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건적의 난은 우리가 생각하기엔 황색 수건 쓴 애들의 반란이라고 생각하고있죠. 그러나 이것은 엄연한 역성혁명을 위한 봉기였습니다. 황건당의 주역인 장각은 난을 일으키기 전에 이렇게 말했죠.
蒼天己死 黃天當立 歲在甲子 天下大吉
창천이사 황천당립 세제갑자 천하대길
창천(후한)이 죽고 황천(황건)이 일어나니 갑자년에 천하가 크게 길하도다. 그렇습니다. 후한이 멸망하면 황건이 그것을 대신한다는 의미죠. 이에 따라서 일반적으로 종교집단의 제정일치 국가 건설을 위한 봉기라고 보는 견해가 있지만, 중국 사학쪽은 탄압받던 민중이 봉건지배자들에 대해 봉기했다. 라면서 갑자농민전쟁등으로 부르고 있죠. 그러나 제가 볼땐 이러한 평가는 사실 맹획의 한족설 같은 중국이 이 문제를 윤색한 것이라 봅니다.
먼저 황건당이 후한을 성립시키고 나라를 만든다면 장각 일가가 최고지도자로서 성립되는 제정일치사회인데, 제정일치사회라도 이러한 최고지도자가 왕으로 변화될수밖에 없죠.(이러한 제정일치사회의 변동은 태평천국을 살펴보면 잘 알수 있게 됩니다. 홍수전은 결과적으로 황제가 되고 후궁을 지명하는 등 중화군주로서의 체제가 나타나게 되죠.)그래서 과연 이것이 민중이 주도가 되는 근대의 시민국가 체제로 변동? 거의 그냥 갖다붙인 이야기일 뿐이죠.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러한 황건당의 봉기는 각지에서 고통받던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는 상황이 됩니다. 문란한 황제의 통치와 십상시와 외척들의 전횡으로 인해 지방관들의 과도한 수탈, 그리고 환관들의 매관매직으로 인해 관직을 사서 내려온 부패관리들의 가혹한 통치도 있겠습니다만, 이전에 당고의 금으로 인해 중앙관직 진출이 봉쇄된 사대부들이 지방으로 귀향하면서 이들이 점차 호족으로 성장하게 되면서 문제가 더더욱 커지게 되죠.
후한은 각 지방의 호족들이 광무제에게 협력하면서 성립한 왕조였고, 광무제 후대의 황제들 역시 호족들을 효렴을 통한 관리로 선발, 중앙조정에 흡수시키려 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호족들은 전한의 강력한 법가적 체제에 반발하고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사대부화 하게 됩니다. 따라서 황제는 이들을 꺾어야만 황제권이 강화될 수 밖에 없었죠. 따라서 황제는 근위세력을 성장시키려했는데 황제 주변에 항상 있는 외척과 환관이 그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황제가 요절하고 어린황제가 즉위하게 되면서 외척이 부상했고, 이들로 사대부 세력을 억누르는데 성공하지만, 이들이 점차 부패하고 이후 황제들이 요절하면서 어린 황제가 차례로 즉위, 외척세력이 점차 득세하기 시작합니다. 황제는 외척세력을 제거하기 위해서 결국은 환관과 결탁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외척 대 환관의 결투에서 환관 세력이 승리하게되고, 이 와중에 사대부세력들은 죽거나 관직진출을 봉쇄당하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당고의 금, 또는 당고의 옥으로 불리게 됩니다.
이러한 당고의 금 사건은 지방의 소농민들에게 치명적 타격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부패한 지방관의 가혹한 수탈에 시달리던 터에, 이러한 사대부들이 자신의 근거지로 낙향, 대토지를 겸병하면서 이러한 소농들의 농토를 빼앗고 그들을 소작농으로 전락시켰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낙향한 사대부들은 이른바 호족으로 회귀한 것입니다. 가렴주구에 엎어진 농민을 대토지 겸병 호족들이 그 위에서 밟아버린겁니다. 따라서 이러한 농민들에게 굶어죽으나 칼에 맞아죽으나는 먼저 죽으나 나중에 죽으나의 선택차이였죠. 따라서 이러한 지방 민심은 황건당에게 유리했습니다. 기록에 그들의 세력이 무려 36만에 달한다는 점은 많은 농민들이 그들에게 동조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사실 그들의 지도자인 장각 역시도 관료를 꿈꾸다가 낙향했고, 농사를 짓다가 호족에게 토지를 빼앗기고 약초를 캐면서 근근히 살던 사람이었으니까요.
장각은 이러한 황건당의 추종자들이 가진 증오를 후한 정부로 돌립니다.
장각 : 이건 다 후한 정부 탓이다!
그리고 각 지역에서 일어난 황건당은 대토지를 보유한 호족이나 대상인들을 죽이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을 뜯어먹던 사람들에 대해 보복을 시작한 겁니다.
황건의 봉기가 각 주로 파급되고 문제가 심각해지자, 후한 조정은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각 지역의 주군병들은 무지렁이에 불과한 황건군에게 격파당하기 일쑤, 각 군과 성은 점령당하고 관리와 지방유력자들은 황건군에게 죽고 그 일가 붙이들은 죽고, 여자들은....(검열삭제)이니...영제와 십상시들은 일대 대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조정 : 에....구국의 결단을 위해 당고의 금에 저촉된 당인들을 사면한다. 단, 황건적을 무찔러라.
그리고 조정은 황보 숭, 주준, 노식 등의 명망높은 인사들을 관군의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그 아래에 당인 출신들을 배치해서 황건군을 상대하게 합니다. 그리고 저 포고령에 의해 관직진출이 봉쇄당한 당인 출신의 지방호족들은 각각 의용군을 모집하죠. 지방 호족들은 대토지를 겸병하고 있었기 때문에 각 지역의 유랑민이나 빈농들이 주역이 된 황건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고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유랑민이나 아래 소작인들을 병사로 징집해 황건적을 치게됩니다. 결국 184년에 지도자인 장각이 병사하고 장보, 장량이 관군에게 죽자 공식적으로 황건적의 난은 종료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황건적은 존재해 각 지방에서 소규모의 반란을 일으키거나 주를 공격하는 등의 불씨를 남기게 됩니다.
그러나 황건적이 토벌되면 모든것이 괜찮아지리라는 후한 조정의 생각과는 달리, 상황은 이상하게 돌아가게 됩니다.
먼저 환관에 의해 쫓겨났다가 황건적 토벌로 공을 세웠던 당인 출신들이 환관에 대한 증오심으로 인해 당시의 유력 외척인 하진 밑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겁니다. 이러한 상황에 위협을 느낀 십상시들은 건석 밑으로 서원팔교위를 형성하고, 직위상으로는 하진이나 원소, 조조는 서원팔교위 휘하에 있었지만 정치적 위치로는 환관들을 압박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는 결국 이후 황제 계승과 십상시의 난, 그리고 군웅할거의 계기를 주게 되는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황건적이 토벌되고 난 이후에도 의용군을 편성해서 각 지역의 황건적을 토벌하던 지방 호족들이었죠. 이들은 토벌한 황건적이나 지방 반란세력의 잔당을 휘하 세력으로 흡수하면서 점차 군사적 힘을 가진 군벌로서 성장하게 됩니다. 거기다 전과와 이들을 달래기 위해 중앙 조정이 이 군벌들에게 군의 태수 또는 주의 자사 직위를 내려서 이들을 중앙의 직업군인으로 흡수하려 했지만, 이들은 오히려 이것을 이용해서 지방 전체의 조세, 행정, 군사 등의 모든 권한을 장악합니다. 거기다가 중앙정부가 지방의 소요를 진정시키기 위해 내려보낸 조정 관료 출신들 역시 지방에서 점차 군벌이나 제후로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공통점은 중앙 조정의 명령을 거부하고 독자 세력화를 시작하게 되죠. 이러한 독자적 세력화를 시작한 세력가와 군벌들에 의해 후한은 점차 쪼개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군벌들 중 가장 급속히 부상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강동의 호랑이, 손견 문대와 그 일가였습니다.
마속 나무위키 문서 2.3. 가정의 패전 인용
"그런데 여기서 마속은 제갈량의 명령을 무시하고 길목에 세워야 할 방어진지를 산 꼭대기에 세우는, 전쟁사상 다시 없을 바보짓을 한다.
부장 왕평이 필사적으로 말렸지만 이마저도 무시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