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사는 한국 역사는 물론 전 세계에서도 비교할 수 없는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선교사가 그들에게 믿음을 준 게 아니라 그들이 믿어서 선교사를 부른 것이죠.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
+) 세례명은 빼겠습니다. 신자가 아닌 이상 큰 의미가 없을테니까요.
양지에서 유교가, 음지에서 불교가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움직임이 자발적으로 일어났다는 거니까요. 쓰레기통의 장미에 비유하기도 힘듭니다. 해방 후 대한민국이야 겉으로라도 민주주의를 내세웠지만, 이 때의 조선은 종교라면 무조건 짓밟았을 때니까요. 그런 상황에서도 믿음이 시작됐기에 한국 천주교회의 가치는 큽니다.
주문모 신부
조선 교구 1대 교구장 브리귀에르
돈이 없어서 못 간다.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는데 돈이 필요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을 것이다. 그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서도 복음을 전했는데 그를 본받아 복음을 전한다는 이들이 어떻게 돈이 없어서 무엇을 못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는가? 진짜 없는 것이 무엇인가?돈인가, 아니면 신앙인가?”
보낼 신부가 없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할 때 제자는 열두 명이었다. 지금의 사제 수가 몇 명이냐, 열두 명은 더 되지 않느냐?"
조선이라는 데가 어딘지, 어떤 나라인지 모른다.
"그들은 사제도 없는 곳에서 이미 순교를 하며 목자가 있는 곳을 찾아 그 어두운 곳에서 편지까지 보냈는데, 목자라는 사람들은 양떼의 편지를 받고도 그게 어딘지 몰라 갈 수 없다니 말이 되느냐?"
조선까지 갈 수 있을지도 모르고, 신부를 보내봐야 붙잡혀 죽을 것이다.
"사제가 양떼를 만나면 사목을 해서 좋고, 가서 죽는다면 순교자가 되는 영광을 얻는 것이다"
1825년, 정하상은 교황에게 사제를 보내달라고 청합니다. 이건 교황청을 비롯한 천주교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줬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이 컸죠. 천주교의 영역이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이미 리즈 시절이 끝났고, 프랑스 역시 혁명 기간동안 많은 사제들이 희생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세계의 다른 교구들도 신경써야 되는 상황에서 듣도 보도 못한 나라에 사제를 보내기는 힘들었죠. 이에 맞선 것이 당시 샴(태국) 교구의 바르톨로메오 브리귀에르 주교였습니다. 그는 조선에 사제를 보내기 힘들다는 주장에 위와 같은 말들로 맞섰고, 자신이 가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가 1대 교구장이 되었죠.
하지만 그는 조선까지 오지도 못 하고 죽게 됩니다. 오는 길이 너무 어려워서였죠.
그의 뒤를 이어 앵베르 주교가 2대 교구장이 돼서 옵니다.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그와 함께 온 신부들로 조선 교구는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피의 순교자" 김대건 신부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
그들의 믿음을 의심할 순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다수가 정치적인 영역으로까지 확대하지도 않았구요. 조선인 신자든 외국인 선교자든간에요. 천주교 신자 중 국가 전복을 꿈꾸지 않은 이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 말을 들은 주문모 신부는 거부했었고, 황사영 백서 사건 역시 황사영 및 주변의 인물들이 독단으로 저지른 짓이었습니다. 유럽의 역사에서 천주교가 저지른 일들은 많았지만 조선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죠. 믿음의 자유가 허용된 이후 제주도에서 일어난 일이 처음이었으니까요. 최초의 순교가 일어난 후 프랑스가 직접 개입한 건 100년 가까이 지난 후, 그나마 너무도 가혹했던 병인박해로 인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하든간에 그들의 믿음은 외세를 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댈 데가 거기밖에 없었으니까요.
천주교 이외에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는 이가 있습니다.
토마스 목사죠. 이 양반이 탔던 배가 그 유명한 제너럴 셔먼호입니다.
1866년이라는 배경에서 볼 수 있듯 그가 조선으로 온 것 역시 병인박해 때문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성서 공회 출신으로 천주교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그래도 프랑스군과 함께 박해를 막으려 했다가 실패했죠. 베트남에서 일이 일어나서 프랑스군의 출동은 병인양요 때로 미뤄졌으니까요. 그래도 조선에 선교해야겠다 싶어 상선이었던 제너럴 셔먼호에 올라탔습니다. 조선말을 어느 정도 배워서 통역을 하기도 했죠.
그의 순수함 역시 딱히 의심할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강경하게 나가는 제너럴 셔먼호의 행동을 제지하려고 했으니까요. 그들을 살리려 했던 박규수까지 사탄으로 몰아가는 식이 문제지, 그가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로 나오는 것 역시 크게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결국 종교 자체가 문제인 거죠. 그것도 외국에서 들어온 종교라는 거요. 그리고 그 때의 환경이 제국주의라는 것, 선교사들은 제국주의를 원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그들은 제국주의에 아주 잘 이용됐었죠.
아무리 냉담자라 해도 천주교 신자로서 이런 부분을 다루기는 참 힘듭니다. 외세의 침략 외에도 조선 내에서 시작된 천주교의 흐름을 설명하긴 해야 될 것 같은데, 위의 부분만 봐도 알 수 있듯 전 꽤나 좋은 쪽으로 다룰 것 같거든요. -_-a 이에 대한 조언 좀 부탁드립니다. 다뤄야 될지,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야 될지 말이죠.
뭐 하지만, 그들이 남긴 아주 중요하면서도 나쁜 유산이 있죠 -_-
크리스마스요 -_-
아니 대체 왜 고요하고 거룩해야 될 생일날에 시끌벅적한 겁니까. 홀로 태어나서 솔로로 살다 죽은 (에 뭐 마누라가 있었다는 설도 있지만 -_-;) 예수님의 생일날이 왜 커플들의 기념일이 되는 거냐구요. 이건 뭔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거 아닙니까? 성인 태어난 날이라고 커플들이 놀아야 되면 부처님 오신 날은 왜 안 그러는데요?
.그들은 이런 아주 극단적으로 너무나도 심하게 이건 무슨 말도 안 되는 부정적인 유산을 남겼고, 이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ㅠ ㅠ 근본적으로 잘못돼도 너무 잘못된 거라구요 ㅠㅠ
앞으로의 글들은 이런 분노를 담아서 쓰도록 하겠습니다. -_-
에휴...
패배하자면 죽고사느냐의 문제가 갈린 상황에서 이게 제대로 보급됐겠어요. 개화기 개신교가 본격적으로 들어오면서 됐겠죠 (...) 독립신문부터 해서 개화기 및 일제강점기 때의 상황을 보면 나름 해답이 나올 것 같습니다만 안 찾을래요 -_-
그래도 산타 클로스가 빨갛고 하얀 색의 옷을 입으면 알 수 있죠. 이것은 코카콜라의 상징, 미 자본주의의 상징입니다! -_-! 미국에서 개신교가 들어오면서 뭔가 근본적으로 달라진 거예요. 왜 이런 건 빨갱이라고 욕 안 하고 한국에 완전히 흡수됐는지 의아할 따름이라구요!
+) 사실은 아니랍니다 -_-a
아무튼...
메리 크리스마스요 ㅠ_ㅠ)...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겁니다! ... 근데 전 가족과 보내지도 못 하네요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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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보면 이해 못할 것 같은 센세이션이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납득이 가는 면도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조선의 종교가 호국정신에 윤회나 조상님등등의 신분차별적 요소(심지어 토속종교는 정성이 부족하다며 금전을 원했죠)가 있었다면 천주교는 그런거 없었거든요. 믿으면 구원받았습니다. 어떠한 노력도 없이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으니 사람의 마음에 이만큼 안정을 주는 종교가 어디있었을까요? 지금의 종교적 색채와 천주교의 역사를 비교하면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수가 없죠. 일례로 어느 조선 선교사가 쓴 유람기가 있는데 여기선 여성이 억압되고 양반은 아무것도 안하는주제에 권력만 쥐고 있는 존재로 묘사되지만 백성의 신앙은 어느나라보다 강하다는 묘사도 있죠. 좀 거부감을 일으킬 수 있는 표현이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조선에 박혀있는 천주교의 개념을 알 수 있다고 봅니다. 체제에 억압된 서민들의 몇없는 출구인거죠.
아 개인적으론 일본의 천주교가 더 이해가 안가요. 종교적 자유도 조선보단 더 보장된거같아보이는데도 어떻게 아마쿠사처럼 밀교같이 발전을 한건지-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