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중한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오랜만에 오붓한 식사를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전성기를 맞이한 50대 신여성 답게 그녀는 저녁 약속이 이미 잡혀 있었다. 상냥한 목소리로 '저녁엔 컵라면'을 속삭이는 그 따뜻함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맛있지 컵라면. 찬밥에 말아먹으면.
그러나 찬밥이 없는 관계로 배달음식을 시키기로 마음 먹었다.
온 국민의 영양식 치킨. 그래 치킨이다. 무한도전이 방영하는 날이니, 유느님이 광고하는 네네 치킨을 시키자. 배에서는 천둥이 울리지만, 귀염둥이 티모로 LOL을 하고 있으면 시간은 금방 지나갈 것이다. 양념 반 후라이드 반. 치킨의 미덕은 지난한 단일화를 이룩하지 않아도 좋다는 데 있다.
35분의 유쾌한 기다림이 지나갔다. 긴급점검 중인 LOL 화면을 망연히 바라보면서.
치킨집 배달원의 인상이 참 좋았다. 고용주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싹싹하고 성실하게 처신하는 알바생은 500만 자영업자의 보배다.
식지 않아 따끈따끈한 치킨의 온기를 느끼면서 황홀한 마음으로 뚜껑을 열자 고소한 튀김 냄새가 방에 번졌다. 친숙한 갈색의 프라이드가 나를 반겨주었다. 절반의 갈색. 그리고 나머지 절반의 빠알간...갈색.
프라이드는 혼자 몸이었다. 외톨이었다. 치킨은 침묵의 단일화를 이룬 것이다. 나의 동의도 없이. 작은 용기 안의 우아한 개인생활 , 그렇게도 탐이 났더냐, 기름진 자여. 당황스러운 마음에 손이 떨렸다. 네네치킨의 반반이란 혹여 매운프라이드와 그냥프라이드의 반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어 검색도 해보았다. 누군가의 블로그에는 빛나는 은박지로 나뉘어 다소곳히 몸을 맞대고 있는 양념과 프라이드가 보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급작스러운 사태 변화를 예견하지 못한듯 이윽고 주인장의 목소리도 떨리기 시작했다. 거듭되는 사과와 함께 양념을 다시 무쳐 보내리라 다짐을 주었다. 바빠서 실수를 한 모양이었다. 나는 너그러운 마음이 되어 기다리겠노라 이야기 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5분. 익숙한 목소리가 다시 나를 찾았다. 주말 저녁이라 바쁠텐데 이리도 수습이 빠르다니, 주인장 재간도 좋으시지. 반품해야할 프라이드를 들고 부리나케 뛰어나가자 아까 그 배달원이 돌아와 있었다. 서글서글했던 그의 낯빛이 좋지 못했다.
"이걸로...찍어드시라던데요."
그의 손에는 치킨이 없었다. 그저 투명한 일회용 비닐 봉투에 양념 한 주걱이 덜렁 들어있었다. 나는 멍청이가 된 기분으로 그 봉지를 받아쥐고 반대 손에 품은 프라이드치킨을 보았다가 배달원 친구 얼굴을 또 바라보았다. 내 가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으나 어린 배달원의 얼굴도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오늘 날이 많이 추웠지. 나는 허허 웃으며 빨간 양념봉지를 가슴 한 켠에 덜컥 내려놓았다. 배달원은 자기 잘못인냥 몇 번이고 사과를 하더니 다음에 꼭 1.5 리터 콜라를 챙겨드리겠노라 말하며 떠나갔다. 작은 스쿠터로 털털털 찬바람을 헤치며.
할 말을 못한 듯, 할 일이 있는 듯 방 한켠의 전화기가 덩그러니 눈에 띄었으나 나는 치킨집에 다시 전화를 걸지 않았다. 프라이드보다 반반이 천 원 더 비싼데. 이미 식어버린 프라이드에 차가운 양념을 부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닭다리를 맛없게 씹으면서 물끄러미 고개를 내리자니 치킨 용기 뚜껑에 웃고 있는 유재석의 얼굴이 들어왔다. 문득 잊고 있던 사실 한가지. 난 원래 무한도전 싫어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