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어느 바에서 일할 때의 이야기다. 사실 Bar라기 보다는 Pub에 가까운 곳이었기에, 손님과 딱히 많은 이야기를 나누거나 하는일은 없었다. 주로 오는 손님들은 홀의 테이블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맥주를 마시는 그런. 그저 늦은 시간, 홀의 손님들이 모두 빠지고 혼자 혹은 두셋이 온 단골 손님들이 바에 앉으면 시덥잖은 농담이나 서로에게 한두 발 쏘아대곤 하는 그런 공간이었다. 나는 주로 잔을 닦았다. 잔을 닦고 또 닦았다. 그러다 가끔 잔을 깨기도 하고 그랬었다. 사는 게 뭐 그런 거지. 잔을 깨는 빈도만큼이나 가끔 소소한 사고들이 있었다. 만취한 손님이라거나, 토사물이라거나, 뭐. 그렇고 그런 흔한 비일상 말이다. 너무 오래 전의 일이라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는 지 이젠 기억조차 희미하다, 라고 할 참에 기억나는 일이 하나 생겨서, 쓴다.
언젠가의 근무일이었다. 그날도 손님은 참 많았다. 나는 잔을 닦고 닦고 또 닦았다. 이렇게 잔을 닦다가는 주부우울증에 걸리거나 주부습진에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한 차례 손님들이 빠져나가고, 가게는 조용해졌다. 그리고 바 테이블에 손님이 세 명 앉았다. 언제나처럼 시덥잖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다지 재미없는 이야기였다. 사장은 손님이 없던 시간부터 혼자 맥주를 마구 퍼마시다가, 바 안쪽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건 주로 내 쪽이었다는 이야기이지. 슬픈 일이었다. 슬플 정도로 재미없고 우스운 상황이었기에.
바에는 서로 일행인 누님 둘과, 혼자 온 남자 하나가 있었다. 셋 다 가게에는 몇 번 온 것 같았고, 누님 둘과 남자 하나는 초면인 것 같았다. 그리고 남자는, 아아, 제발, 아아, 자기 딴에는 작업, 이라는 것을 걸고 있었다. 기억을 떠올리기가 두려울 정도로 오그라드는 방식으로. 아아. 으으. 남자는 서른 중반, 혹은 그 이상이었고 누님들은 서른 중반, 혹은 그 이하였다. 아니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다. 어쨌거나 21세기였는데, 비록 가게에 흐르던 노래는 20세기의 노래였고, 가게의 기풍도 20세기적이었지만 어쨌거나 그 때는 21세기였는데.
나의 눈 앞에는 20세기가, 아니 혹은 그보다 이른 어느 시기가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학생운동을 했다고 말했다. 나는 학생운동을 스쳐간 사람들을 수도 없이 보아 왔고, 단 한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그들을 존경하는 편이다. 그 단 한가지 경우는, 여자 앞에서 그걸 자랑스레 늘어놓는 경우다. 이건 최악이다. 차라리 처음 보는 여자 앞에서 '내가 여자의 마음을 읽는 데 탁월하지' 라거나 '제가 이상하게 여자한테 인기가 많아서요' 라고 말하는 쪽이 훨씬 낫다. 아니아니, 차라리 '오늘 밤 교미하지 않겠어요' 쪽이 나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저 단 한 가지 최악의 경우를 살아오면서 제법 봐왔다. 그리고 그날도 그랬던 것이다. 그는 갑자기 시대의 불운을 모두 어깨에 짊어 진 학생운동의 화신에 빙의되었다. 물론 과거란 소중한 것이고, 처음 보는 사람과의 대화를 이어가기에 나쁘지 않은 소재일지도 모른다. 처음 보는 이성에게 학생 운동의 경험과 고뇌를 이야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하지만 확실한 건 말이지, 그것은 결코 작업용으로 유용하지 않다. 그리고 씨발, 안 쪽팔리냐. 그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 자체가 쪽팔리는 일이라는 게 아니라, 당신의 과거의 소중했던 그리고 치열했던 경험을 고작 그런식으로 전유한다는 거 말야. 갓 대학 졸업한 사회초년생도 아니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하긴, 대부분의 최악의 사태는 시작부터 끝까지 최악이다. 최악의 냄새가 조금이라도 난다면, 도망쳐야 한다. 냄새가 나는 순간, 이미 최악의 종말이 당신을 위해 천천히, 천천히 준비되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최상의 남자를 상상한다는 것은 나같은 범인의 상상력으로는 상당히 힘이 드는 일이다. 하지만 최악의 남자를 상상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다.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기웃거리다가, '낡아빠진 정치운동'에 환멸을 느끼고 문화 운동에 기웃거린다. 그리고 재즈나 흑백 사진 같은 걸 찍는다. 이 정도면 최악의 자리에 오를 만 하다. 아니, 사실 이러한 요소 그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써놓고 나니 이는 이제 가끔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에도 오르곤 하는 하루키의 삶과 닮았다. 나는 결코 하루키가 최악의 남자라거나, 혹은 최악의 남자에 가까운 남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외려 그는 차라리 최상의 남자 쪽에 훨씬 더 가까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유려함이다. 대학 시절 학생 운동을 할지라도 유려하게, 낡아빠진 정치운동에 환멸을 느끼고 냉소를 날리건 문화 운동을 하건 천박하지 않게. 재즈나 흑백 사진에 대한 취향은 노골적이지 않게. 문제가 되는 것은 오로지 유려함이다. 그리고 그 유려함이 문제를 일으킨 경우랄까.
내 앞의 남자는 결코 유려하지 못하였다. 즉, 그는 학생 운동 이야기 이후에 재즈 이야기를 꺼냈는데, 그가 꺼낸 재즈 이야기는 그가 꺼낸 학생 운동 이야기보다 더 답이 (그리고 재미가) 없는 이야기였다는 말이다. 차라리 건담이나 스타크래프트, 혹은 프로야구 이야기를 꺼내는 쪽이 나았을 것이다. 적어도 그건 '아, 이새끼 폼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구나' 라는 감정을 느낄 필요는 없는 거잖아. 하지만 하필이면 재즈라니. 학생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재즈 이야기를 하는 건 하루키로 족하다. 하루키 정도로 쓸 수 있거나 말할 수 있거나. 아니, 굳이 노벨문학상 후보 정도가 아니어도 된다. 그냥 사람, 정도면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앞의 남자는 그냥 사람, 정도가 되지 않았다. 와, '학생운동과 재즈 이야기로 여자와 바텐더를 지루하게 만들기 대회' 같은 게 있다면 세계우승, 못해도 준우승은 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었달까.
그리고 또 하나의 불운이 삶에 끼어들었다. 여자가 예의상의 웃음을 지어 준 것이다. 아무리 봐도 재미 없어 보이는 게 역력한데, 예의상 웃어준 게 분명하다(나는 이런 쪽으로 감이 좋은 편이다). 남자는 신나서 이야기를 계속 진행했다. 그리고 나는 젊었으며, 당시에 내가 일하던 가게는 비록 내가 애정하는 가게이기는 하였으나 내 가게는 아니었다. 이 말인 즉슨, 나는 슬슬 둘 사이의 대화에 겐세이를 놓으며 나의 방식으로 여자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는 거지. 나는 그 여성분께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하물며 내 취향에는 딱히 예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선 그런 게 중요하지 않지. 그리고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계속 자기 이야기를 진행해나갔다. 나를 슬슬 의식해가면서. 안 유려하게. 그리고 참사가 일어났다.
21세기에, '제가 손금을 볼 줄 아는데, 손금 봐드릴까요' 라고 하는 놈들은 손모가지를 잘라내거나 눈깔을 파버리거나 아가리를 봉인해야 한다. 명심해라, 손과 눈과 입이 아니라 손모가지와 눈깔과 아가리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저 멋진 말을 하시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손바닥을 주물럭주물럭주물럭. 와, 나 정말 민망해서 쓰러질 뻔 했다. 손님 술이 과하신 것 같아요, 정도의 말을 할까말까 고민하며 사장을 쏘아봤지만 사장은 이미 의자에 앉아 꿈나라로 떨어진 지 오래. 이렇게 된 이상 에라이, 즐기자는 마음가짐이 들었다. 나는 지금보다 어렸고 내가 일하던 가게는 내 가게가 아니었으니까. 흐, 손님. 손금 같은 거 봐주는 거 너무 고전적인 거 아니에요? 라는 식으로 돌려 말했다.
아, 물론 그는 '고전적인 방식'을 칭찬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맙소사.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뭐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칭찬으로 받아들여 준 게 다행이지. 아니었더라면 큰일 날 뻔했잖아. 하지만 그가 나를 경계했던 건 분명하다. 내가 중간 중간 말에 자주 끼어들었으니. 그러다 담배가 다 떨어졌다. 이미 술도 마셨겠다, 옆의 여자도 다 넘어왔겠다(고 적어도 그는 생각했겠다), 근데 어린 바텐더놈이 자꾸 옆에서 방해하네. 패기와 기세가 등등한 그는 내게 반말로 '담배 다 떨어졌는데, 어린 친구가 담배나 좀 사오지' 라고 말했다. 어이쿠, 참 가지가지 하시네요. 나는 담배를 사러 밖으로 나왔다. 꽤 추운 날이었던 것 같다.
나는 가게 아래의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서 올라왔다. 담배곽을 열고, 담배를 한 대 입에 물고, 불을 붙여서 한 모금 빨고, 누나에게 건넸다. '누나, 그거 알아요? 담배는 두 보금 째가 제일 맛있데요.' 그리고 담배곽을 그에게 내밀었다. 전직 학생운동가이자, 현직 재즈 애호가이자, 손금 전문가께서는 나를 죽일 듯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에이, 그러게 왜 감히 바텐더를 바 바깥으로 끌어내서 담배를 사오라 마라야 미친놈아. 나는 애써 그의 시선을 회피한 채, 누님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곧, 가게를 닫을 시간이 되었다. 누님들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고, 남자는 허탈한 표정으로 남았다. 나는 '에이, 뭐 이런 날도 있는 거죠. 다음에는 좋은 일도 있겠죠' 하고 넉살좋게 인사하고 가게를 정리하고 사장과 술을 마셨다. 꽤 추운 날씨였지만, 내 마음은 여름처럼 충만했다. 아아, 오늘과는 달리 즐겁고 충만했던 어느 겨울밤이여. 추억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