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갸튄스입니다.
최근에 쓴 에세이를 바탕으로 북벌론에 대해 한 번 정리해보았습니다.
뭔가 좀 무리한 주장이 나와도 함 어여삐 봐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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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임금 인지도 랭킹을 매기면 효종은 몇 등 정도 될까요? 아마 세종, 킬방원, 정조, 영조, 수양대군, 고종, 선조 등에는 분명 밀릴 테지만
그래도 듣보급은 아닌, 그런 양반일 겁니다.
재위기간도 짧은 편이고 (약 10년, 조선왕조 평균의 절반 수준) 딱히 눈에 띌만한 사건도 안만든 양반인데 인지도가 제법 있는 이유는 오직 단 하나
[북벌(北伐) !]조선의 으리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국시로 내걸었던 이 슬로건 하나 덕분 아니겠습니꽈.
1. 효종
효종이 진심으로 북벌을 추진했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이 많습니다.
좀 옛날 논문들을 보면 효종은 진심이었다는 식의 연구가 꽤 있지만 최근 경향은 "그냥 기믹 아님?" 정도가 대세입니다.
기믹론은 꽤 근거있는 학설입니다. 일단 기믹을 취해야할 동기가 너무 확실합니다.
먼저, 본인의 친형인 소현 세자가 친청파처럼 굴다가 귀국 2개월만에 의문사를 당하고 형수 일족이 처참하게 몰락하는 걸 목도합니다. 이런 걸 보면 누구라도 국내 정치지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체감할 수 있지요.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유리한지 분명히 알고 있었을겁니다.
'아.... 아바마마는 청군이 북경 점령하는 걸 본방으로 못봐서 이러시나본데.....'
그러나 어쩌겠어요, 아바마마 눈빛좀 보세요. 청나라한테 개기지 맙시다라고 말을 꺼냈다간 자기도 숙청당할 기센데요.
더 놀라웠던 건 소현 세자의 아들이 멀쩡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조가 둘째인 효종을 세자로 낙점하고 밀어붙였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 참 골치아프게 되었지요. 사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조가 밀어붙인 덕분에 본인은 조카 자리를 숙부가 차지한 꼴이 되어버렸습니다. 실제로 당시 볼만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하는데 성공한 사림은 후계자 선정이 종법에 어긋나게 돌아가는데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집권한 이상 정치센스가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집권층의 절반, 잘하면 그 이상을 자기 지지파로 만들고자 할겁니다. 해외에 뚜렷한 적대세력의 존재감이 있는 건 이럴 때 아주 좋은 떡밥이 되지요. 그는 아마도 청나라를 공격하자는 떡밥을 던졌을 때 누가 찬성하고 누가 반대할지 브레인스토밍을 해본 끝에 지지세력을 결집하는데 유리해보이는 선택을 내렸을 거에요. 그리고 이런 경우는 늘 그렇듯 강경파 지지세력을 결집하는게 훨씬 쉬운 법이지요.
마치 이북의 김정은이 집권 초기에 미국을 상대로 금방이라도 개전선언을 할 것처럼 현란한 언플을 했던 것과 비슷합니다. 북한 내에서의 정치투쟁은 전적으로 미국이라는 적국의 존재에 좌우되므로, 새로운 지도자가 자신의 취약한 정당성을 강화하고 위신을 제고하려고 할 때 미국에 대한 강경책만큼 소위 약빨돋는 게 없으니까요.
남한의 사례를 떠올리셔도 좋습니다. 김일성과 박정희는 그런 면에서 서로의 존재가 상대방의 국내정치상의 입지를 강화해주는, 일종의 공생관계를 유지했었지요. 물론 이게 진짜 하하호호하며 뒤로 몰래 펜팔을 주고받는 공생관계였다 이런 주장이 아니라, 그냥 가끔씩 암살조를 파견해주고 엄포를 놓고 실제로 위기를 고조시키는 사건이 터져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간접적으로 상대방 정권의 국내 장악력에 도움을 주었다는 의미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보면, 여전히 국내 정치지형도가 이
[외적]들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보수층의 전가의 보도가
[북한]이라면,
[친일] 문제가 나오면 진보측에서 신나게 칼을 휘두르지요. 외적의 존재감이 분명하고, 또 그놈들이 쳐들어와서 우리가 겪었던 기억 역시 아직 생생합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외적에 대해 강경하게 나가는 건 어떻게 보아도
[옳은] 일이 되지요. 현재 우리나라 정치지형에서 종북이나 친일이 행사하던 영향력을 효종은
[북벌]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행사했다는 겁니다.
여기까지 읽고보면 효종이 교활한 정치공학자 기믹꾼처럼 보이는데.....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_-
효종은 군사체계를 전면 재검토했고, 산성을 축조했고, 병기개량도 했습니다. 조정 중신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대규모 연병행사를 연례로 주관하고 친히 사열하기도 했습니다. 실질적인 군사력 증강을 꾀했고, 실제로 군사력이 나아지기도 했습니다. 손놓고 말로만 북벌을 외친 건 아니었던 거지요.
본인 역시 기골이 장대한 편이었고 기질 또한 호전적이고 불같은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북벌에 대놓고 반대하던 김자점 등을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한 후에는 그냥 대놓고 북벌파이던 병조판서 원두표, 어영대장 이완 등을 전면에 내세워 온건한 반대론을 홧끈하게 묵살합니다. 부지런히 뭔가를 계속 했던거지요.
송시열은.... 이런 효종의 정책이 별로였습니다.
2. 송시열
효종의 북벌이 기믹이었느냐가 좀 더 논란거리라면, 송시열의 북벌은 두말할 나위 없이 기믹이다 정도로 의견의 일치를 봅니다. 표면적으로는 당연히 당시 사림의 여론을 대표하는 대변인 답게 북벌에 찬성합니다. 그런데 북벌을 위한 효종의 준비작업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이었습니다. 전시체제 정책이란 게 평시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여러가지 무리한 점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예컨대, 효종 당시 관노로 등록된 이가 19만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중 실제로 관의 수중에 있었던 노비는 2만에 불과했구요. 누군진 당장 기억에 안나는데 여튼 누가 효종에게 건의합니다.
'병력 확충은 다른 거 필요 없이 얘들만 다 추쇄하면 20만 대군 확보하는 거 아닌가요?'
효종의 두 눈에선 스파크가 튀었지요. 당장에 전국구 교모의 추쇄도감을 설치하고 명부에 적혀있는 애들 다 잡아다가 다시 관노로 복귀시키라고 명령합니다.
당시 조선 인구가 1000만 전후였을 거라고 추정되는데, 오랜 시간에 걸쳐 '실질적인' 양민이 되었을 관노들을 무려 20만이나 추쇄해야 한다니 그 사회적 소란이 어땠을지 상상해보세요.
게다가 이 성격이 불같은 주상전하는 각 관아별로 추쇄실적을 보고케 해서 가장 실적이 떨어지는 담당관에게
[사형]을 내리겠다고 공포합니다.
.....^-^;;
반대하는 문신들에게 모욕적인 면박을 주는 것도 늘 잊지 않았구요.
이쯤되니 청나라 나쁘다는 말도 맞고 북벌이 필요하다는 말도 맞지만 구체적인 정책에 대해서는 불만을 갖는 이가 많아집니다. 그들이 주로 사림들이었고 송시열은 그 대표였지요.
그래서 송시열과 그 사촌인 송준길, 줄여서 양송(兩宋)은 대놓고 조정에서 태업을 합니다. 툭하면 사표내고 가버리고, 불러도 안오고, 간신히 불러노면 다시 가버리고 하는 식이지요. 효종이 이런저런 북벌책을 하다하다 결국 한계에 막혀 송시열을 불러 독대했던 게 즉위 9년차였나 그렇습니다. 이때 송시열은
[정유봉사]라는 걸 올립니다.
[봉사]는 조정에 회람하지 말고 당신 혼자만 보라는 비밀상소문입니다. 학계와 정계의 특급 거물도 평생 몇 번 올릴까말까한 상소문입니다. 송시열의 경우는 1649년에 기축봉사를, 8년 뒤인 1657년에 정유봉사를 올린게 전부입니다. 봉사는 굉장히 길고 상세하면서 정치의 큰 그림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두 편의 봉사 역시 그렇습니다. 그런데, 효종 즉위년에 올린 기축봉사와 8년 뒤에 올린 정유봉사의 내용을 보면 느낌이 미세하게 다르다는게 느껴집니다.
일단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군정이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닌데 민심이 더 중요함"
라든가
"양병(養兵)보단 양민(養民)이 먼저....."
라든가
"공주 저택 건설이 너무 화려하지 않음? 사치 노노"
같은 말들이지요
효종이 이런 송시열에게 거의 전권을 위임한지 1년여 만에 급 승하하고
1659년 아들 현종이 즉위합니다.
예송이 일어나고, 양송이 속한 서인이 승리합니다.
그 후론 사실상 오늘날 학자들의 눈에 실질적인 전시체제 정책으로 볼만한 건 없어졌지요.
간간히 군사분야에 신경이나 써주면서 평시정책이 지속됩니다.
3. 윤휴
1674년, 현종의 승하와 숙종의 즉위를 전후하여 다시 예송이 일어나고 이번엔 윤휴를 위시한 남인이 집권하게 됩니다.
그런데, 타이밍이 묘합니다. 삼번의 난이 터진게 1673년 겨울, 그 소식이 처음 조선에 알려진게 이듬해 초입니다. 그리고 이 소식은 조선 집권층 전반을 강타합니다. 여태까지는 북벌이라고 해도 그냥 그런갑다 했는데, 이젠 정말 뭔가 해볼만한 그림이 된 것 같거든요.
숙종 즉위년의 실록을 보면 각지에서 "오랑캐를 정벌할 만하다" 따위의 문구를 넣은 상소가 빗발쳐서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고민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또 "내년 2월 모일이 바로 D-day다" 따위의 루머가 돌고 있어서 사회 각층이 불안해한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이전까지와는 조금 다른 종류의 긴장감이 조선에 감돌기 시작한 거지요.
정말 공교롭게도 때마침 집권한 윤휴는 매우 강경한 북벌론자였습니다. 그가 각잡고 추진한 정책의 면면을 보면
(1) 서울에다가
[도체부]라고, 특수부대 + 사령부 하나 만듭시다. 그리고 내가 사령관.
(2) 서얼을 포함해 모든 양반 자제들을
[총부(摠府)]라는데 몰아넣고 군사훈련 + 사상교육 시킵시다. 그리고 걔들을
[총부랑]이라고 부르구요.
(3) 일본 통해서 대만 정씨세력이랑 연락해서 협공합시다.
(4) 고급 병력이 많이 필요하니 기존 무과에 더해 한 만 명쯤 더 뽑읍시다.
(5) 수레 만듭시다. 기병에는 수레가 짱이라고 책에 나와있음. 한 열 흘이면 1만5천대 정도 만들 수 있겠지요? 그거 몰고 산해관 갑시다.
(6) 군포를 모든 양반가 성인남성에게 다 걷읍시다. 우리 군비 많이 필요함.
(7) 백성 다섯 호구를 하나로 묶어서 이동을 통제하고 배반자를 밀고하는 등의 법이 조문만 있지 실제론 시행 안되고 있는데 그거 시행합시다. 내가 시행세칙 만들께.
(8) 간관들 왕짜증! 반대반대반대... 자기네 당파 대변인들인가봐. 그냥 없애버리죠.
등등입니다.
어휴, 이대로 됐다고 생각해보세요. 계엄령이 따로 없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2번이 가장 놀라웠는데, 말하자면 조선시대판 화랑도 같은 걸 만들고 싶었나봐요.
5번도 참 기가 막힌 일인데, 연애를 책으로 배운다는 말마냥, 이양반이 전쟁을 책으로 배운지라 저런 소리를 했습니다. 그것도 몹시 진지하게 했어요. 조정에서 아무도 안받아줄 낌새를 보이자 "수레야 나야. 안만들면 나 그냥 낙향함"이라고 배수진을 쳤지요. 결국 어르고 달래서 프로토 타입을 어디 관아에서 만들게하고 가져와서 시연해보기도 하고 합니다.
중요한 건 윤휴가 보여준 비현실적인 세부사항들인데요, 열흘 안에 만들자는 것도 놀랍지만, 저 수레가 심지어 소나 말이 아닌 사람이 끄는 수레였고, 바퀴도 하나였습니다.
-_-;;;
1번과 4번, 7번은 모두 실제로 시행됐습니다.
특히 7번이 볼만한데, 현재 우리말 "통, 반"의 통(統)이 저기서 온 말입니다. 당시 정식 명칭은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이었습니다. 이게 국가의 지배력을 사회의 가장 하부구조에까지 확장해서 완전한 통제력을 획득하겠다는 생각이지요. 이렇게되면 그들의 인력/경제력/사상 등 가용자원을 최대한 동원할 수 있을테니까요.
백성을 이렇게 몇 개의 단위로 묶어서 통제력을 확보하고자 하는 시도는 중국 전국시대 때 처음 나타나며, 그 당시 제작된 텍스트인 주례(周禮)와 관자(管子)에 정리되어있습니다. 실제로 이걸 집행한 걸로 유명한 건 진나라 법가 사상가들이지만, 사실은 전국시대 국가들 누구나 채택하고 시행했던 정책이기도 하지요. 그 다음으로 이런 정책으로 유명세를 탄 건 왕안석이구요. 그 다음은 주원장 정도가 되겠네요.
남한 초에도 이러한 "몇 가구를 묶어서 통제하자"류의 아이디어가 남아있었고, 북한은 지금도 잘 시행중입니다.
1680년 초,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다시 권력을 잡으면서 윤휴식의 (국가주의? 군사주의?) 정책이 폐지됐던 건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삼번의 난이 실패로 끝날 것이 거의 확실시된 게 1679년 쯤에 오삼계가 사망하면서부터라는 걸 감안하면, 그의 실각 타이밍과 조선의 정책전환 타이밍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집니다.
이 시점에서, 공식적으로 북벌론은 사멸합니다.
4. 마무으리
대강 조선의 으리남들을 살펴보았는데요, 몇 가지 특징이 눈에 띕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조선 지배층이 과대망상 꼰대들은 아니었다는 거지요.
조선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국제정세의 간을 봐가면서 정권을 교체하고 정책을 선택할 만큼의 기민함이 있었습니다.
북벌의 당위에 대해서 동의하지만 그 슬로건 밑으로 들어가보면 실상 전혀 다른 이야기들 하고 있었다는 것도 관전의 즐거움이 있지요.
마지막으로, 정치사상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모 학자는 왕안석과 소동파의 대립을 연구하면서,
국가권력이 어디까지 침투할 수 있으며 어디를 여백으로 둘것인가에 대해 다툰 것이라고 정리했습니다.
윤휴와 송시열의 대립도 비슷한 시각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간관 같은거 없애버리고 왕에서 통까지 감칠맛나게 통제되는 강한 국가가 사문난적 윤휴의 이상이었다면
송시열을 필두로 하는 주자쟁이들은 마음을 수양한 사대부들의 손에 의한 향촌자치 같은 걸 더 원했던 것 아닐까요.
흠.... 모를 일입니다 :)
(피드백은 사정상 좀 있다가 드리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