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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3/10 21:53
사실, 북한에서 핵을 쏜다고 지금 결정했더라도 내일(월요일) 아침 주간회의 때 팀장에게 할 말이 없다는 게 직장인의 더 큰 걱정이겠지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13/03/10 21:56
윤태호님의 코멘트입니다.
원고하다 발견한 글. 마무리가 안된 작품에 이런저런 단정으로 묘사하는 것. 만화 내용 중 회사 체제에 대한 비판과 업무 관련 묘사글이 뒤섞여 이 글에 동원된다는 점. 김대리가 말한 '성공이 아니라 하나하나 문을 열며 살아가는 것'이란 표현은 무시되고 영업3팀은 성과주의자, 일중독자로 묘사된다는 점. 회사'일'이 주 소재인 만화에서 왜 '일'만 하냐고 묻는다는 점.... 등등만 뺀다면 읽어 볼만한 글이다.
13/03/10 22:01
윤태호 교수님께서 만화과쪽에서 상당히 명망있으시다고 들었는데...
이런 코멘트라니 솔직히 윤태호 교수님 본인코멘트가 맞나 싶습니다... 굉장히 실망스럽네요.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그리는 와중에서 받아들이는 독자는 자신이 살아온 배경과 사상에 따라서 한 캐릭터를 여러방향으로 해석하기 마련인데, 정작 작가로서의 본인은 캐릭터를 단면적이지 않게 그림으로서 큰 호평을 얻고 있으시면서 칼럼화 하는 과정에서의 캐릭터의 해석을 마치 왜곡을 했다는 것 처럼 표현하다니.. 저도 미생 3번은 읽었는데 칼럼에서 그럴 법 하다고 느꼈습니다. 확실히 컨텐츠를 만들어내는 만화적 능력과 이런 부분은 완전히 별개의 부분이네요.
13/03/10 22:09
다른 코멘트도 덧붙입니다
윤태호 제게도 최근 이야기 진행에 환기가 되는 글이었습니다. 이 기사는 기자가 '강수돌 교수 인터뷰 내용을 녹여내서 만화비평으로 풀어봤습니다.'라고 하네요. 곽백수 (가우스전자 작가)직장만화는 그리면 그릴 수록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죠. 그런데 작가가 허무주의에 빠지면 직장만화는 끝장이죠. 그래서 이미 수천번을 글쓴분이 지적한 부분에 대해 고민을 반복했다는 걸 글 쓰신분이 알 수는 없겠죠. 그런 건 안그리니까.
13/03/10 22:16
그런걸 안 그리는건 작가적 역량으로서 '그런걸 그려봐야 내가 원하는 직장만화로서는 필요없는 이야기'니까 당연히 안 그리게 되는거죠. 정치적인 색이 너무 뚜렷해지기도 하고, 근데 그것과는 완전히 별개인거죠. 내가 '그정도 고민'을 안하고 이걸 그렸을것 같냐? 라는 반응인데, 정작 칼럼은 미생의 윤태호작가님보고 '시대정신을가져라'같은 비판이아니라, 만화 내의 장그래와 주요 인물들이 가지고있는 단면성들을 만화내에서 이끌어 내서 쓴 거거든요. 근데 그 칼럼에 대해 윤태호 작가님이 이렇게 반응하는것 자체가 참 황당한거죠. 재밌고, 원하는 이야기를 위해서 자신의 고민을 몇 가지 포기하며 낸 작품에 대해 그걸 읽고 이해하며, 평가하거나 하는 행위들이 윤태호 작가님의 그런 보이지 않는 고민까지 전부 물어보며 쓸 수도 없는일이고,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는거니까요. 작가님이야 자신이 만든 캐릭터들이 워낙 복잡하고 다면적이며, 이 칼럼에 쓴 것처럼 '그런인물인 것 만은 아니다'라고 이야기하지만, 그건 작가님 스스로가 만든 캐릭터기에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거고 독자는 그 인물을 보면서 이런 인물상일 것이다 하고 이해하는건 별개의 문제가 되는거죠. 문학에서도 이런부분은 여전히 작품해석에 있어서 어떻게 해야하는가의 논란으로 남아있는 부분이구요. 윤태호 작가님이 미생으로서 작품을 밖에 내놓는 순간 그 해석은 작품내에서 보이는 여러가지 대사, 상황, 역할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될텐데 그것에 대해서 마치 '당신 만화 잘못 읽었어 왜곡하지마'처럼 나타내는 코멘트는 여전히 제게는 실망스러운 부분입니다. 말씀 그대로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는 회사 시스템의 정치적 부분들'을 배제했지만, 읽는 사람은 그런걸 여전히 느끼고 있으니까요.
13/03/10 22:16
<피로사회>가 생각나는 글이네요.
"사교육? 하지 말아야지. 우리 애만 빼고."처럼, 저 문제는 자본주의 자체가 뒤집히지 않는 한에는 바뀌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게으른 시간에 이루어지는 내면의 사유가 창조적 일의 근원 힘이라고 생각하기에 저 문제는 매우 심각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보지만, 그마저도 노동으로 치환하여 압박하고 결과물이 나오지 않으면 바로 잘라버리는 시스템으로 치환된 지 오래라... par333k님께서 '전쟁'이라고 표현하신 점이, 제게는 '본인이 원하면 싸우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살아남기 위해서는 싸워야 하는'으로 읽히네요. 더 씁쓸합니다. 그래도, 일단은 뛰어야겠죠.
13/03/10 22:22
작가님 입장에서 보면 기자가 캐릭터를 곡해하고있다고 느낄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par333k님의 말씀처럼 작가는 입체적인 캐릭터를 표현하려 애썼음에도 기자가 쓴 '평면적 웹툰'이라는 단어를 보게되면 속이 상할수밖에.. 칼럼을 보면서 중간부 이후로 이 기자는 웹툰을 보고 글을 쓴 것일까, 아님 강수돌 교수의 말을 옮기기 위해 미생을 이용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많이 들더군요. 각각의 사건들마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 있을텐데, 전개-위기 사이의 한컷만 가지고 와서 인용해버리면 당연히 문제로 보일수밖에요..
13/03/10 22:29
제 관점은 그렇습니다. 작가가 내놓는 작품은 자신이 원하는 혹은 표현하고자 한 의도대로 전부 해석되지는 않는다고.. 때때로 그런것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이용될수도, 혹은 발췌될수도 있다고 봅니다. (흔히 에반게리온으로 내는 각종 사회학 레포트들처럼) 위에서 허무주의 이야기를 이어서하자면, 발췌를 하는 입장에서 당연히 '다면적으로 훌륭하게 만들어진 캐릭터'의 특성을 칼럼,혹은 레포트나 기사 등등에 맞춰 발췌 자료로 쓰면서 그걸 전부 다 고려하면 '허무주의'마냥 쓰는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냥 사람인걸요. 어디에나있는. 다만 캐릭터가 맡은 역할, 특색,성향을 자기가 어떻게 해석해서 더 강한쪽을 고려해보는가의 차이라고 보거든요. 저는 이런부분에 있어서 작가가 이런 해석에 대해 왈가왈부할수록 썩 좋은 방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곧 작품 자체에서 보여주는 다양한 해석과 캐릭터에대한 입체성을 떨어뜨린다고도 생각하고, 작가가 작품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이야기 하는 것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때문입니다.
저 칼럼이 정말 의도적으로 미생을 폄하하기위해서 썼다면야 윤태호 작가님의 반응이 십분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저 칼럼은 정작 미생이 포인트가아닌, 미생이 보여주는 많은 공감을 얻는 현대사회 회사와 노동자의 자화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요. 그런부분마저 '내 의도와 다르고 내가 만든걸 전부 담지 않았으니'라고 반응한다면 미생으로는 아무 이야기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작권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런부분이 싫다면 미생을 어떠한 방식으로도 재차 인용하거나 발췌하는것을 금한다는 공표를 하는편이 낫겠지 싶습니다.
13/03/10 22:44
해석의 문제는 저도 물론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도 그림그리는 입장에서 내가 그린 그림이 언제나 내 의도대로만 판단된다면 얼마나 재미없는 그림이 되는지 아니까요. 다만 이 칼럼의 경우는 미생에 대한 분석이나 판단보다는 기자(와 교수)가 얘기하고자 하는 쪽으로 끌고가려는 도구로 사용된 부분이 있기때문에 작가님도 저런 코멘트를 단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용된 부분또한 극의 흐름상 갈등이 필요한 부분을 가져다 쓰며 이것이 미생이다. 인양 보여주었으니 말이죠. 이런식의 칼럼은 내면 안된다. 라는 강한 비판의 목소리가 아니고, SNS에 작가로써의 약간의 서운함 정도의 표현 아닐까요
13/03/10 22:59
저도 좀 성급하게 윤태호작가님에 대해 판단을 '건방지게'내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뉘앙스를 모르다보니 약간 그렇게 나간것 같습니다.
예전에 학보사에서 윤태호작가님 인터뷰를 따려고 했는데 안해줬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저도 모르게 약간 권위적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죄송한 일입니다.
13/03/10 22:37
성과사회의 폐단에 대해서는 동의는 하는데....그것이 과연 '자본주의 체제'만의 문제인가는 조금 더 따져봐야 한다고 봅니다.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라고 '성과사회'의 단면이 없었을까요? 능력위주의 사회일수록 우리가 점점 더 '성과사회'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라면 고려시대에 사람들이 신라시대 사람들보다 피로한 삶을, 조선시대 사람들이 고려시대 사람들보다 피로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겠죠.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개념일 뿐 그것이 곧 '현대사회만의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게 자본주의 이후의 삶을 꿈꾸는 사람들의 특징은 막연한 과거, 그리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미래 사회가 '성과사회'와는 무관할 것이라 착각하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나라가 필요 이상으로 '성과위주'의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는 데에는 동의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불가피'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구요. 또, 복지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자본주의의 체제의 우월성을 보장해주는 가장 결정적인 제도인데 이것을 '현실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싶네요.
13/03/10 22:51
저는 첫 단락에 대해서 반박하고 싶은것이, 과거에는 '시민사회'가 아니었기에 엄밀히 말하자면 성과사회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의 경쟁이란 처음부터 정해진 부분이었고, 신분이 그 위에 존재했습니다. 경쟁을 위한 노동이 아니라, '역할이 정해진' 노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갖는 부작용과 과거의 피로한 삶과는 연관을 지을래야 지을수가 없습니다. 그 당시가 '시장경제'의 개념을 갖고 인류가 살아왔다고 해서 그게 자본주의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과사회가 부작용으로서 이야기되는것은 시민사회가 되고 상공업자의 권리가 증진되며 신분제철폐가 이뤄진 다음입니다. 즉, 신분 대신에 생산수단의 소유자가 또 다른 갑으로 둔갑하고, 이러한 생산수단 소유에 필요한 것이 곧 자본이었으며 이런 자본은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람을 부려먹기시작하게 된 것이지요. 이러한 자본주의태동의 역사가 제국주의시대를 거치며 시민사회의 발전에 따라 '공리에 따른 합의'를 지속적으로 거치며 점점 자본주의는 현대화 되어갔습니다. 즉, 신분제의 폐단을 생산수단의 소유자인 자본가가 이어받는 수준의 자본사회에서 시대를 따라 자본주의가 발전하며 점점 노동자의 입장이 바뀌어왔죠. 발전하는 동안 많은 노동자들은 과거보다 훨씬 나은 대우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서 이러한 자본주의가 삐걱대는 이유는, 과거의 호황을 지나 계속된 이윤율 담보를 위해서는 효율에 대한 임계점이 계속 높아져야하는데, 노동자의 삶의 권리들이 이부분에서 역행하기 시작해서 그렇습니다. 예전에는 기술의 발전과 중공업, 자원의 힘으로 노동자의 권리를 지속적으로 높여주고 시민사회에 있어서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해 계속된 발전적인 정책을 펼쳐도 그만큼의 이윤율을 담보로 할 수 있었다면, 지금은 노동자의 삶을 과도한 성과주의로 억압하고 이러한 것에 있어서 노동자가 내성을 갖기위해 많은 문화적 내면화를 시도함으로서 과거만큼 폭발적이지 않은 이윤율을 담보하려 하기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죠.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계속된 이윤율의 증가를 필요로 하는 체제니까요. 자본에서 나오는 노동과 임금의 관계가 바로 그 이윤율에 있기도 하고요. 자본주의와 성과사회는 깊은 관계를 맺고 있지만 그것이 과거의 시장개념의 사회나 자본주의 자체로만은 볼 수 없는 것이라는걸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13/03/10 23:43
한마디로 과거에는 노동자들이 가지고 있는 효율적인 능력 향상의 수단인 '경쟁'을 '신분'이라는 이름으로 억압했다는 것이죠. 신분제의 철폐로 인해 그 형태가 '자본가' vs '노동자'의 형태로 변환된 것에 불과하구요. 한마디로 '성과사회'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다른 방법이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다만 '강요'하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요.
여담입니다만 과거 사회라고 경쟁이 없었을까요? 붕당체제만 하더라도 미칠듯한 '경쟁체제'가 아니었을지...... 또한 영토확장을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치뤄야했던 사람들도 역시 미칠듯한 경쟁의 피해자들 아닌가요? 왕의 경우는 어찌보면 '성과사회'의 한 면모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구요. 갑자기 과거에 존재했던 '성과사회'를 조사해보고 싶은 욕구가 올라오네요. 흐흐...
13/03/11 09:35
과거의 경쟁이 수탈자들이 더 많은 수탈을 위해 경쟁한 것이라면 현대를 성과사회라 규정하는 것은 피수탈자들이 스스로 수탈당하기 위해 경쟁하기 때문이죠.
13/03/11 11:26
과거의 사회에서도 피수탈자들이 스스로 수탈 당하기 위해 과거시험을 준비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자본가들이 더 많은 수탈을 위해
경쟁을 하고 있구요. 과거, 현재의 대립항으로 볼 문제가 아니라 상당히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13/03/10 22:38
저는 이러한 문제를 '자본주의'만의 문제로 국한시켜서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노동에 인생의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입하면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먼 미래에 인간의 노동을 완벽히 대체할 수 있는 로봇이 등장해 인간이 전혀 노동하지 않고 살 수 있게 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노동을 할 수 밖에 없고 그 노동은 인생의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노동을 하는 목적이 가족(또는 사랑하는 사람)이니 만큼, 비슷한 정도로 가족에 시간을 쓴다고 할 수 있지만, 적어도 남자인 제 입장에서 느끼기에는 노동(가족을 먹여살리는 일)에 들어가는 시간이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보다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결국 인생의 의미는 상당부분을 노동에서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노동이 내 삶을 규정하지 않는다고 보는게 더 이상합니다. 이는 단순히 자본주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류가 단 한 번도 풀어본 적이 없는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문제입니다. 노동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시간을 차지하고 있는데 어떻게 노동에서 자유롭게 삶을 규정할 수 있을까요. 이 문제에 답이 있을 수가 없지요. 노동을 삶에서 뺄 수가 없는걸요.
13/03/10 22:42
로봇으로 대체된다 한들, 노동이 사라질까 싶습니다. 좀 더 편한, 다른 방식의 노동을 하고 있겠죠. 따지고 보면 가족과의 시간, 친구와의 대화 등의
인간적인 삶의 방식 역시도 '노동의 하나'가 아닌가요? 그만큼 타자에 대한 인정과 배려, 이해를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 하니까요. 노동 자체를 문제시하는 게 문제라고 봅니다.
13/03/10 22:44
자본주의에서 말하는 노동은 그보다 훨씬 더 집약된 의미의 노동입니다. 포괄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냥 역사적으로 이어져 온 노동활동의 그 노동이 아니라, 자본가가 갖는 생산수단에 있어서 그 생산수단을 이용하여 '생산성'을 계속해서 증진시켜야하는 '잉여재화'에 대한 노동활동을 한정짓는다고 알고있습니다.
13/03/10 22:50
음.. 그럼 궁금한게 하나 더 생기는데요,
잉여 재화에 대한 노동활동은 일반적으로 고대 농경사회가 시작되면서 부터 (수렵 사회가 끝나는 시점부터) 발생했다고 보는게 일반적인데 (토기의 탄생을 잉여 생산의 보관을 위한 수단을 찾는 과정의 결과물로 보지요, 보통은) 자본주의 잉여재화에 대한 노동활동과 그 이전의 잉여재화에 대한 노동활동이 다르게 구분지어질 수 있는 기준이 뭘까요?
13/03/10 22:54
저도 지식이 미천하지만
과거에는 잉여생산물을 노동자가 노동한 만큼 생산해 내서 노동자의 소유가 되었다면 자본주의는 잉여생산물을 '자본가가 소유한 생산수단'을 통해 더 많은 잉여생산물을 취득하면서 그 잉여생산행위의 권리를 자본가가 갖고있는것을 뜻합니다. 즉, 노동자는 과거에는 100의 노동을 해서 100을 얻었다면, 지금은 자본가의 생산수단없이는 그정도의 잉여생산력을 담보받을 수 없으므로 '100의 노동을 주고 120의 잉여생산물을 만들어서 그 잉여생산물의 많은 부분(혹은 자본가에 따라서는 적은부분)을 자본가에게 생산수단이용의 댓가로 주는 것'이 과거의 노동생산과 자본주의하의 생산차이라고 알고있습니다.
13/03/10 22:53
자본주의 이전에도 생산수단이 있지 않았나요? 비슷한 예로 농작물의 수확량을 감시하는 관리들과 그들이 부리는 노예들이라든지....
원시시대만 해도 철기문화의 발달로 급격하게 '성과사회'로 이행했다고 봐도 되지 않나요?
13/03/10 22:58
생산수단과 관리/노예의 비유는 제가 잘 이해가 되지 않네요 죄송합니다.
철기문화의 발달로 급격하게 성과사회가 되었다는 부분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부분을 잘 몰라서요.. 다만 자본주의 이후의 생산수단이란 기존의 자연적 생산수단과는 다른, 사적 소유의 '거대한 효율을 갖는' 생산수단이었습니다. 공장을 떠올리면 편한데, 내가 가내수공업으로 100을 만들수있는데 자본가의 생산수단을 빌리면 1000을 만들수 있는것이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노동자는 생산수단에 귀속되고, 그러다보니 자본가는 역설적으로 생산수단을 가짐으로서 노동자에게 있어서 갑의 위치를 차지하게되며, 더 이상 시장에서는 노동자가 스스로 살아남을 수 없게 됨으로서 자본가가 원하는 대로밖에 할 수 없는 비대칭적 상황이 되게 됩니다. 이 상황에서 과다하게 나온 잉여생산물은 어딘가에서 해결이 되었어야하고 그러다보니 식민지를 찾고 또 찾게되는 제국주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때 과거의 생산수단과 자본주의 태동의 생산수단의 개념은 '기존 시장질서에 대한 파괴력의 차이'가 크다고 봅니다.
13/03/10 22:49
제가 매우 좋아하는 두 분이 관련되어 있어서 관심이 쏠립니다.
제 생각은 이정환 님의 글은 소감문이나 비평으로써는 성급하다는 생각입니다. 이정환 님도 마지막에 밝혔듯이 '미생'은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점'이 장점인 작품입니다. 이런 리얼리즘은 그것을 통해 현실을 고발하는 성격이 강한데, 윤태호 님의 말처럼 마무리가 안된 작품에 대해 단정적으로 말하는 부분들이 윤태호 님의 의도나 독자의 반응을 잘못 판단하고 있지 않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이론에 작품을 끼워 맞춘 느낌 마저도 듭니다. 이와는 별개로 배울 게 많습니다.
13/03/10 23:18
근데 그 피로사회에서 과거의 사회를 규율사회라 명명하며 '하지마라'의 시대라고 하고, 현대사회를 성과사회라고 명명하며 '하라'고 명령하는
시대라 하던데....글쎄요? 과거의 시대라고 '하라'는 식의 성과를 강요하지 않았을리 없고 현대사회라고 해서 '하지마라'는 규율사회가 없다고 할 수 없을텐데 그렇게 이분화될 수 있는 개념인가 싶네요. 그리고 그에 대한 대안이 '깊은 심심함을 가지는 것'이라고..... 매우 맞는 말씀이긴 한데 좀 허무하다는 느낌이.......
13/03/10 23:23
개인적으로 맑스주의 경제학 수업을 들었을 때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전율했고, 그것이 역설적으로 현재의 자본주의가 겪고 있는 문제점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전파하고 다녔지만, 결국은 무의미한 짓이었습니다.
첫번째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노동생산성에 대해 이해시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고, 두번째로는 "앞으로 자본가가 될" 사람들에 대한 충성심이 너무 강합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세뇌가 잘 되어있는 것이지요. 특히 대한민국 사회에서 노동자는 노동자를 무시합니다. 이를테면 택시기사의 집단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서울대 -> 아이비리그 출신의 법학도로 내세운다던지. 어쨋거나 저 칼럼은 꽤나 통찰력이 있네요. 윤태호님의 댓글을 보니 그런 의도로 그린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의도하지 않은 컷에서 더 잔인한 현실이 나오는 법이지요. 특히 장그래의 영업팀이 극도의 성과주의자, 일 중독자라는 것. 그건 정답입니다.
13/03/10 23:28
이런부분에 있어서 몇몇 실천적 정치경제학쪽 분들은 '역사적 좌파'라고 하여 지금은 무의미하나 자본주의의 단점과 문제점을 계속해서 설파하고 대안을 연구해야만 역사적으로 점점 자본주의해체 및 자본주의 문제에 대한 피드백이 이뤄질것이다 라고 연구하고 운동하시는 분들도 있더군요. 참..대단하고 존경스러웠습니다. 보통 용기와 끈기로는 도저히 못할 짓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세대가 아닌 다음 다다음 세대로의 역사적 흐름을 위해 삶을 바친다는게.. 그게 정답이든 아니든 그 삶의 태도가 참 감명깊더군요.
13/03/11 01:54
바둑이나 다른 스포츠의 진지한 승부가 하나의 예술이 될 수 있듯이,
자본사회에서 깊은 창조성과 통찰력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는 것 또한 하나의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미생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내면적 일치라고 부를 수 있을텐데... 칼럼은 내면적 일치가 없으면 중독자라는걸 인용하면서도 등장인물들을 일중독자라고 하네요.
13/03/11 02:46
미생 정말 재밌어요...
외람된 말이지만 안영이는 시마과장의 그 회장딸인가 그랬던 여자랑 참 닮은 것 같아요 뭔가 완벽주의자 성격도 좀 비슷하고요 흐흐
13/03/11 09:43
기본적으로 칼럼의 지적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미생의 상황은 사실적인 것 같으면서도 대단히 이상적인 직장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깊이 공감이 안됐습니다. 장그래든, 그 상사든 일중독의 양태를 보인다는 지적도 동감합니다. 윤태호 작가가 그 부분에 대해 왜 굳이 까칠하게 반응하는지 이해가 안되네요. 텍스트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록 더 좋은 거 아닌지.
13/03/11 11:30
이러한 문제의식을 부정하려는 건 아니지만, 사람의 욕망과 행복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는 의심을 거두기 힘듭니다. 결코 노동으로 인해 불행하지 않은 이들까지, 단순한 체제순응자로 만드는 것 같은.. 그런 의미에서 전 이 시스템에 잘맞는 사람 같습니다.
13/03/11 12:29
노동으로 인해 불행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사실 생존을 위한 노동이라는 것이 썩 '유쾌'하진 않으니까요.
(현대 사회는 과거와는 다르게 '가치 창출'을 위한 노동이라고들 하는데......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 지 의문이고 과거라고 '가치 창출'의 노동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다만, 말씀하신 대로 노동자들을 단순한 '체제순응자'로 만들어버리는 논지 전개가 어딘가 모르게 비약이 심하다는 느낌입니다. 제가 보기엔 성과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이들의 기본적인 논지는 한마디로 그냥 '노자사상'입니다. 무위자연으로 돌아가 자연과 함께 유유자적하며 살아가는 삶을 꿈꾸는 자들...내 마음 속의 '유토피아' 말입니다. 그렇게 현재의 '비루함'을 극복하려 하는 것이지요. 미래 사회는 오지 않았으니 내 인지가 미치지 못하고 그렇다면 막연한 과거에 나만의 '노스탤지아'를 건설해서 지금보다는 덜 피로했을 것이라 여기는 과거로 돌아가려는 사상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닥 좋아하진 않습니다.
13/03/11 17:43
노동으로 인해 불행하지 않은 사람은 꽤 많을 것 같은데요.
애시당초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부분이 노동인데 노동에서 진짜 불행함을 느낀다면 아직까지 인류가 영속하고 있을수가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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