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나의 심각한 음모론이다.
명절에 먹는 컵라면은 정말 심각하게 맛이 없다.
최고의 물온도와 완벽하게 맞춘 물의 양, 심지어 비싼 계란까지 하나 투척해서 뚜껑을 닫고 익혀도, 맛이 정말 없다.
몇 년만에 일주일 연휴다 뭐다 하지만, 사실 나에게는 별 해당사항이 없다. 이놈의 학원판은 오히려 긴 연휴에 신이나서 추석특강을 주아악 깔아놓으니, 노는건 간부요, 일하는건 졸개라. 빨간날 하얀날 할 것 없이 아침 7시에 출근해서 밤 11시까지 학원에 짱박혀있다. 강사들이야 그래도 일년중에 요 일주일이 황금같은 보너스 땡기는 기간이라고 할 만큼, 짧고 굵게 딱 강의해서 한탕 벌어봅시다- 라도 할 수 있지. 시급에 추가수당 좀 나와서 월급 몇십이 돈백으로 둔갑한다 한들, 어차피 아직 월급날까지 2주나 남았다 싶으면 별로 위로가 되지도 않는다.
하루에 거의 천명가까이 되는 수험생들을 줄 맞추고, 인원통제하고, 출석체크하고, 선생들 프린트 챙기고, 칠판 정리하고, 에어콘온도도 맞춰주고, 마이크도 테스트해주고, 내가 무슨 갓난아기를 키우는 것도 아닌데, 알아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왜 자꾸 시키는거야. 라고 속으로만 짜증을 부려본다. 선생들은 학생들 앞에서 명절인데 쉬지도 못한다고 투덜대지만, 웃기구있네. 님하들 통장좀 까 봅시다- 하고싶어서 안달난거아냐.. 투덜댈건 이쪽인데 말이지.
그래도 명절이랍시고 산만한 덩치의 본부장은 학원시찰. 1분쯤 빼꼼히 들어와 눈웃음 몇번 치고 가는게 관리구나 싶다. 그 1분을 위해서 사람들은 다 굽신굽신. 어차피 나야 쫄따구니까 별로 신경도 안쓰고 고개 뻣뻣히 하고 있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지만, 저 높으신 분이 나한테 신경이나 쓸까 싶으신거지. 그래도 학원 간부급 사람들은 다들 긴장타고 있던데. 요런면에선 비정규직이 좀 편한거 같기도하지만, 느껴지는건 이게 말만 계급사회가 아니지 계급사회구만. 그나저나, 명절인데 밥이랍시고 던져주는게 컵라면? 승질이 뻗쳐서 호화롭게 편의점 삼각김밥과 무려 '카페라떼'를 사왔다. 헹, 이정도는 먹어줘야지. 명절이잖아!
사촌동생놈은 한우갈비를 싹쓸었다고 자랑하고, 친구놈들은 심심하다고 징징대고, 학생들은 말 드럽게 안듣고. 그 와중에 짝사랑하는 그녀는 또 무슨 바쁜일이 생겨서 묵묵부답. 무슨 일이 있으면 있다고 얘기좀 해 달라고 하고싶은데, 그놈의 '화낼 권리'라는게 아는 누나와 동생사이에서는 또 성립이 안된다나. 아이고. 속태우는 일만 잔뜩이다 증말. 아 학생들! 밖에 줄 서있는 애들이 바보로보여?! 친구 책 던져놓고 자리맡아주지 말라고 좀!! 이라고 소리를 질러도 저건 무슨 개야 똥이야, 아냐 소나 돼지에 가까워 하는 눈빛들. 이런놈들이 성적좋아서 명문대를 가는건 좀 쓰다. 벌써부터 약은수를 써대잖아. 얄밉게. 좋게 하지말라고 해도말야. 1시간 반 줄선 애가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는 이럴거면 줄 뭐하러 서냐고, 이전 강의 듣는애들이 친구자리 다 맡아주면 우린 뭐가되냐고 하는데 내가 다 성질이 나서 200명앞에 두고 마이크에다 소리를 질러 버렸네. 학생은 고객님, 고갱님은 왕이지만 나한텐 고객님이 아니라 고'개'다 싶은 놈들. 직원들도 암말 안하길래 그냥 짜증나서 버럭. 씨알이나 먹힐리 없겠지만, 얘들아. 니들 안엔 양심과 수치라는 권력이 없구나. 젠장.
아, 명절 컵라면 진짜 맛없다. 김치큰사발, 튀김우동, 신라면, 삼양라면 큰컵, 도시락.. 명절 내 먹은게 이런 컵라면인데 죄다 맛없다. 어디 한우갈비맛 컵라면이나 잡채맛 컵라면, 갈비찜맛 컵라면 같은건 없나. 송편맛은 좀 사양하고 싶지만. 아아, 문자 답장이나 좀 주지, 하긴 어제밤에 보낸 문자는 이미 유통기한 지난건가. 에휴. 피곤해 죽겠는데 출근은 해야겠고, 좋은 일은 하나도 없고, 일하고 있지만 누가 과제를 대신 해주는 것도 아니고, 다음주 월요일까지 해야할 과제가 잔뜩인데. 머리가 살살 아파오고 맛있는거라도 먹고싶지만 그놈의 다이어트. 맘 대로 되는게 하나도 없구나. 그 와중에도 아침부터 답장왔나 핸드폰부터 열어보는 속알맹이 없는놈. 사람을 좋아하면 자존심이 없어진다는데, 원래 자존심이 별로 강하지 않아서 그런가. 짜증나고 답답해도 한마디 말도 못한다.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루 열두번씩 기분이 왔다리 갔다리 하는구나.
오늘도 앞으로 맞이해야할 학생수가 600명인데. 또 컵라면 주겠지.
본부장은 뒤뚱거리면서 돌아다녀도 다들 굽신굽신거리고
직원들은 그래도 밥먹으면 청구라도 하지.
못쉬는것도 말단이 제일 못쉬고, 밥값도 결제 안해주고. 에라이..
얼핏 노동운동의 대부 김문수의 변절이라는 타이틀을 봤는데.
이런 동네에서 뒹굴면 그냥 그렇게 되는게 자연스러울지도 싶다.
슬프고 억울하고 화나잖아. 남들 다 쉬는데 일시키면서 넌 일하는게 당연한거라고하고, 라면던져주고 그거라도 먹으라고하면. 그래서 이러지말라고 화내면 너말고 일할놈 많아 바이바이. 저항하고 연대하고 운동하다가, 결국에는 어마어마한 벽을 마주해야만 하는걸.
아아, 복잡하다.
망할 계급사회. 쫄다구 인생 볕들날 있겠지. 아직 젊으니까.
답장이나 좀 왔음 좋겠다. 앞으로 놀러가자고 하지 않는게 낫겠어. 아직 아니구나. 그럼 전엔 왜 만나준거야 쳇.
컵라면 진짜 맛없다.
회사에 항의할거야.
명절에 컵라면 왜이렇게 맛없냐고.
이건 음모다!
P.S: 도저히 라면이 싫어서 밥사먹으려고 했더니, 다이어트 한답시고 군것질 안하려고 카드 안들고나왔지..
교대역 길바닥에서 뒹굴대며 징징대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