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한국 프로야구에서 가장 기적적인 일이 일어난 해입니다.
만년 꼴찌였던 태평양돌핀스가, 그것도 별 이름없는 투수 3명을 내세워 포스트시즌에 진출한데다가 준플레이오프에서 전통강호 삼성라이온즈를 물리치는 파란까지 일으킨 것입니다.
이 당시의 태평양은 타선에서는 김동기, 마운드에서는 양상문이 홀로 끌다시피 한 팀이었고 그나마도 10연패를 밥먹듯이 하는 팀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의 지휘하에 마운드에 3명의 신인이 새로 등장했고 이들은 상대 타선을 윽박지르며 태평양돌핀스를 포스트시즌에 올린 것입니다.
언더핸드 박정현, 좌완 정통파 최창호, 우완 정통파 정명원.
그 중 오늘은 박정현에 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박정현, 1969년 7월 10일생. 그리고 유신고를 졸업하고 1988년에 태평양의 고졸 우선지명을 받고 입단.
190이 넘는 거대한 키, 하지만 뼈밖에 없어 보일정도로 빈약한 체격의 투수였습니다. 그나마 빈약한 체격으로 인해 선택한 투구폼은 언더핸드.
그가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면 마운드에 손이 긁힐 정도로 팔의 활동반경이 컸습니다. 마치 하나의 춤을 보듯이......
그러나 고졸신인이 첫 해에 좋은 성적을 올리기란 웬만해서는 힘든 일입니다.
1988 박정현 : 6등판, 2선발, 18.2이닝, ERA : 7.71, WHIP : 1.77, 0승 1패, 피안타율 0.338, 피출루율 0.417, 8삼진
그저 그런 투수 박정현. 하지만 그는 운명적인 만남을 몇가지 겪게 됩니다.
첫번째로 최창호와의 만남, 두번째로 정명원과의 만남.
이 야구밖에 모르는 순둥이 3명은 항상 붙어다녔고 비록 현실은 힘겹지만 나중에는 꼭 훌륭한 투수가 되겠다고 다짐하며 함께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3번째 만남.
태평양돌핀스는 김성근을 감독으로 선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오대산 지옥훈련. - 주포 김동기가 칼만 있으면 감독을 찔러버리겠다고 할 정도로 지독했던...... -
"야구의 신" 으로 불리며 그 전에는 OB베어즈, 나중에는 쌍방울레이더스, LG트윈스, SK와이번스등 맡은 팀마다 족족 정상권으로 올리던 그의 눈에 박정현과 최창호, 정명원이 들어왔습니다.
셋 모두 이름모를 신인들이었지만 김성근 감독의 눈에 이들은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정상급 투수로 보였고 이 셋은 특별히 그 지옥훈련중에서도 극악의 지옥훈련을 겪게 됩니다. - 정명원은 나중에 이 훈련을 "훈련? 단지 죽지않기 위해 발버둥 쳤을 뿐이다." 라고 술회합니다. -
한편, 이 지옥훈련을 끝내고 김성근 감독은 팀의 사정에 맞추어 홈 구장, 도원구장을 개조합니다.
삼성의 이만수, 해태의 김성한, 빙그레의 유승안 - 장종훈은 아직 기량이 만개하기 전이었습니다. - 같은 거포가 전무한데다가 타력이 한숨나올정도로 약했던 태평양의 사정상 타력전은 패배로 가는 직행열차였습니다.
김성근 감독은 결국 투수전으로 승부수를 띄웠고 도원구장의 펜스를 무려 3m나 올립니다. - 이 개조덕택에 웬만한 홈런타구가 펜스에 맞고 떨어지는 단타나 2루타로 둔갑한 적이 많았습니다. -
게다가 더그아웃도 1루에서 3루로 옮기며 대대적인 태평양개조에 나선 것입니다. - 쓰고나니 박정현글이 아니라 김성근에 관한 글이...... -
1989년, 박정현은 작년과 다른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비쩍 마른 몸은 마찬가지였지만 예전보다 공에 힘이 실려있었고 신인이라고 얕보던 상대의 이름난 타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돌아서기 일쑤였습니다.
그리고 큰 키에 긴 팔을 이용한 그의 언더핸드 투구폼은 정말로 흥미로운 볼거리였습니다.
가장 경악스러웠던 마운드의 3총사의 등장, 그 선봉장이 바로 박정현이었습니다.
1989 박정현 : 38등판, 25선발, 17완투, 4완봉, 242.2이닝, ERA : 2.15, WHIP : 1.11, 19승(15선발승, 4구원승) 10패 2세이브, 승률 0.655, 피안타율 0.213, 피출루율 0.291, 116삼진
최다 등판 5위, 최다 선발 5위, 최다 완투 2위, 최다 완봉 2위, 최다 이닝 2위, 평균 자책점 2위, WHIP 4위, 다승 2위, 최다 선발승 1위, 최다 구원승 5위, 다패 9위, 세이브 16위, 승률 5위, 피안타율 4위, 피출루율 4위, 탈삼진 5위
투수부문 주요 기록에서 모두 5위안에 드는 빛나는 투구. 게다가 19승으로 신인 최다승 기록을 세웠습니다. - 단, 신인 첫 해 최다승은 1986년, MBC의 김건우와 2006년, 한화의 류현진이 기록한 18승입니다. -
그리고 신인왕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의 타선이 워낙에 물방망이였기때문에 10패를 기록하는 불운을 떠안습니다.
한편, 박정현이 19승을 기록한 외에도 최창호가 10승, 정명원이 11승을 기록하며 태평양은 정규리그 3위에 올라 창단이후,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하게 됩니다.
만년 꼴찌가 가장 빛나는 기적의 신화를 써낸 것입니다.
준플레이오프에서 태평양은 전통강호 삼성라이온즈를 만나게 됩니다.
도원구장에서 처음 열린 포스트시즌 경기. 그 경기의 태평양의 선발투수는 당연히 박정현이었습니다.
박정현은 삼성의 타선을 완벽하게 봉쇄합니다. 그러나 태평양의 타선역시 삼성의 투수들에게 완벽히 봉쇄당하며 9회까지 0 : 0을 유지합니다.
경기는 연장으로 접어들었습니다.
10회에도 양팀 무득점, 11회에도, 12회에도, 13회에도 이하동문.
그리고 14회.
이제 한 이닝만 더 지나면 무승부처리가 선언되는 상황. 그리고 태평양의 선발 박정현은 이미 엄청난 무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의 투구폼은 언더핸드. 게다가 이 해에 242.2이닝을 던지며 970명의 타자들을 상대로 쉼없이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해야 했기에 그의 허리는 무너지기 일보직전에 와 있었습니다.
일단, 14회에도 박정현은 삼성의 타선을 무득점으로 봉쇄했지만 결국 그는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탈이 나버렸습니다.
14회말. 박정현이 실려간 상황에서 태평양은 공격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박정현의 활약에 보답하듯 태평양의 주포 김동기가 김성길을 상대로 짜릿한 끝내기 3점 홈런을 때려내며 기나긴 승부의 마침표를 태평양의 승리로 찍게 됩니다. - 한편, 김동기는 원래 김성길에게 약한 모습을 보였으나 이 홈런을 통해 극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
2차전에서 최창호가 호투했지만 살짝 실투가 나온 사이, 김용국에게 역전 홈런을 얻어맞으며 패배한 상황.
3차전. 4회말, 정명원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자 마운드에 올라온 태평양의 투수는 다름아닌 박정현. 박정현은 이 위기를 해소하고 또다시 지루한 승부에 들어갔습니다.
또다시 침묵한 태평양의 타선. 박정현은 참고 또 참고 또 참으며 계속해서 삼성의 타선을 봉쇄했지만.......
9회초, 박정현은 결국 무너져버렸습니다.
또다시 허리가 무너지면서 실려가버린 박정현이었습니다.
박정현이 실려나간 뒤, 10회말 곽권희의 끝내기 안타가 터지며 태평양돌핀스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됩니다.
이 준플레이오프의 영웅, 박정현은 1차전과 3차전에 등판해서 1차전 14이닝 완봉승을 비롯 19.1이닝동안 평균 자책점 0.00, WHIP : 0.72, 8삼진을 기록했습니다.
플레이오프. 심각한 허리디스크를 앓고 있던 박정현은 마운드에 오를 수 없었고 결국 마운드의 한 축이 빠져버린 태평양은 해태타이거즈에게 0 : 3으로 패배합니다.
1990년, 그러나 박정현은 쉬지않고 태평양의 마운드를 지켜야 했습니다.
1990 박정현 : 35등판, 21선발, 9완투, 2완봉, 191.2이닝, ERA : 2.63, WHIP : 1.21, 13승(11선발승, 2구원승) 7패 7세이브, 승률 0.650, 피안타율 0.252, 피출루율 0.312, 66삼진
최다 등판 14위, 최다 선발 9위, 최다 완투 3위, 최다 완봉 5위, 최다 이닝 4위, 평균 자책점 6위, WHIP 11위, 다승 5위, 최다 선발승 4위, 최다 구원승 18위, 다패 20위, 세이브 6위, 승률 8위, 피안타율 23위, 피출루율 13위, 탈삼진 17위
1991년에도 이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1991 박정현 : 30등판, 25선발, 13완투, 1완봉, 184이닝, ERA : 3.47, WHIP : 1.39, 10승(10선발승) 12패 2세이브, 승률 0.455, 피안타율 0.277, 피출루율 0.343, 47삼진
최다 등판 28위, 최다 선발 3위, 최다 완투 1위, 최다 완봉 12위, 최다 이닝 10위, 평균 자책점 21위, 다승 17위, 최다 선발승 7위, 다패 4위, 세이브 23위, 승률 22위
1992년, 초반 태평양의 상승세를 이끌던 동료 최창호와 정명원이 빠진데다가 기대주 정민태마저 부상으로 이탈했던 이 해. 그나마 태평양 마운드의 기둥은 박정현이었습니다.
1992 박정현 : 33등판, 20선발, 8완투, 0완봉, 165.2이닝, ERA : 3.69, WHIP : 1.36, 13승(10선발승, 3구원승) 7패 6세이브, 승률 0.650, 피안타율 0.255, 피출루율 0.345, 85삼진
최다 등판 16위, 최다 선발 19위, 최다 완투 8위, 최다 이닝 12위, 평균 자책점 18위, WHIP 23위, 다승 10위, 최다 선발승 9위, 최다 구원승 13위, 다패 25위, 세이브 9위, 승률 9위, 피안타율 24위, 탈삼진 20위
4년간 684이닝을 던졌던 박정현. 게다가 허리디스크까지 안으면서 던졌던 그는 결국 크게 주저앉고 맙니다.
1993년을 통째로 쉬었으나 그 후 예전과 같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2군이나 연습경기에서 간간히 공을 던지며 타자들에게 언더핸드 투수의 공은 이렇다라는 것을 알려줄 뿐이었습니다.
그 사이 소속팀은 태평양돌핀스에서 현대유니콘스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1994 박정현 : 11등판, 8선발, 37.2이닝, ERA : 4.54, WHIP : 1.46, 2승(2선발승) 3패, 피안타율 0.285, 피출루율 0.345, 15삼진
1995 박정현 : 1등판, 0선발, 4.2이닝, ERA : 7.71, WHIP : 1.93, 0승 0패, 피안타율 0.250, 피출루율 0.429, 2삼진
1996 박정현 : 8등판, 2선발, 15.2이닝, ERA : 6.89, WHIP : 1.98, 0승 0패, 피안타율 0.281, 피출루율 0.418, 9삼진
1997 박정현 : 13등판, 0선발, 25.1이닝, ERA : 6.39, WHIP : 1.42, 0승 0패, 피안타율 0.274, 피출루율 0.378, 19삼진
1998년, 시즌 중반이던 7월 31일, 현대는 박정현을 쌍방울의 조규제와 트레이드합니다. - 박정현외에도 가내영, 그리고 현금 6억이 따라붙었습니다. 그리고 이 날, 박정현의 동료인 최창호도 LG트윈스로 트레이드됩니다. -
그러나 그곳에서 박정현은 재기의 가능성을 보여주게 됩니다.
1998 박정현 : 9등판, 3선발, 24.1이닝, ERA : 2.22, WHIP : 1.23, 2승(2선발승) 1패 1세이브, 피안타율 0.239, 피출루율 0.330, 13삼진
1999년, 소속팀 쌍방울레이더스는 낭떠러지위에 올라선 상황이었습니다.
자금난이 목을 졸랐고 결국 작년에 박경완과 조규제를 15억을 받고 현대유니콘스로 트레이드한 이후, 또다시 김기태와 김현욱을 20억을 받고 삼성라이온즈에 보낸 것입니다.
게다가 에이스 김원형은 시즌 초반, vs 한화이글스전에서 장종훈의 강습타구에 얼굴을 얻어맞고 실려간 상황.
이 암울한 쌍방울의 마운드를 이끌어갔던 사람은 바로 박정현이었습니다.
1999 박정현 : 37등판, 14선발, 124이닝, ERA : 3.92, WHIP : 1.37, 5승(2선발승, 3구원승) 11패 3세이브, 피안타율 0.236, 피출루율 0.333, 56삼진
팀이 너무나도 참혹한 상황에 처해있었기때문에 승보다는 더 많이 패를 쌓아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현은 태평양시절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듯한 구위를 보여주었습니다.
2000년, 결국 쌍방울레이더스가 자금난으로 해체되고 그 대신 쌍방울의 멤버들을 흡수하여 9번째 구단으로 창단된 SK와이번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속에서 박정현이 설 자리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2000 박정현 : 32등판, 4선발, 56.1이닝, ERA : 5.75, WHIP : 1.92, 1승(1선발승) 2패, 피안타율 0.321, 피출루율 0.414, 24삼진
그리고 이 해가 끝난 후, SK와이번스는 박정현을 포함한 수많은 노장들을 방출합니다.
결국 박정현은 13년간 뛰었던 그라운드에서 모습을 감추게 됩니다. 그나마 한가지 다행은 고향에서 물러났다는 것일까요?
박정현의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통산 253등판, 124선발, 1090.2이닝, 48완투(15위), 7완봉(26위), 472실점, 418자책점, ERA : 3.45, WHIP : 1.33, 65승, 53선발승, 12구원승, 54패, 21세이브, 승률 0.546, 피안타율 0.254, 피출루율 0.334, 460삼진, 429피볼넷
포스트시즌과 올스타전의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포스트시즌 - 1989 준플레이오프의 기록이 전부입니다. -
2등판, 1선발, 19.1이닝, 0실점, 0자책점, ERA : 0.00, WHIP : 0.72, 1승, 8삼진, 4피볼넷
올스타전
2등판, 0선발, 3.2이닝, 3실점, 3자책점, ERA : 7.36, WHIP : 1.64, 0승 0패, 2삼진, 0피볼넷
한 편, 현대유니콘스는 1998년에 처음으로 우승컵을 손에 쥐면서 인천연고구단 사상 처음으로 우승을 안겨주게 됩니다.
그 때, 현대의 주장은 바로 정명원. 그는 그 자리에서 우승소감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너무나도 감사드리고...... 이 자리에 함께 고생한 정현이와 창호가 없는 것이 너무나도 아쉽습니다."
팀의 첫 우승, 그 우승소감의 첫 머리에 함께 뛰어준 동료들을 대신해서 가장 먼저 입에 올린 사람은 다름아닌 박정현과 최창호.
어찌보면 너무나도 경솔한 행동이었지만 도원구장에 있었던 수많은 관중들은 오히려 정명원의 말로 인해 다시 한번 옛날 회상을 하게 됩니다.
만년 꼴찌, 구제불능, 짐짝구단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무수히 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어야 했던 삼미슈퍼스타즈, 청보핀토스, 그리고 태평양돌핀스.
그러나 박정현, 최창호, 정명원이 이끌어 갔던, 그리고 만들어냈던 인천구단 사상 첫 포스트시즌 진출의 감격.
그리고...... 준플레이오프에서 보여주었던 박정현의 헌신........
그 1989년의 감동을 인천의 야구인들은 1998년 똑같은 자리인 도원구장에서 회상하게 된 것입니다.
NEXT : "진정한 거인 임수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