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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7/08 05:20:13
Name 수면왕 김수면
Subject [일반] 상아색으로 치장된 삶에 대해서
1.
지난 삼십 여 년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조심히 반추해본다면, 스물 다섯살까지는 아주 모범적인 삶이었고 스물 다섯살 이후부터는 뒤늦게 배운 도둑질에 탐닉하는 삶이라고 짧게 요약할 수 있다. 스물 다섯살까지, 나는 세계와 격돌하며 오로지 옳고 진리인 것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플라톤이 말하던 철인왕자(哲人王者)의 삶을 동경하며 살아왔다. 그렇기에 삶의 무엇이 내게 이익이 되는가보다는 삶의 무엇이 궁극적으로 옳은가를 바라보며 살아왔다. 혹자는 나의 그러한 모습을 나이브한 백면서생(白面書生)의 모습으로 보았고, 혹자는 훌륭한 학인(學人)의 씨앗으로 보았다. 다행히도 나의 부모님과 많은 은사님들은 나를 후자의 모습으로 긍정적인 해석을 하는데에 거리낌이 없으셨고 내 능력과 실제 됨됨이와는 동떨어진 다소 과대평가된 대우를 받아왔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나의 이러한 모습은 나의 삿됨이, 혹은 사사로움이 드러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은 그런 삿됨이 드러날 진정한 고난에 당도해보지 않은 삶이었던지라 내 밑바닥이 드러날 기회가 없었던 탓이다. 실은 나도 몰랐다. 항상 성취와 물질적인 풍요라는 수위가 일정하게 유지되던 내 삶의 강바닥 밑에 어떤 오물과 어떤 흉물들이 자리잡고 있었는지. 나 조차도 그 넘실대는 강물을 보면서 내 자신의 삶을 알게 모르게 미화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2.
남들 보다 늦게 간 군대에서 나는 내 삶의 밑바닥에 어떤 흉한 욕망과 나약함이 자리잡고 있는지를 처음으로 보게되었다. 육신의 나약함과 정신의 나약함, 권력 앞에서 초라해지는 자기 자신과 으레 받아들여야만 하는 부당함을 피해가기 위해 부렸던 많은 요행들.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나는 군대라는 특수상황을 가정하며 나 자신의 잘못과 본성을 부정하려고 혹은 정당화하려고 애썼지만 실은 어느정도는 내가 이정도의 사람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군대를 다녀온 후 긴 유학생활에서 기존에 쌓아온 타인의 평가와 동떨어진, 오롯한 나 자신을 오랜시간 동안 바라보면서 나는 이러한 내 삶의 밑바닥에 위치한 오물들을 하나하나 냄새 맡고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빗줄기가 끊어진 강바닥에 드러난 추한 나의 본성들은 안타깝게도 내가 저열하다고 말하던 그 모습들과 더하면 더했지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오 년 여의 기간동안에도 나는 이것이 나라는 인간의 삿된 본성임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환경의 차이와 우발적인 몇 가지의 사건들을 탓하는 것에 불과한 자기 위로를 반복했고 강건했던 육신 마저도 그 정신과 함께 서서히 마모되는 것을 바라보는 것 밖에는 어떤 것도 하지 못했다.

3.
그렇게 잘못과 삿된 행동들은 반복한 후에야, 그리고 남들에게 이야기하기 힘든 삿된 행동의 끝에서 큰 손해를 보고 난 후에야 나는 나에게 닥친 많은 불행들이 실은 나 자신의 선택에서 비롯된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은 내가 바꿀 수 있었던 것들, 실은 최악으로 치닫기 전에 막을 수 있었던 문제들이라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런 나 자신을 인정하고 난 후에야 나는 이 모든 문제들 사이에서도 보이지 않던 모든 문제들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나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비싼 값이지만, 많은 재물과 많은 시간을 들여서 찾게된 해답의 꼭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이래로 정말 수많은 시간동안 자아성찰이라는 주제의 책들을 읽었지만, 내 삶에 대해서 진정으로 회개할 수 있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진실로 내 자신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고 내가 잘못한 모든 행동들에 대해서 손해를 봐서 아깝다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한 대가라고 말할 수 있는 선선한 용납을 할 수 있었다.

4.
나는 여태까지 사사롭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에 사사롭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내 자신이 사사로워 질 수 있는 상황에서 얼마나 내가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인간인지를 알게되었다. 아마도 내가 여태까지의 항상 그래왔던, 사사롭지 않을 수 있던 삶을 살았더라면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중에 그 실망과 안타까움을 줄 지 상상할 수도 없다. 오히려 나 혼자 이렇게 모든 잘못을 지고 갈 수 있는 지금 나의 삶에 대해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경각(警覺)할 수 있는 계기가 생긴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젠 나와 같은 삶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는 이들에게 어떤 위로와 방향제시가 필요한 지를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되었다. 나는 나에게 타인을 가르치는 능력이 몹시 부족하다고 느꼈다. 나의 직업상 타인에게 정보를 (일방향으로) 전달하는 일을 해야만 하는 입장에서 이런 자신감 결여는 큰 핸디캡이었다. 그렇지만 이제나마 돌이켜 생각해보건데 나의 자신감 결여는 나라는 사람이 가진 인간적인 불완전성과 타인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요구되던 (내가 알고 보아왔던) 인간적인 완결성의 불일치를 인정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던 무의식적인 거부반응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나에게 인간적인 완결성이 주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내가 그러한 불일치를 인정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조금은 편안한 마음이 든다.

5.
나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 혹은 ‘어떻게 좋은 사회를 만들 것인가’와 같은 추상적이면서도 거대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학인이 품어야 할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선인들이 제시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식의 논리가 실제 삶에서 어떻게 긴밀한 연결성을 갖는지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개인적인 삶이 엉망진창이었다고 하더라도 세상에서 큰 움직임을 만들어 낸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있었고, 반대의 사례도 너무나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건데 전자의 경우는 개인의 삶이 온전하지 못한 것이 그가 (어떻게든) 이룩한 것들을 평가절하할 이유가 된다는 점에서 후자의 온전한 삶이 남들에게 아쉬움을 남기는 것만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완전히 차지 못한 그릇은 언젠가는 다른 누군가가 그 그릇을 채울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를 주지만, 채우고 나서도 어디선가 새는 그릇은 다른 누군가도 기껏 채워봤자 결국은 새버릴 것이라는 설익은 실망을 주지 않을 것인가 하는 논리로 말이다. 실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이제는 내가 왜 수신(修身)이라는 명제로 다시 돌아가 나를 바로잡아야 할 지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6.
항상 모든 것이 좋을 수만은 없다. 하지만 좋지 않은 상황이라고 해서 좋지 않은 방법을 택하라는 법은 없다. 항상 나는 이 질문이 아주 터무니없는 넌센스라고 생각해왔다. 어차피 좋지 않은 상황인데 사는 것이 우선이 아닌가라고 말이다. 하지만 정작 그러한 상황이 나의 삶을 직접 나락이나 죽음에 가까운 삶으로 몰고간 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쉽게 조금의 불편함도 감수하지 않는 쉬운 삶의 자세를 갖고 살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앞으로 내가 살아갈 삶에서 조금의 불편함을 선선히 감내할 수 있는 모습을 나 자신에게서 찾을 수 있다면 그건 참 자랑스러운 삶이 될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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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7/08 08:10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문득, 군대에 다녀오는 것이 사회생활이 도움이 된다 안된다로 늘 논란(된다 vs 안된다 vs 되지만 그 시간에 다른거 하는게 더 도움이 된다)이 있는 것가는 별개로

본문중
"군대에서 나는 내 삶의 밑바닥에 어떤 흉한 욕망과 나약함이 자리잡고 있는지를 처음으로 보게되었다. 육신의 나약함과 정신의 나약함, 권력 앞에서 초라해지는 자기 자신과 으레 받아들여야만 하는 부당함을 피해가기 위해 부렸던 많은 요행들.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나는 군대라는 특수상황을 가정하며 나 자신의 잘못과 본성을 부정하려고 혹은 정당화하려고 애썼지만 실은 어느정도는 내가 이정도의 사람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를 보니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되네요.

글을 읽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저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 전까지는 어렸고, 생각없이 살았다라고 치면 군대에서 나 자신과 처음과 제대로 맞닥뜨렸고
그런 경험이 이전보다는 더 내 자신을 알게 하고 이후 삶에 영향을 많이 주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군대라는 환경이 극단적이어서 '육신의 나약함, 권력 앞에서 초라해지는 모습 등에 어느 정도 강요성을 띄고 있다는 생각도 들지만요.)

다시 한번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수면왕 김수면
15/07/08 22:31
수정 아이콘
저에게는 군대가 제 인생에서 남들의 이익을 희생해서 나의 욕심을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그리고 그러한 사실이 공공연하게 용납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겪은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가 만연한 상황이다보니 너무 쉽게 자신도 남들처럼 행동하는 걸 용납해버렸고요. 그 때 조금이라도 일찍 알았어야 할 텐데 말이죠. Utopia 님의 군생활도 힘드셨을텐데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15/07/08 09:05
수정 아이콘
내가 살아왔던 삶을 돌아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글이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수면왕 김수면
15/07/08 22:35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피나님도 좋은 하루 보내셨길 바랍니다.
시노부
15/07/08 09:19
수정 아이콘
스스로의 기대에 못 미치는 자신을 처음 발견했을때...가 기억나는 글이네요.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면왕 김수면
15/07/08 22:35
수정 아이콘
칭찬 감사합니다. 스스로의 기대를 성취나 결과보다는 마음가짐에 두는 게 조금은 편한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게 맞기도 한 것 같습니다. 결과야 상황이나 요행으로 어떻게든 달라질 수 있지만 마음가짐이 옳다는건 결국 자기자신이 지고가야 하는 마음의 짐의 양과 관련된 거니까요.
켈로그김
15/07/08 09:31
수정 아이콘
모든 과정이 그러하듯, 자아를 가꿔나가는 일도 버그픽스의 연속이지요.
보통 20대 초반에 많이들 겪고, 저도 그 시기에 겪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썼던 일기장 & 수양록을 보면 손발이 오그리토그리..
그 시기 전후의 일들을 떠올리면 이불팡팡..;;
수면왕 김수면
15/07/08 22:33
수정 아이콘
저는 남들이 겪어야 하는 방황이나 사춘기 같은 걸 좀 늦게, 군대를 가기 시작할 무렵부터 겪기 시작한 것 같아요. 뭔가 세상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 충돌하는 과정에서 겪을 방황이나 순간적인 타락(?) 등을 미리 겪고 왔으면 좀 더 성숙한 어른이 되었을 텐데 말이죠. 부끄러운 일화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그냥....
마스터충달
15/07/08 11:03
수정 아이콘
좋은 글이면 추천도 합시다! ^^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수면왕 김수면
15/07/08 22:28
수정 아이콘
쓰고나서 나중에 읽어보니 중언부언, 조리있게 쓰지를 못했네요. 칭찬에 몸 둘바를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충달님 영화쪽글들도 잘 보고있습니다.
15/07/08 11:29
수정 아이콘
잘못됨과 삿되다라는 어휘가 잘못과 동일시되는 것 같은데, 사사롭다라는 의미를 얼마나 담으셨는지 궁금해지네요!
수면왕 김수면
15/07/08 22:27
수정 아이콘
말하자면, 사사로운 나의 이득을 먼저 생각하는 행동이 잘못된 행동이었다고 생각해서 두 단어를 겹쳐 썼습니다. 충분히 남들이나 공적인 이득을 생각할 수 있는 상황들에서 자신만을 생각한 상황이었거든요. 그동안은 내 이익이 남들의 이익과 굳이 상반되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남들에게 공의롭게 보였다는 것이고요. 부끄럽습니다.
망디망디
15/07/08 12:01
수정 아이콘
6번...공감이요
수면왕 김수면
15/07/08 22:36
수정 아이콘
그러게요. 조금만 더 일찍 생각해봤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망디망디
15/07/09 01:25
수정 아이콘
제가 지금 쉬운길만 찾으려 하는거 같아서요... 글쎄요
사실 조금은 머리가 땡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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