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말씨를 쓰고 짧은 커트를 한 창백한 얼굴의 별로 눈에 띄는 외모가 아니었던 그 소녀는 항상 동네 뒷골목에서 혼자서 소꼽장난을 하거나 그네를 타면서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나 역시 혼자 생각하거나 책을 읽는 경우가 많아 우연히 마주치는 경우가 많았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녀는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살고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항상 얼굴에 그늘이 져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날인가 짓궃은 남자아이들이 인근 야산에서 개구리를 잡아 던지고 도망간일이있었다. 소녀는 까야 소리를 지르며 펄쩍 뛰면서 울다가 해질녁까지 동네 그네에서 울먹이고 있었다. 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멋쩍은 표정으로 "괜찮니?"하며 물었다. 소녀는 내 얼굴을 잠시 보더니 아무말이 없이 종종 걸음으로 그대로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뒤로도 종종 그런일이 있었지만 한번도 그 소녀는 내게 말을 해주지 않았다.
2.
우리 동네엔 소년들 외에도 6명의 소녀가 있었는데 파란 치마를 즐겨입던 성희가 가장 이뻣다.
성희는 이쁜데다가 집도 동네에서 가장 부자집이라
남자친구들이 모이면 서로 성희가 자기 여자 친구라고 뻐기곤 했는데 물론 성희와 사귀는 놈은 없었다.
나 역시 성희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언제나 하는 딴생각엔 꼭 성희하고 결혼하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방역차가 온 동네를 하얗게 만들었던 어느날 동네 친구들이 흰 구름을 쫓아 뛰어다니던 그 때 난 여전히 동네 공원에서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성희가 파란 치마를 입고 공원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하얀 피부와 오똑한 코 그날따라 성희는 무척이나 이뻐보였다.
"LB야 뭐해?" 성희가 환하게 웃으면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 그냥 있었어... 헤헤 " 난 머쩍게 머리를 만지면서 떠듬는 말투로 대꾸했다.
"피. 넌 맨날 여기서 딴생각만 하는데 안 심심해?"
"뭐.. 그냥 난 혼자 있는게 좋아서 ..헤"
"하긴 그게 니 매력이긴 하지 헤 근데 LB야 너 혹시 여자친구 있니?"
"어..어... 없어 왜 근데 왜....왜...?"
"다행이네 그럼 너 내 남자친구해라 그럼 내가 매일 놀아주고 잠바도 연필도 사줄께 나 돈많아 헤"
사실 망설일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아니 이것은 말도 안되는 행운이었다. 몇번이나 아니 몇백번이나 생각만 했던 일이 현실이 된거였다.
성희의 남자친구가 된다면 동네 최고의 소년이 되는거였다.
근데.... 그 순간 갑자기 그녀가 창백한 얼굴의 떠올랐다. 항상 우울한 표정으로 나에게 한마디 말도 건내지 않았던 그녀가 말이다.
내머리는 "야 너 뭐하고 있는거야 지금 당장 나도 좋아라고 대답해"라고 외치고 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뭔가 먹먹한 기분
"LB야 빨리 대답해줘 응? 너도 좋지 응?" 성희는 나의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 응? 왜 대답이 없어.. 응?"
" 미안하다 성희야. 사실 나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어" 그 말과 동시에 난 벌떡일어나 공원 밖으로 뛰쳐나갔다.
난 집으로 바로 뛰어들어갔다. 토할것 같았다. 근데 갑자기 해야 할일이 생각났다. 바로 설에 받아 고히 간직해온 저금통을 깨고 동네 잡화점으로 달려갔다. 그리곤 그 돈으로 노란 손수건을 사서 그녀를 찾기위해 동네를 해메기 시작했다.
해질녁에 겨우 동네 뒷골목에서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오늘도 무슨일이 있었는지 말없이 계단에 앉아 울먹이고 있었다.
난 조용히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걸로 눈물 좀 닦아.." 라고 말했다.
그녀는 또다시 날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손수건을 받았다. "고마워 그리고 항상 말걸어 주었는데 대답도 못해서 미안해 부끄..러워서"
그녀의 눈물 닦는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갑자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놀래긴 했지만 손을 빼지는 않았다.
" 나 앞으로 니 남자 친구 하면 안될까? 나 너 좋아하는 것 같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까 내가 그랬듯 계단을 뛰쳐나갔다.
3.
그 뒤 우리는 연인으로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그와 동시에 많은 아픔도 겪어야 했다.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그녀의 가정환경이 가장 큰 문제였다. 머리는 좋았으나 집안 형편상 그녀는 농대에 진학해서 농업학자가 되는게 꿈이었던 그녀는 자신이 꿈이 좌절되자 조금씩 삶의 의욕을 잃어가고 있었다.
나 역시 지속되는 이런 상황이 너무 힘들었고 더군다나 성희는 보란듯이 나보다 몇배는 훌륭한 남자들과 사귀고 있었다.
그런데.... 1990년 모든것이 바뀌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옆동네에서 전자대리점을 하던 부자집 아저씨와 재혼을 하게 된것이었다.
그 아저씨는 재혼하자 마자 그녀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기 시작했다.
빛바랜 파란 남방이 맵시나는 줄무니 원피스로 바뀌고 책살돈도 없다가 이젠 일본명문대출신 과외선생님까지 모실 수 있게 된것이었다.
난 너무 행복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제 마음껏 날 수 있다는 생각에 내 할일도 잊은채 그녀 옆에서 많은 뒷바라지를 했다.
그녀 역시 열심히 공부해서 11월 중학교 진학 후 처음으로 전교 1등을 하였다.
전교 1등을 한날 그녀와 나는 동네 뒷산에서 첫키스를 했다.
"앞으로 영원히 너만을 사랑할께... 정말..." 그녀는 말없이 웃었다.
4.
그 뒤 그녀는 명문고에 진학해 잠시 슬럼프에 빠지긴 했지만 1994년 고2때 전교 1등을 하고 S대 농대에 차석으로 진학했다.
나도 서울에 모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사실 고등학교때는 예전처럼 자주 볼 수가 없었다. 일단은 공부가 중요했기 때문에
난 그녀를 1주에 한번정도 11시 경에 잠깐밖에 볼수 없었다. 그래도 좋았다 그녀는 계속 훌륭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였고 나는
이 행복이 앞으로도 영원히 지속 될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군대에 가 있는 동안에도 그녀는 편지로 좋은 소식을 많이 전해왔다. 공부는 잘 되고 있으며 생활도 잘 되고 있다고 난 그녀를 볼 수 없었
지만 그녀의 편지 만으로도 항상 옆에 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항상 행복했던것 만은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석사과정을 하면서 그녀는 심각한 슬럼프에 빠져들었다. 하는 연구마다 잘 되지 않았고 그럴때면 괜한 나에게 화풀이를 했다. 난 처음엔 괜찮아라고 하면서 그녀를 달래 보았지만 날이 갈수록 상태는 심해졌다. 나도 취직준비 등으로 시간도 없고 마음에 여유도 없는 상태에서 관계는 악화되어갔다.
난 많은걸 바라는게 아니었다. 어릴때 처럼 그녀가 잘 되고 좋은 대학가고 이런게 중요한게 아니라 애인으로써의 최소한의 배려는 있어야
하는 거였다. 짜증, 어이없는말 등의 점점 그녀를 보는게 힘들어지고 있었다.
5.
그러기를 몇년 그때 전환이 일어났다. 그녀의 담당교수가 바뀐것이다. 그는 그녀의 슬럼프 극복을 위해 기초이론부터 철저히 검토해 주었고 헌신적으로 그녀를 지도했다. 그녀는 마침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녀가 쓴 논문이 10월 학회에서 모든이에게 갈채를 받을 수 있었다.
난 너무도 기뻤다. 그 지도교수에게 감사했으며 그 지도교수와 함께라면 그녀도 앞으로 많은 연구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갈채를 받던 그날 난 그녀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사랑해 그리고 다음번 연구 성과가 나는 데로 우리 결혼하자. " 그녀는 말없이 웃었다.
그리고 8년이 지난 2010년 그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그녀의 지도 교수는 다른 대학으로 가서 엄청난 연구 성과를 내고 있는 반면 그녀는 다시는 그런 논문을 발표하지 못햇다 10월 학회에 단 한번도 나가지 못했다. 중간에는 표절 논란으로 망신을 당하기도 하고 유명교수를 초빙하고도 별다른 성과 조차 내지 못했다. 주위에선 그녀의 학자로서의 생명이 끝났다고 이야기 하고 그렇게 많은 지원을 받고도 성과를 내지 못하는건 정신력이 없어서 그렇다고 조롱한다.
나도 이유는 모르겠다.
6.
이제 우리 둘이 나이가 30대 중반을 향해 가고 있다.
국딩때 만나 지금까지 서로 사랑했지만 이제는 너무 지쳐간다.
심지어 왜 그때 성희의 손을 잡지 못했을까 라는 아쉬움도 생기고 있다.
하지만 하지만 그녀를 버리는 순간 평생 연애는 할 수 없다는 걸 너무나도 잘알고 있기에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내림내카페에서 그녀와 만났다.
" 내가 좀 더 열심히 벌어서 옷도 사주고 모자도 사주고 할께 우리 내년가을엔 꼭 결혼하자."
그녀도 미안 한듯 예전 그 모습처럼 말없이 웃었다.
사랑해요 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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