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선단들을 지휘하는 사람은 경기우도병마사(京畿右道兵馬使) 변광수(邊光秀)와 좌도병마사(左都兵馬使) 이선(李善)이었다. 배를 타고 이동하던 그들은 대도(代島) 지역에 도착했는데, 때마침 왜구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인물로부터 현재의 인천 근처인 이작도(伊昨島)에 대규모의 왜구가 매복하고 있다는 정보를 듣게 된다. 전쟁에서 첩보란 대단히 중요하고, 특히 적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어려운 해전에서는 더욱 중요한 법이지만 변광수와 이선은 이러한 정보를 우습게 여겨 무시하고 군사를 움직였다.
하지만 치명상을 피한 전승원은 그대로 바다를 표류하며 적의 눈을 속이다 밤을 틈 타 왜구의 작은 배에 올라탔다. 전승원은 자신 역시도 기진맥진한 몸으로 큰 부상을 입고 거의 정신을 잃은채 뱃전만을 붙들고 있는 고려 병사 한 명을 구출하고는, 망망대해에서 직접 노를 저어 3일간 이동한 끝에 간신히 남양부(南陽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남겨진 자들이 처절하게 살아남거나 죽어가는 동안 변광수와 이선이 이끈 20여척은 무사히 귀환에 성공했고, 교동, 강화, 서강, 동강 등지에서는 가족을 잃은 백성들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러한 패배를 당한 변광수와 이선은 무슨 술수를 부렸는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피해 규모 : 5,000명 이상 사망
대몽항쟁 이후 고려의 전쟁사가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다 보니 이 시기에 활약한 역전의 무장들, 이를테면 우리 성계 형님의 신출귀몰함 등도 그동안 잘 부각이 안되는 측면이 있었으나, 이 '부각이 안된다' 는 것은 '잘난 사람이 잘난것을 인정받지 못한다.' 는 뜻 뿐만 아니라, '막장인 사람의 막장성을 잘 퍼뜨리지 못했다.' 는 것도 포함된다. 바로 여기서 소개할 인물인 김횡(金鋐)이 그러하다.
사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 중에 막장스런 행보를 보인 지휘관은 한 두명도 아니고, 왜구와의 전쟁 극초기는 물론이고 후반에도 우왕이 조준 등을 감찰관으로 파견하려고 애를 썻을만큼 지휘관들의 무능한 행보는 자주 있었지만, 게중에서도 이 인물은 매우 질이 좋지 않았다.
고려사에 따르면 김횡은 본래 의성현(義城縣) 사람으로, 다름 아닌 우리의 쾌남아 충혜왕 형님을 모셨다고 한다.
"올~~~"
형님과 같이 놀면서 형님의 포스를 흡수해서 그런지 몰라도, 김횡은 그 막장력이 하늘을 찔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후 김횡은 면직이 되었는데, 이것은 그에게 있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면직이 된 김횡이 자리를 잡은 곳은 전라남도 나주였다. 나주하면 나주곰탕과 나주배로 유명하건만, 그러나 김횡은 먹거리보다는 땅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는 이 곳에서 남의 노비와 땅을 마음대로 빼앗아 자신의 재산을 불렸다. 그렇게 배를 두둑하게 벌리고 있었는데, 그런 김횡의 경력에서 중요한 일이 벌어졌다. 왜구가 나주에 침입하자, 김횡은 목포 사람들을 규합하여 나주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친 것이다.
이 공으로 김횡은 다시 복직 될 수 있었다. 또한, 고려사 세가의 기록에 따르면 김횡은 1359년 전라도추포부사(追捕副使)로 전남 무안(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지만 필자의 현재 집이 있는 곳이다)에서 왜구를 상대로 소규모 승전을 거두었다.
이 이후의 막장스런 행보를 본다면 의아할 수도 있으나, 이 무렵의 김횡은 왜구와 싸우는 일에 대해서 약간 괜찮은 활약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에서도 김횡이 전라도 포왜사로서 제법 큰 공을 세웠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김횡은 전부터 수탈하여 모아둔 돈, 그리고 한두번의 승리로 거둔 재물을 이용해 윗선에 뇌물을 부지런히 바치고 있었다. 따라서 작은 공이 유난히 부각되었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없을 것이다. 아무튼 그런 김횡은 홍건적의 침입 이후 개경 수복전에 고려가 전력을 탈탈 모으고 있을때 함께 해서 일등 공신이 되었다.
일등 공신이 된 김횡은 이후 전라도 도순어사가 되어 상당한 실력을 누리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좋게 볼만한 전공들이 좀 있었다. 그 이후부터는 얄짤 없다.
당시 전라도는 대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었던데다가, 왜구가 수차례 침입하는 바람에 전란의 후유증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지옥과도 같았다. 그런데 도순어사가 된 김횡은 이를 위무하기는 커녕, 되려 온갖 방법으로 백성을 수탈해 재산을 불렸다.
여기까진 일반적인 악독한 지방관 같은 면모를 보였다고 치자. 김횡의 비범한 면모는 '군량미의 절반을 착복' 했다는 부분이다. 왜구를 막으라고 보냈더니, 혼자서 전라도 병력의 군량미 절반을 해먹고 있는 것이다! 당시의 전라도가 완전히 평화로운 곳이었다면 그런 부패상이 벌어질 법도 하나, 당시의 전라도는 현재진행형으로 끊임없이 왜구와의 전투가 순천, 장흥, 나주, 무안 등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현장의 병사들에게 갈 군량미 절반을 빼앗았으니, 김횡의 배포를 알 수 있다.
또 대단한 부분은, 김횡이 군량미 뿐만 아니라 조운선에도 손을 쓴 부분이다. 그는 전라도 여러 고을의 조운선에게 모두 세금을 부과했고, 그 세금은 자신의 주머니로 흘러갔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자면 고려는 왜구의 공세로 인해 조정에 제대로 조운선이 오지도 못했으며, 공민왕은 이를 막기 위해 '호위 병력' 으로만 수백여명을 지방에 파견하여 조운선을 호위하게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구는 호위병 수백명을 살해하고 조운선을 약탈했다. 조정에서는 죽을 듯 살듯 저러고 있는데 정작 조운선을 출발시키는 인물은 거기서도 또 해먹고 있는 것이다.
토지와 점탈과 횡령 이라면 이미 훌륭한 탐관오리의 기상이 느껴지게 할텐데, 이 김횡이라는 인물은 여기에 더해 참 알기 쉽게 '음행' 까지 더해졌다. 김횡의 옆에서 일하던 사람 중에 송분(宋芬)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송분이 죽고 부인만 혼자 남았다. 김횡은 그 부인을 일 핑계로 부르더니, 상도 안 끝난 미망인을 벌건 대낮에 강간 한 후 첩으로 삼았다. 이 부분은 아마 충혜왕 형님에게 한 수 배우지 않았던가 싶다. 하다 못해 배에 여자 데리고 탔다는 원균도 대낮에 과부 강간(그것도 상중에)은 안 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조정에 조운선은 바쳐야 했으므로, 1364년 김횡은 현재의 충청남도 예산군과 당진군 부근인 내포(內浦)까지 조운선을 호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병력의 절반을 잃는 참패를 당했다.
여기까진 그럴 수도 있다. 나폴레옹이라도 질 상황이 되면 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김횡은 뇌물을 기가 막히게 바치며 공민왕의 측근들에게 아부했고, 이 공민왕의 측근들은 김횡을 칭찬하며 병력 절반을 잃은 패배를 되려 승전으로 바꾸는 기염을 토했다. 이때문에 김횡은 처벌은 커녕, 되려 공민왕으로부터 "앞으로도 열심히 하라." 고 술까지 받았다. 이에 온 나라 사람들이 분개했다고 한다.
이 김횡은 이후 신돈의 일당으로 몰려 유배 되었지만, 패배도 승전으로 바꾸는 능력을 가졌는데 그깟 신돈의 일파설이라 별다른 위협도 되지 못했다. 김횡은 이후 동지밀직에 임명되어 복직했다. 그는 다시 전라도의 등골을 빼먹기 위해 전라도로 갔으나, 초창기에 왜구를 몇번 막아내던 행운도 사라지고 없어 왜구의 침입을 막지 못했다는 탄핵만을 들어야 했다.
그렇게 되자 김횡은 이제 전라도에서 해먹을 것은 더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는 김흥경(金興慶)과 환관 김사행(金師幸)이 공민왕의 총애를 받는다고 판단,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뇌물 공세를 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대가로 경상도 도순무사로 화개장터 넘듯 넘어올 수 있었다.
경상도에서 김횡이 한 짓도 비슷했다. 그는 경상도에서 온갖 막장 짓를 다 하면서 자신의 배를 채우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에 보다 못한 안렴사 유구(柳玽)를 탄핵했는데, 여기에 김횡은 혁시 비상한 태도를 취하였다. 즉 이번에는 자신이 역으로 유구의 뒷조사를 해서 탈탈 털어 구린점을 찾고, 역으로 유구를 탄핵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전라도를 떠나 자신의 선택으로 온 경상도에서, 김횡은 느긋하게 배를 두들기고 있었다. 경상도야 말로 이제 더 해먹을 것도 없을 전라도 대신 그에게 주어진 선물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1374년, 무려 350여척의 왜구가 경상도 앞바다에 나타났다.
이 350여척의 왜구는 그때까지 나타난 왜구 함선의 숫자 중에서도 최고 수준이었다. 이 350여척의 왜구 함선에 각각 30명씩만 탔다고 해도 그 숫자는 1만이 넘는다. 25명씩 탔다고 해도 8,000명이 넘는 숫자였다. 당시까지 고려가 왜구를 상대로 거둔 최대의 승리는 1364년 김속명이 왜구 3,000여명을 참살한 진해 전투와 왜구 1,000여명을 참살한 홍사우의 삼일포 전투 등이 다였다. 그 승리도 다른 경우와 비교하면 대단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350여척의 습격을 받았으니, 이는 말할 것도 없다.
갑자기 저 멀리서 나타난 엄청난 숫자의 왜선들은, 거칠 것도 없이 다른곳도 아닌 고려군이 모인 합포의 군영을 공격했다. 갑작스럽게 대규모 함선이 기습을 가하고, 군영에 불이 붙자 합포의 고려군은 별다른 반항도 못하고 처참하게 학살되었다.
이때 사망한 고려군의 숫자는 고려사의 기록으로는 무려 5,000여명! 전사자에 대한 숫자는 고려사에서는 오천여명五千餘人, 고려사절요에서는 오십여명五十餘人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후 극형을 내린 공민왕의 태도를 보자면, 만일 350여척의 함선이 공격해 왔는데 50명이 전사했다고 극형을 내리는 왕이라면 공민왕은 양심도 없는 인간이 되므로 50명은 5,000여명의 오기로 보인다.
이 5,000여명이라는 전사자의 숫자는 가히 엄청나 수준이었다. 당시 고려는 한숨을 돌렸다고 할만한 1388년에도 제 2차 요동원정에 5만여명, 전투병력만 따졌을지 3만 8천명 정도를 동원했을 뿐이다. 요동 원정 외에 왜구를 막기 위해 남은 병력을 최대한 많이 잡아 1만이라고 하여도 당시 고려의 군대는 6만 남짓이었을텐데, 그렇다면 1388년의 기준으로 보아도 국가 전체 병력의 12분의 1이 제대로 전투 한번 해보지 못하고 녹은 셈이다. 하물며 1374년 당시에는 그보다도 상황이 열악했을 터이다.
더구나 이 경우는 고려군이 모여있던 합포의 군영이 공격을 받은 경우로, 각지에서 일단 사람을 대충 끌어모아 20만의 숫자를 만들어 내세웠던 개경 수복전처럼 삽시간에 병력을 불린 경우도 아니었기에, 이 5,000여명의 병력 피해는 엄청난 수준이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심지어 한국 해전 역사상 최악의 패배라는 칠천량 전투 당시의 전사자도 이보다 더 많을지 장담 할 순 없다. 칠천량 전투의 '전사자' 에 대해 난중잡록 등에서는 엄청난 수준이었다는 늬앙스로 묘사되어 있으나, 이덕형의 보고 등에서는 거의 죽은 사람이 없다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물론 대규모 군대가 흩어지고 슬금슬금 숨어 있다가 명량 이후에나 합류하곤 했기에 군대의 피해가 막심하긴 하나, 본래 근대 이전의 전투에서 살상률은 그리 높은 편은 아니고 대부분은 한번 무너지면 우르르 흩어지곤 하는 점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확실하게 사자(死者)가 5,000명이라고 하는 합포 전투의 피해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죽은 사람이 5,000명이라면, 혼란한 와중에 도망친 사람들을 포함하면 대체 몇명이라는 이야기인가?
전투에 나섰다가 갑자기 포위되거나 한 것도 아니고, 멀쩡히 군영에 머물던 병력 5,000여명을 불귀의 객으로 만든 김횡은 이제 뇌물로 어떻게 수습해볼 수 있는 정도를 넘어가고 말았다. 결국 김횡은 그 즉시 공민왕이 파견한 조림(趙琳)에 의하여 처형되고, 시신은 완전히 찢겨저 각 도로 보내져서 지휘관들에게 경고하는 의미로 쓰여졌다.
결국 김횡은 자기 나름대로 알랑방귀 뀌면서 전라도에 이어 다시 한번 경상도를 기회의 땅으로 삼았지만, 갑자기 나타난 350여척의 대함대 때문에 그 경상도가 되려 끝장이 나는 땅이 되고 말았다. 사실 1360년도 후반부부터 1370년도 초반까지는 '어디까지나 비교적' 왜구의 대규모 침입이 드물었던 소강기 였기에 김횡 역시도 어느정도 안심을 하고 있었겠지만, 1372년을 지나면서 왜구는 다시 한번 막강한 세력을 과시하며 쳐들어왔다. 그리고 제딴에는 머리 좀 굴린다고 했을 김횡은 거기에 말려들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