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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3/26 00:04
요즘 PGR에 시간 들여 생각해야 할 양질의 글이 봄날이라 그런지 속속 올라오는 것 같군요. 흐흐.
이문열의 책이 확실히, 본인에게는 정치적인 구설수에 오르는 등 문제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빠져들게 하는 맛이 있기는 한가 봅니다. <젊은 날의 초상>은 영 아니었는데, 이 부분이나 이문열 삼국지(아 물론, 국내 삼국지 중에서 가장 심하게 까이는 게 이문열 삼국지이겠습니다마는) 같은, 인간성에 대한 고찰이랄까요? 그런 면에 있어서는 우수한 필력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시간이 나면, 그리고 머릿속에 남아 있으면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소설도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많은 소설가가 그렇지만, 도스토예프스키 역시 인간성을 찌르고 들어가는 데는 한 필력 하는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 보면... 저 역시 모태신앙이었고,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에 들어오면서 세상을 바라보고 교회 외부에서 교회의 썩은 면을 보기 시작하면서 철저한 반기독교로 돌변했습니다(구심점이 목사뿐인 교회의 시스템 자체와 근본주의적인 그 교리를 공격하는 것이기 때문에, 만일 제가 평소에 이 문제로 입을 열었다면 문자 그대로 극단적인 기독교 안티라고 봐도 할 말은 없었을 겁니다). 아인슈타인이었던가요. 자기가 만든 피조물을 심판하는 신을 자기는 상상할 수 없다고 했던 게 말입니다. 그 말에 크게 동의하는 입장입니다. 다들 비슷한 것 같습니다. 계기가 되는 것은 다르죠. 누구는 책으로, 누구는 교계의 현실을 보면서(제가 들었던 목사의 설교 중에서 믿지 않는 자는 모조리 지옥에 간다며 하나하나 들먹였던 게 제가 기독교를 빠져나오게 된 가장 큰 계기였다고 제가 아마 몇 번 이야기했을 겁니다), 또 누구는 반기독교적인 내용을 인터넷에서 접하면서 그렇게 빠져나오게 되지만, 근본적인 질문은 똑같을 겁니다. "그 신이라는 게 있다면 대체 왜 우리 삶을 이 따위로 만들어놓고, 혹은 왜 인간이란 존재를 그렇게 만들어 놓고 자기가 정해 준 길로 안 가면 정죄하겠노라고 강짜를 부린다는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그리고 교계는 절대로 어떠한 속시원한 해답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20년 동안 교회를 다녔던 제가 아는 한으로서는. 물론 좋은 말도 많이 들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현명하게 행동해라. 잠언만 봐도 제 조카에게 들려줄 좋은 구절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20년 동안 저는 "순종하라, 그렇지 않으면 지옥이다"라는 말은 들었을지언정 "왜 순종하지 않으면 지옥에 가야 하는가", 나아가서 "왜 순종하고 안 하고 그런 자유를 신은 우리에게 주었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주로 칼을 들이대는 쪽은 "사람이라면, 그리고 목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면 어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느냐"라는, 현 대한민국의 개신교계의 근본주의적인 모습과 그로 인한 숱한 사회적인 추문, 그리고 나아가서 소위 목(牧)사, 신도들을 이끈다고(牧) 자부하는(이게 교리에 맞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실망스럽고 더러운 모습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사실, 이 점만 보면 "그 사람들이 믿는 걸 보면 그냥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하고 넘길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그 목사들의 사회적 문제를 넘어서서 종교의 교리 자체에 의문을 가지는 입장이고, 그러다 보니 이 글을 그리 쉽게 넘길 수는 없군요.
14/03/26 01:26
뭐 모든 목사가 모든 걸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30분 동안 모든 걸 말해주는 것도 아니니까요. "모든 걸"을 "제대로"라고 바꿔도 무방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14/03/26 00:51
통쾌하게 예수와 기독교를 공격했는데 다 읽고 책을 덮으면 어쩐지 예수가 승리한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제가 사람의 아들을 다 읽고나서 느낀 것과 정확히 일치하네요.
14/03/26 01:05
좋은글 감사합니다 소개하신 두책다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본문의 서두에 나오는 카인의 죄에 대하여 세속인으로써 가볍게 흥미로운점을 피력하자면 만물의 창조주께서 아벨의 제물은 열납은 하셨는데 카인의 제물은 열납을 안하셨다는겁니다 딱히 어떤 이유가 성경에 설명되있지 않습니다. 단지 제물의 종류가 달랐을뿐인데 이것때문에 편애하시기엔 스케일이 너무크신 분이시고 그렇다면 카인을 시험에 들게하셨다고 생각했었는데 왜 아벨은 놔두고 카인에게만 이렇게 심한 운명을 주셨을까가 전 의문이였습니다 그리고 본문에 언급된것처럼 카인의 죄도 자유의지를 벗어난차원에서 어쩌면 희생양처럼 예정되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카인이 찍힌 이유를 나름대로 구상해보았는데 비신도입장에서 하는 소리니 재미삼아 너그럽게 불경스럽지않게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카인의 모친인 하와는 일전에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부끄러운곳을 가리는데 왜 입을 가리지않는지..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그곳을 가리게 되었는지 생각하게됬습니다 이점은 뱀의 유혹은 정말 성적인 유혹이었고 뱀과의 그런 관계를 통해서 그곳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다고 말한다면.. 성경을 왜곡하는 정도가 되겠지만 선악과 자체를 비유로 본다면 저에겐 그렇게 억지스럽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꾸 그런식으로 제가 시나리오를 짜는 이유중 하나가 카인의 존재에 대한 이해가 성립되기 때문일 겁니다 바로 카인이 야훼에게 미움 혹은 시험 아니면 가혹한 운명을 받거나 짊어져야 했던 이유는 그가 바로 뱀의 자식이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겁니다 . 한동안 제 머리속에 자리잡았던 이 얼토당토한? 시나리오가 본문을 읽자 불현듯 떠올라 댓글 달아봅니다
14/03/26 09:51
사회학적 성서 해석의 입장에서 아벨이 양치는 사람이고 카인이 농사짓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핵심이 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후에 신에게 추궁을 당하고 나서 자신에게 내려진 형벌이 너무 중하다고 불평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에게 내려진 형벌은 사실 추방령입니다. 떠올아 다니라는 것인데 카인은 그 형벌이 너무 과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벨은 양치는 자라서 유목을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고 이미 떠돌아 다녔을 겁니다. 정착해서 농사를 짓고 있던 카인이 상징하는 농경사회가 유목민족을 상징하는 아벨을 돌보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바친 제물에서 드러나는데 성경의 스토리상 아직 육식을 하지 않았던 터라 아벨이 상징하는 유목민족은 농경민족에게 도움을 받지 못해서 신에게 드릴 제물마저 양을 드려야 했다는 점에서 명확해 집니다. 그것에 대해서 성경에서의 신은 준엄하게 책임을 묻습니다. 결국에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신에게 버려진다는 단순한 진리를 풀어낸 것이라고 볼 수 있죠.
14/03/26 10:25
매우 단순화 하게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거죠. 일반적으로 신에게 드리는 제물은 좋은 것으로 바치게 되는데 먹을 수도 없는 제물을 바치는 아벨의 환경이 혹독했음을 보여주는 거고 가인에게 의존해서 살 수 밖에 없었는데 가인은 그 책무를 등한시 했기 때문에 신이 아벨의 제사는 받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았다. 그리고 성경의 스토리상이라고 했지 실제로 육식 자체를 하지않았다고 했습니까? 그만큼 정착민들에 비해서 유목민들의 삶이 힘들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고 사람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하는 측은지심조차 품지 않는 정착민들을 향한 성경의 경고였다고 해석하는 거죠.
14/03/26 14:13
카인과 아벨에 대하여 이야기가 나와 잠깐 적어봅니다.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 이후 하나님은 아담에게 '너는 앞으로 피땀흘려 땅을 일구어도 곡식이 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류의 이야기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카인과 아벨 두 후손에게도 마찬가지였죠 이때 카인의 제물은 받아주지만 아벨의 제물은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 이유중 하나가 아벨과 카인 두 사람이 하나님을 얼마나 기만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분명 '너희가 땅을 일구어도 곡식이 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이야기 하지만 카인은 땅을 일구어 곡식을 얻었습니다. 한마디로 '나는 신이라는 존재가 없어도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 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아벨은 가축을 기르며 살아갑니다. 땅에서 곡식을 얻는것이 하나님의 말에 거역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정확한지 모르지만 주워들은 이야기라 몇글자 적어봅니다~
14/03/26 02:17
대심문관:
생물로서의 욕구를 이겨내기 어려운 약한 인간에게 감당못할 것이 뻔한 자유를 주고 그 책임을 묻는 것이 어찌 사랑이 되느냐? 예수: 그럼에도 자유를 준 것이 사랑이다. 크리스찬이 아닌 관점에서 이렇게 이해됩니다. 만약 자유의지가 생물로서의 욕구를 만났을때 한없는 시간이 흘러서라도 반드시 선에 이른다면, 그리고 생물로서의 욕구를 없애주었을 때 오히려 그것이 자유가 선을 향하는 경향성을 없애버린다면 그럼 막연히 '힘든 자유가 우리안의 가축보다 존중이며 사랑'이라는 관점을 넘어 더 분명하게 예수의 사랑은 성립합니다. 느리지만 전진vs만년 제자리, 전자가 사랑이라는 면에서. '만약~'이하의 가정이 가볍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지만 사람을 고찰한 또 다른 근거들로 뒷받침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가정입니다.
14/03/26 10:19
시간내서 다시 한번 읽어 봐야 겠네요. 글이 길기도 하지만 쉽게 들어 오지 않아서리..
카라마초프의 형제들은 명작이라는 이유로 한번 읽었었는데 그 등장인물 이름이 잘 들어 오지 않아서 정말 정말 힘들게 그냥 읽기만 했던 기억이 있네요. 좋은 책인지 모르겠더라구요. 이글을 보니 언제 시간내서 다시 한번 도전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14/03/26 14:53
구어체와 문어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시네요^^;;;
줄거리를 압축해서 이야기하듯 전달하시는 능력은 매우 탁월하신데 사실 글이 뭘 말하고 싶은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예수 out'이 글의 주제인 거 같지는 않고 마지막에 얼핏 주제 같은 문장들이 보이기는 하는데 막상 그 문장들을 위해서 오랫동안 달려온 느낌은 아니고 말입니다. 글쓰기에 대한 평을 하고 싶은 건 아니고, 하고자 하신 말이 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전달하고자 하시는 말이 뭔지 몰라서 적절하게 반응하기는 어려울 거 같고 글을 읽으면서 했던 생각을 적어보자면, 어제 저녁에 올라온 몇개의 글들이 묘하게 공통적으로 '깨어있는 자'와 '각성'에 대한 글이네요. 직접적으로 언급한 글은 이 글이 아니라 길게 쓸 일은 아니지만 무엇이 묘하게 몇몇 분들의 감수성들을 자극했을지,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네요. 저 역시 엘리트와 대중이라는 화두(!)에 매우(?) 몰두하고 있는 사람인지라, yangjyess님의 글을 포함하여, 모든 글들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잘 정리해주신 대심문관 이야기를 읽으면서 라깡의 상상계와 상징계와 실재계에 대한 이야기들이 생각 났습니다. 얼마든지 빵과 자유를 교환할 수 있는 대중들은 상상계에 있고 그들의 자유를 위해 그들을 속이고 있는 대심문관은 상징계에 있고 그 대심문관에게 입을 맞추는 예수는 실재계의 '사물 그 자체'인 셈이겠죠. 대심문관이 예수의 입맞춤에 어떤 생각을 했을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물론 소설과는 다르게 현실의 사람들은 '사물'을 직접적으로 만날 수 없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사람의 아들>에는 상상계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와 상징계에 속한 등장 인물은 있지만 실재계의 사물 그 자체는 결여되어 있네요. 왜 이문열이 도스토예프스키가 되지 못하는가에 대한 대답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젝은 끊임없이 실재계를 언급합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는 철학가지만 동시에 정치가이기도 하지요. 지젝의 라깡 읽기가 이 시대의 정치 철학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막상 라깡에 접근하는 것이 그 문체에 의해 방해받을 수 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세상(사람이라고 바꿔도 되겠죠?)이 어려운 데 이론이 어렵지 않을 수 있겠냐'는 알튀세르의 변명 아닌 변명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는 게 현실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즐거운 지적 경험을 하고 갑니다. 앞으로도 좋은 책들 잘 소개해주세요~
14/03/26 16:00
저도 어제 쓰면서 지금 내가 뭘 얘기하는 거지? 에이 망했다 -_-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ㅜ 원래 의도는 똑같은 주제인듯 하면서도 묘하게 입장차이를 보이는 (이문열은 인간 쪽을 두둔하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예수를 두둔하는 듯한) 두 소설을 소개하고, 어째서 두 작가는 그런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어떤 장치를 통해 그런 태도를 표현했는지를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제 생각조차 정리가 안 되어 있는 상태에서 쓰다 보면 어찌어찌 풀어 나가겠지 하고 질렀다가 망글이 되고 말았네요 크ㅜ 그래서 기왕 올라간 글만 놓고 요약하자면, '인간의 일은 우리 인간들이 알아서 할 테니 당신 예수는 좀 빠져 주라. 신의 아들인 당신이 전달하려 하는 야훼식의 자유와 책임은 어차피 우리가 감당 못한다' 라는 두 소설을 차례로 놓고 인간을 편들고 있는 아하스페르츠와 대심문관의 주장이 어째서 인간에 대한 자기비하의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지 슬램덩크를 예로 들어 알리고 싶었습니다. 대심문관의 주장을 예수가 수용하여 그래... 너희 약한 인간들에게 죄를 묻지 않으마... 라고 한다면 그것은 서태웅의 '경기 진건 너 책임 아니야. 니 그릇은 그정도가 못돼' 라는 응대와 똑같아 진다고 보았습니다. 말씀하신 상징계 상상계 실재계는 솔직히 거의 이해가 안되네요 ㅜ 몇년 전부터 많이 보이는 단어들인데 알아먹질 못하니 참 우울합니다 ㅜ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이라크 전쟁을 예로 들어 이데올로기적 믿음이 상상계, 미국이 지키는 세계질서가 상징계, 석유의 안정적인 공급이 실재계라고 설명한게 그나마 조금 가닥이 잡히긴 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예수가 실재계라고 하시면 제가 뭔가 잘못 받아들인거 아닌가 싶네요.
14/03/26 16:34
참... 예수의 입맞춤을 대심문관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를 궁금해하시니 그 부분을 소설에서 옮겨 적어 보겠습니다.
### 대심문관은 말을 마치고 예수가 무슨 대답을 해 주길 얼마 동안 기다렸다. 그는 상대방의 침묵이 괴로웠다. 예수는 대심문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반박을 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는 듯 그의 마음을 조용히 꿰뚫고 있었다. 씁쓸하고 무서운 말이라도 좋으니 무슨 말이라도 좀 해 주었으면 싶었다. 하지만 예수는 말없이 노인(대심문관)에게로 다가와 아흔 살 먹은 그의 핏기 없는 입술에 조용히 입을 맞추었다. 노인은 몸을 떨었다. 입술의 양 끝도 어쩐지 파르르 떨렸다. 노인은 문 쪽으로 걸어가 문을 열고 예수에게 말했다. '어서 가라.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라... 두 번 다시 오지 말란 말이다... 절대로! 절대로!' 그렇게 예수는 떠나고 입맞춤은 노인의 가슴속에서 불타오르지만 그래도 그는 예전의 이념을 고수했다. ### 사람의 아들에서는 예수가 신의 힘으로 아하스페르츠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칩니다. 카라마조프에서는 조용히 키스를 하구요. 이문열의 예수는 반항하는 인간을 제압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예수는 모든 인간을 포용하고 특히 전 인류를 위해 스스로 죄인이 되기를 불사한 대심문관을 격려합니다. 개인적으로 대심문관의 속마음을 추측해 보건데, 그는 스스로의 주장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알고 있었고 예수가 그걸 지적해주길 바라며 짐짓 도발적으로 추궁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찌보면 '순교자'와도 같은 자신의 역할을 이제 대신 맡아달라고 사정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의 답은 '그래 너가 고생이 많구나 계속 그렇게 열심히 해 봐' 이에 대심문관은 분노하면서도 고마움을 함께 느끼지 않았을까 합니다... 킄
14/03/26 17:16
아고, 답글을 달아주실 거라는 생각은 못했는데, 감사합니다. 아마 제가 글쓰기에 대한 평 아닌 평을 해서 호출 아닌 호출을 한 셈이 된 거 같습니다. 위에도 말씀드렸지만 절대 글쓰기에 대한 지적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댓글로 정리해주신 내용을 보니 한결 이해하기가 쉬워지기는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실재계에 대해서는 제가 잘 설명할 방법은 없고 yangjyess님이 읽으셨던 내용도 맞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칸트적인 입장에서 절대 인식이 가서 닿을 수 없는 사물 그 자체고, 상징계에 끝내 포섭되지 않는 지울 수 없는 얼룩이기도 하고, 어차피 인식이 가 닿을 수 없기 때문에 절대 무이기도 합니다만 실재계라는 이 모순적인 존재때문에 상징계가 무너너지 않을 수 있죠. '과학의 과학성은 절대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다'든가 하는 것들이 실재계를 드러내주는 말들입니다. 라깡의 이론 자체가 일반적인 과학 이론이나 사회과학 이론들과는 다르게 과도하게 '문학'적이라서 이건 이거다 이렇게 결론이 떡하니 나오는 내용이 아닙니다. 실재계 자체도 처음부터 중요하게 다뤘던 개념은 아닌데다 사실 실재계를 꾸준히 재호출하는 건 라깡 자신보다는 지젝인 상황입니다. 그리고 지젝 역시 럭비공 같은 아저씨라서 제가 뭔가를 설명해드릴 내용은 아닌 듯 합니다만, 쓸데없이 '나는 잘 몰라서 할 말이 없다'는 얘기를 이렇게 길게 늘여 쓰는 이유는 실재계의 존재가 아마도 대심문관과 아하스페르츠를 가르는 핵심적인 차이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엄청나게 길게 예수를 아낌없이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두둔하는 느낌이 드는 이유가 바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예수의 입맞춤 때문이 아닐까 싶은 거죠. 논리나 언어로 긍정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그저 의도를 파악할 수 없는 알쏭달쏭한 '입맞춤'을 한 예수는 상징계(대심문관의 논리)로 포섭되지 않는, 하지만 무시할 방법이 없는 절대적인 '사물 그 자체'의 출현인 거죠. 이 사물 그 자체에 대한 이해가 두 작가를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yangjyess님의 논지에도 영향을 줄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강백호는 상상계(나는 천재)에 속한 주체가 '거울'(자신의 실력을 돌아볼 수 있는 시합)을 만나 상징계적 주체(사실은 피지컬만 훌륭한 농구 초초보)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두가지 가능성이 존재하겠죠? 상상계적 주체라면 현실을 도피해서 상상계의 주체성(결핍이 없다는 자기 환상)을 유지하고 싶어할테고 상징계적 주체성(나는 결핍되어 있지만 대타자를 통해서 결핍을 채우고 완전해질 수 있다는 환상)을 받아들이면 현실 속에서 철저하게 무력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농구를 그만둘 것인지, 아니면 뼈를 깍는 노력을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본 지가 너무 오래전이라 슬램덩크의 그 장면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서태웅이 만약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저 입맞추는 예수의 역할을 감당했다면 강백호는 '생각할 수는 있지만 생각할 거리가 없는' 절대 무, 실재계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테고 상상계와 상징계 둘 모두에 속하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향유하는 주체'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내 무력함이 나의 고귀함의 근거가 되는 그런 주체 말입니다. 열심히 운동하는 이유가 '내가 천재'이기 때문인 그런 주체 말이죠. 각설하고, 좋은 글, 좋은 책 소개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건필을 기원합니다~!
14/03/26 19:17
음... ! 슬램덩크에 대입하니 확 이해가 되는군요 크 상상계랑 상징계는 딱 알겠고 실재계가 좀 어렵긴 한데 <사람에 아들과 카라마조프의 차이> 라고 하면 대충 짐작은 가는군요 사실 그걸 쓰고 싶었던 글인데 망해버렸죠 킄 ㅜ 상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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