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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12/27 14:24:20
Name *alchemist*
Subject [일반] Walking in our own world


우리는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어째서 그렇게 걸었는지 그 이유는 누구도 모른다. 그저 걸었을 뿐이다. 마치 걷지 못해서 병이 난 사람 마냥 우리는 양재천을 걷고 또 걸었다.

걷는 동안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보두의 재즈 곡에 관한 이야기, 루시드 폴의 부드러운 노래와 앨범에 관한 이야기, 오지은을 알고 있는 남자 혹은 여자를 알게 되어서 신기하다는 이야기, 그녀 만의 숨겨진 비밀 장소에 관한 이야기, 앞으로 어떤 걸 보러 갈까 하는 이야기, 나중에 그림 을 그리고 사진을 더 찍는 것에 관한 이야기, 아까 찍었던 잘 나왔던 사진들에 대한 이야기, 우리는 왜 이렇게 수다를 많이 떨 수 있는 것이고, 그렇게 수다를 떨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할 이야기가 많은 지 신기하다는 이야기, 나의 살아왔던, 그리고 있었던 이야기, 그녀의 살아온 이야기, 나의 연애담, 그녀의 연애담, 나의 예전 여자친구 이야기, 그녀의 예전 남자 친구 이야기.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옆에 양재천을 두고 우리는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달은 눈썹달이다. 우리가 걷고 있던 최근에는 항상 눈썹달이 떠 있었다. 우리 둘은 눈썹달을 볼때마다 '저 얄쌍한 라인은 언제나 예쁘구나.' 라는 생각을 하였다. 저 달을 사진에 담고 싶었지만, 주변 배경이 예쁘지가 않다. 괴괴하게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 높은 탑들 옆에 갸날프게 걸려있는 눈썹달은 더욱 더 갸냘프게 느껴진다. 달이 잠시 모습을 보였다가 순식간에 구름 사이로 사라진다. 삼각대를 펼려다가 어쩔 수 없이 접어들었다. 이래서는 찍고 싶었던 달을 찍을 수가 없다. 계속 걸으면서 이야기하는 수 밖에는.

걸으면서 우리는 음악을 들었다. 내 친구가 작곡한 곡들, 루시드 폴의 노래들, 누보두의 부드러운 재즈곡들. 누보두의 는 나도 그녀도 마음에 들어하는 곡이 되었다. 몇 시간을 음악을 들었는지 모르겠다. 귀가 아플 정도로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무엇이든지 음표는 계속해서 나의 귓가를 맴돌았다. 그것과는 관계없이 주위에 사람들이 운동을 하거나 산책을 다니고 있었지만, 서로 각각 이어폰을 한 셋트씩 귀에 끼고 있는 우리에게 그들은 단지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징검다리를 건넜다. 음악을 듣고 있기는 하지만 주변 상황을 아예 간과할 수는 없는데다, 오래 들을 작정이었기 때문에, 또한 주위가 고요했기 때문에 우리는 볼륨을 낮춘 채 음악을 듣고 있었다. 나의 주머니에 아이팟이 있었다. 징검다리의 돌들은 서로 떨어져 있다. 윗판이 편편해서 떨어질 염려는 없지만 따로 건너면 한 명이 물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나는 그녀와 함께 발을 맞추어 걸었다. 혹시나 보조를 못 맞출까봐 나는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처음 건널때는 영 발이 안 맞고, 내가 물에 빠질듯이 비틀 거린 적도 있었지만, 두어번 건너다 보니 쉽게 건널 수 있게 되었다. 무언가 우리는 항상 같이 하는 것에 빨리 적응을 하는 것 같다. 신기하다. 마치 서로를 말을 하지 않고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서로 간에 빨리 적응하고 있다. 무언가 신기하게도 똑같을 수 있고, 신기하게도 잘 들어맞을 수도 있고, 신기하게도 비슷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내심 신기할 따름이다.

물이 흐르고 있다. 달은 구름 사이로 보이다 말다 한다. 사람들이 주위를 걸어간다. 가끔은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같은 음악을 듣고 있다. 그리고 같은 우리만의 세상에서 걸어가고 있다. 그렇게 많이 걸었음에도 우리는 우리만의 세상에서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침에 분명 그녀는 exit interview를 치루었고, 나와 함께 미술전에 다녀왔다. 우리는 미술전에서 그 많은미술품들을 도슨트와 함께 한 번, 그리고 우리끼리 또 다시 한 번 보았다. 하지만 그 일은 며칠 전의 일처럼 느껴진다. 아까했던 일들은 지금 양재천에서 걷고 있는 우리와는 너무나도 먼, 너무나도 오래전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이곳에서 걷고 있는우리에게 그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단지 우리에게는 이곳에서 걸으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만이 제일 중요한 일인 것 같다.예전에 다친 발목이 욱신거릴 정도로 오래 걷고 걷고 또 걸었지만 그래도 모자라는 것 같다. 우리가 더 이상 걷지 못하는 것은몸이 지쳐서 쉬는 것이지, 단지 마음이 그렇게 시켜서 그러는 것은 절대 아니다.우리는 걷고 싶고, 또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어째서일까.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일까. 왜 우리는 이렇게 걷는 것과 대화를 하는 것에 탐닉 하고 있는 것일까. 분명 서로간에 이렇게나 잘 이해해주고, 잘 알아주는 사람을 만난 것이 신기하고 그만큼 서로간에 잘 맞아서이긴 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만 있는 것일까. 과연 그런 것일까. 자주 만나고 자주 이야기 하고 자주 같이 다니게 되고 자주 보게 되었지만, 볼때마다 신기하기만 하고,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서로간의 대화에 탐닉하고, 서로를 알아 가는 것에 대해 서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것을 겪어왔는지에 대해 알려주고 싶어했다. 그렇게 우리는 대화를 계속하였다.

우리는 우리만의 세상에서 걸으면서 대화를 계속하였다. 마치 배낭여행자들처럼.
어쩌면 우리는 도시의 여행자가 되기를 꿈꾼 것인지도 모르겠다. 도시에서 살고 도시를 걸어다니지만, 언제나 어디든지 갈 준비가 되어 있는 도시의 여행자들. 하염없이 걷기를 즐기고, 하염없이 이야기를 하는 것을 즐기는 여행자.

그렇게 우리는 우리만의 세계를, 도시를, 거리를, 냇가를 걷고 또 걸어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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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반 쯤 전에 헤어진 전 여친의 제안으로 시작한 둘이서 공동 집필하던 블로그에 올렸던 글입니다.
(헤어졌으니 이 글은 해로운 글이다. 아닙니다. 흐하하)

지금 직장에서 찌들-_-어서 살다보니 감성이고 나발이고 전혀 느낄 수 없는 그런 삶 속에서도
가끔씩 예전 글 읽어보게 되면 예전의 나는 어떤 감정을 느꼈고 어떤 감성으로 살았고 어떤 식으로 그런걸 글이나 사진으로 표현했나 같은 것들이 기억이 나게 되더군요

게다가 글을 항상 중언부언에 만연체로 길게 써서 제가 다시 봐도 무슨 말인지 모르게 쓰는 경향이 짙은 저에게
나름 간결하면서도 깔끔하게 당시의 감정이 솔직하게 잘 담겨 있는 제 개인적으로는 다시 쓰라면 못 쓸 명문(?!?!?)이기도 합니다.
(네. 맞습니다. 나름 자랑입니다 ^^;)

요새는 글 쓰는 솜씨 이전에
글감도 안 떠오르는데다 감성 따위 메말라 버려 이런 글 다시는 못 쓰고 있기는 합니다만..
사랑을 다시 하게 되면 쓸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렇네요

'앓아누워' 님의 <넌 여전히 예쁘구나> 글을 보니 급 생각나서..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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