 입학과 함께 다시 방을 구하게 되었다. 무시무시한 방이었다. 절대로 내 경제적 능력으로 버틸 수 없는 보증금과 월세와 크기와 베란다와 화장실을 갖춘.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었다. 나는 내 공간에서 축구도 하고 싶었고 야구도 하고 싶었고 사랑도 하고 싶었고 내 연구도 하고 싶었고 옷을 아무렇게나 던져놓아도 발 디딜 틈이 있었으면 좋겠고 왠지는 모르겠지만 손대던 조그마한 수익사업들이 대체로 잘 되어서 월세 정도는 밀리지 않고 낼 자신이 있었고 따위의 이유였다. 상기한 것들 중에 대부분은 실패했다. 덕분에 들어간 보증금은 밀린 월세들에 반토막났다. 도시가스공사와 한전과 적대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고.
윗층에는 영어강사를 하는 알콜중독자이자 선천성 당뇨병 환자인 아일랜드인 형제가 살고 있었고 옆방에는 일본인이 살고 있었다. 내방에는 내가 살고 있었고 그리고 아무 것도 없는 건조한 방이었다. 책과 연구 자료들은 연구실에. 옷들은 본가에. 내 삶은 허공에. 꿈은 과거에. 가끔 티비를 켜고 야구 중계나 스타리그나 성인 영화를 보았다. 한 번도 처음부터 본 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로 한 번도 끝까지 본 것이 없었다. 나는 절대적으로 지치게 되었다. 공간, 혹은 함께 한 사람들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저 지쳤다. 하루에 열 시간은 자야 버틸 수 있었고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한 시간에 두 페이지씩 써내려가던 페이퍼와 습작들은 하루에 두 문장 정도의 진도로 다운그레이드되었다. 공포스러울 정도로 지쳐있었기에, 떠올릴 엄두가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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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는 두 개의 공간에서 두 번째 이전을 준비하고 있다. 그곳의 삶은 내게 어떤 표정을 지어 줄 것인가. 그렇게 나는 대학원 생활을 잠시 그만두고 새로운 삶을 고민하고 있다. 그러한 삶은 내게 어떤 표정을 지어 줄 것인가. 적어도 확실한 것은, 나는 웃을 힘이 없다. 그래도 뭐, 할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