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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11/09 00:27:34
Name Animako
Subject [일반] 자식농사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험이 끝났습니다

수십만가지의 성취감과 안도감,행운과 요행,불행과 억울함이 뒤범벅된 밤입니다

아직 이십대인 저에게 자식은 없지만 제법 터울이 긴 여동생이 오늘 수능을 치루었습니다


평소 수능성적과 대학입시가 인생의 모든것이 아님을 역설하고,실천중에있는

저였지만, 일하는 중간중간 까닭없이 가슴이 두근거리고,나도모르게 시계를 자꾸 쳐다봤던걸

기억하며, 제 마음의 일부는 여동생과 함께 시험장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노력과 간절함이 모든이들에게 자애로움으로 돌아온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제 여동생은 모의고사에서 단한번도 맞아본적이 없는 최저의 등급을 기록합니다


남편과 사별하고 의류매장에서 숱한 먼지를 마셔가며 , 때로는 지하창고에서 반품의류를 박스에

재포장하는 소위 "까대기"에 힘겨워 하면서도, 변변치못한 아들이 주는 변변치못한 생활비로는 학원

을 보낼수없어 일을 그만두지못한, 세상에서 가장 전형적이면서도 가장 헌신적인 어머니가 가엾습니다

자식을 위한 헌신과 사랑,애정만으로 자식이 결정되지는 않습니다

최선을 다해 보살폈다고 해도,결과가 최선이 아닐때가 나타납니다

정성껏 씨앗에 물을주고 밭을갈고,밤낮으로 보살펴도 태풍한번에 모든것이 날아갈수 있는 그것처럼,

아무리 사랑을 품고 열심히 임해도 제뜻대로 안된다는 공통분모가있어 자식농사라는 말이 나왔나봅니다


터울이 큰 터라 여동생은 제게도 더욱 특별했습니다

어렸을때부터 부모님이 장사를 하셔서,갓난아기시절부터 가끔씩 귀저귀를 갈아주고,중학교를

귀가하면 유치원에서데려와 슈퍼에들려 외상으로 과자를 손에쥐어주고,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물으면 오빠가 좋다고 대답하던 여동생이었습니다

바로 어제밤도 독서실에서 차로데리러왔고,오늘아침에도 차로 시험장에 데려다놓고선

출근을 했습니다

평소보다 잘보라는 기대도없이,자기성적만 내기를 바랬던 저에게 이런 결과는 너무 속이 상합니다

하지만 제가 여동생에게 쏟았던 노력은 어머니의 그것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것 없습니다

그러니 어머니의 속상함은 얼마나 크실까요


한번의 크나큰 상심후에 어머니는 설거지를 하십니다

여동생은 방에서 훌쩍이고 있습니다

그릇이 덜그럭 거리는 소리가 오늘따라 너무 슬프게 들립니다

서로 부딪치고 긁어내는것이 어머니의 마음인양 안쓰럽습니다


언제나 집에오면 롤을 두세판 하고 자던 저였지만

마음이 너무 안좋아 일찍 자려고 누웠는데 도통 잠이 안옵니다

이렇게 피지알에 글이라도 쓰면 나아질까 싶어 휴대폰으로 끄적거립니다



이제 잠이 들고 나면

뒤범벅된 수십만의 기분들이 차분히 가라앉아

원래의 제자리로 돌아가길 희망합니다

그리고 저도 원래대로 돌아와,장난 잘치고 사소한걸로 깔깔대며웃는

이제까지의 오빠로 나타나 다음 장을 응원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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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actice
12/11/09 00:37
수정 아이콘
정말 멋진 오빠이시고 훌륭한 어머님이시네요. 여동생 분도 분명히 가족 분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노력에 노력을 기울였을 거예요. 매사에 열심인 사람들은 언제가 되더라도, 꼭 그게 지금 당장이 아니더라도 결국은 보답을 받는 법이라고 들었습니다. 부디 그 날이 Animako님의 가족 여러분께 일찍 찾아오길 빕니다.
홍삼먹는남자
12/11/09 00:47
수정 아이콘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은 지혜가 아니니라. 제가 요즘 화두로 삼고 있는 절입니다. 지나간 일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마지막 하신 말 처럼 다음 장을 응원하세요. 지금도 충분히 멋진 오빠이십니다. [m]
감모여재
12/11/09 01:09
수정 아이콘
멋진 오빠, 훌륭한 어머님, 아름다운 동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살다보니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정말 맞는 말이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미 수능은 끝났지만 이 위기를 계기로 더 좋은 일이 생길수도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제가 뭐라도 작은 힘이라도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함께 응원드릴게요!
다음닉변경전까지취직
12/11/09 10:28
수정 아이콘
물론 수능 잘치고 명문대가서 잘된 케이스도 있지만, 서울대, 연고대 간 제 친구들 중에 20~30%정도는 아직도 고시공부를 하고 있거나, 고시 공부하다가 7급, 9급으로 낮춰서 공부하거나 합격해서 다니고 있는 애들이 많습니다. 근데 오히려 그 친구들보다 수능 못 친 친구들 중에서는 대학가서 열심히 해서 대기업에 가거나 공무원이 되거나 잘된 케이스들도 많구요. 진짜 이름없는 대학을 나와서 지방에서 작은 사업을 혼자 시작해서 성공한 친구도 있습니다.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성공하는데 더 좋은 가능성을 주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최근에 많이 느낍니다.

이렇게 좋은 가족이 있으니 여동생은 금방 힘을 찾을 것입니다. 수능 점수는 마음먹으면 또 쳐서 올릴 수 있고, 아니면 이후에 대학가서 열심히해서 자신의 가치는 충분히 높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가족은 아무나 만나기 힘들죠. 화이팅입니다.
12/11/09 11:21
수정 아이콘
사실 어제밤은 제 동생을 위한 글을 쓰면서도, 제가 위로받고자 한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멘탈을 회복중입니다, 이번주말에는 외식이라도 해야겠네요

따듯한 댓글들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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