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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06 16:15
'사회'를 키워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한편 이 한국땅에서 그 사회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형성될지는 의문스럽습니다. 유럽식의 계급의식에 기반한 공동체든 미국식의, 국가라는 이름이 대변하는 가치에 기반한 공동체든 한국에선 그런 공동체의 형성이 어려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서유럽이나 북유럽의, 이른바 선진국으로 불리는 국가들은 오랜시간의 계급투쟁으로 각 계급간의 연대의식이 기저에 깔려있고 그런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트럭 노동자들의 파업에 불편함을 말하면서도 나 또한 노동자임을 밝히며 그들에게 빵과 커피를 건네는 시민들의 모습과 같은것 말이죠. 미국의 경우는 시작부터가 계급 투쟁에서 벗어나서 떠나온 사람들의 국가고 유럽, 아시아, 남미 등 전세계의 이민자들이 모여있는 국가다 보니 좀 다른 접근법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자유, 민주주의, 인권, 정의 등의 가치와 이를 수호하는 자랑스러운 미국, 국가는 무슨일이 있어도 국민을 책임진다와 같은 이데올로기가 그거죠. 그렇기에 어떤 천재지변이나 테러가 발생하면 미국에선 성조기가 나부끼고 미국인들은 그 아래에서 하나로 뭉칩니다. 그러나 2014년의 대한민국은 어느쪽이든 '사회'를 형성할 의식이 척박해보입니다. 크게는 정규직, 비정규직으로 협력회사, 하청, 파견 등등 갖가지 이름으로 나뉜 노동자들간의 연대의식은 희미하고 외려 다른 노동자의 수준을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이 많습니다. 다 같이 뭉쳐도 원하는 것을 쟁취해낼까 말까 할텐데 '분리하여 통치하라'는 금언이 정말 기가 막히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미국처럼 국가의 이름하에 뭉치기엔 지금까지 대한민국이란 국가가 남긴 불신의 그림자가 너무나 깊습니다. 각자도생의 정글을 벗어나서 사회를 만들기엔 불신의 골이 이미 너무 깊어져 버린게 지금의 한국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14/05/06 17:13
동의합니다. 사실 비슷한 논지의 문단을 썼다가 지웠습니다. 현실은 주먹쥐고휘둘러님이 서술하신 것처럼 가능성을 낙관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죠.
하지만 사실 시야를 좁혀서보면 이미 작은 공동체들과 시민 사회는 존재하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장 속에서 부수적인 생산물을 배출하기도 했습니다. 현 서울시장인 박원순씨 말입니다. 물론 저도 가능성을 낙관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현대사를 봤을때 제 3자의 개입에 의해서 또다시 어렵게 키워왔던 사회의 싹이 짓밟힐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시민들의 결사를 통한 스스로의 문제 해결 외에는 현재 대한민국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이건 가능성의 범주에 갇혀있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4/05/07 16:25
문맥에는 상당히 동의하나 대한민국에도 구심점은 있습니다 북한과 일본 앞에서는 온국민이 일치단결하죠
아직도 동족전과 식민지의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한건 그 둘이 정산된게 아니라 현재이기 때문에 더 쓸쓸한 것이겄죠
14/05/06 17:45
정부와 국가가 엄연히 있는데 사회들의 역할을 강조할 때 제일 먼저 연상되는건 우리나라에선 전민항쟁이나 통일전선전술입니다. 저도 그런데 위에 언급하신 사회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그 문법을 모를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맥락 잡기가 어렵습니다.
예전에 정부대신 사회를 강조한 이유는 식민지라 제국에대해 복무한다는거죠. 이 과정에서 안전도 희생되고요. 식민지 이론을 주장하지 않으면서 사회를 강조 하려면 국가나 정부개혁의 중대한 장애를 먼저 설명해야죠. 크롬웰혁명 실패하고 권력으로부터 영영 멀어진 청교도들이 권력을 잃은 것 돈으로 보상받자고한게 자본주의 운동입니다. 예수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주장한 유니테리언이 하버드와 예일을 오늘날의 대학으로 만드는데 역할이 막대합니다 . 다 소수였고 애초에 자기 공동체의 아젠다를 관철시키는 과정에서 사회도 국가도 변화해왔습니다. 유니테리언이 몇명이나 됩니까. 그렇다고 국가에 기여하기위해 이제부터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자고 할 수는 없죠. 본말이 전도된거죠. 님이 열거한 사회들은 청교도처럼 유니테리언처럼 탄압은 커녕 지원 받습니다. 뭘 더 키우나요.
14/05/06 22:48
이 댓글의 주장 자체에 대해서도 할 말이 없진 않지만, 일단 문장마다 부적절한 표현 같은게 눈에 밟혀서 적절한 형태로 수정을 해보았습니다.
----------------------------------------------------------------------------------------------------------------------------------------- 정부와 국가가 엄연히 있음에도 사회(주1)의 역할을 강조할 때 제일 먼저 연상되는 건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전민항쟁이나 통일전선전술입니다. 저만 해도 그런데 본문에 언급된 분들이 그런 점(주2)을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맥락 잡기가 어렵습니다. 예전에 정부 대신 민족(주3)을 강조한 이유는 식민지 현실에선 정부를 강조하는 것이 식민 제국의 이익이 될 공산이 컸다는 데 있었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의 안전(주4)도 희생되고요. 식민지 현실이란 전제 없이 사회를 강조하려면 국가나 정부를 개혁하는데 그와 유사한 장애가 있음을 먼저 보여야죠. 크롬웰 혁명이 실패하고 권력과 영영 멀어진 청교도들이 권력의 상실을 돈으로 보장받고자 한 데서 자본주의 운동이 비롯되었습니다. 예수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주장한 유니테리언이 하버드와 예일을 오늘날의 명문대로 만든데 역할이 지대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소수 집단이었고, 그럼에도 자신들의 아젠다를 관철시키는 과정에서 사회와 국가를 변화시켰습니다.(주5) 그렇다고 국가에 기여하기 위해 이제부터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자고 할 수는 없죠. 본말이 전도된 것이니까요.(주6) 님이 열거한 사람들(주7)은 청교도나 유니테리언처럼 탄압받기는 커녕 지원받습니다. 뭘 더 키우나요. ---------------------------------------------------------------------------------------------------------------------------------------- 주 1: 사회의, 또는 대중들의, 아니면 사람들의. '사회들'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맥락도 있습니다. 근데 여기선 아닙니다. 주 2: 문법이란 말은 가끔 비유적으로도 쓰입니다. 가령 '에로영화와 외설의 문법' 뭐 이런 식의..그런데 '정부가 있는데도 사회의 역할을 강조할 때 연상되는 바'에 대해서 '문법'이란 말로 수식하는건 적절한 표현이란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주 3: 사실 맨 첫머리의 '예전'이라는게 대체 어느 시절 얘기인지에 따라 '사회'라는 용어가 적절하게 사용된 것인지가 결정되는 대목이었습니다. 식민지 시대, 그러니까 제국 정부와 피지배 식민대중 관계를 다루려는게 이 문단의 핵심이었던 이상 사회가 아니라 '민족'이 적당한 용어입니다. 주 4: 이건 식민지 수탈, 강제 징용 같은 걸 말하려는 의도로 읽혔는데, 그냥 '안전'이라고만 하면 이런 의미가 잘 안 보이게 됩니다. 주 5: '애초에' 라는 표현이 '청교도 등은 단순히 자기 주장을 하려던 것이었을 뿐 국가나 사회를 변혁하려는 의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말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었다면 '원래', '본디' 정도로 쓰는게 맞았습니다. 그리고 뒷 문장을 읽어보건대 아무래도 저런 뜻을 함축하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주 6: '국가에 기여하기 위해 이제부터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자고 할 수는 없다'는 문장은 그대로 읽어선 도저히 뜻을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문장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나머지 부분을 참고해서 해석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이건 '유니태리언이 사회를 발전시켰다고 유니태리언이 한 짓을 반복할 수 없다'는 취지의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 반복할 수 없을까요? 이유야 뭐가 됬건 적누 님 댓글의 가장 중요한 논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 7: 본문에는 도올, 김종엽 등이 등장하고, '대중'이나 '사회'도 등장하지만 '사회들'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단히 부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도올, 김종엽 등을 인용하여 '열거'하고 있지만, 대중이나 사회란 개념은 본문에서 일의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므로 결코 '열거'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열거'란 말 뒤에 올 만한 말은 결국 '본문에 등장한 글쟁이들', 결국 '사람들'이라고밖엔 볼 수 없습니다.
14/05/06 22:53
국가와 정부 개혁의 중대한 장애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쓰지 않았습니다. 적누님이 장애를 느끼지 못하신다면 그것 또한 존중합니다. 그와 관련한 이야기들을 여러가지 나눌 수 있을 거 같네요.
사회가 국가에 대응하기 위하여 일부러 예수의 신성을 부인할 필요는 없죠. 말씀하신 것처럼 그런 방식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는 굳이 국가에 대한 안티 테제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국가와 개인 사이에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의 존재 근거가 국가와의 대립은 아니니까 말입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사회는 국가를 포괄하는 개념이지요. 사회가 국가를 또 하나의 사회로 대자화하는 순간이 국가와 사회의 가장 아름다운 동행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제가 주장하는 논지에 대한 핵심적인 비판 지점은 과연 개인들의 자유로운 결사체들이 가득한 그 사회가 유토피아일 것인가 라고 생각합니다. 주먹쥐고휘둘러님이 지적하셨듯이 (서)유럽과 미국은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사회를 만들어 왔습니다만, 두 사회가 자본에 대해, 혹은 이미지화하고 고도로 집적된 통치 권력에 대해 유의미한 반성을 만들어냈는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굳이 '사대주의'의 문제를 들고오지 않아도 남들이 다 가보고 실패했다고 자인하는 방식들에 대해서, 직접 겪어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치열할 수 없는 짧은 고민만으로 저 방법이 대안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유효한가 라는 문제죠. 글쎄요... 답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식민지를 경유하며 한국은 소위 서구가 경험했던 수백년의 역사를, 몸이 아닌 머리로 수십년만에 살아냈습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어떤 교훈을 취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는 진지하고 객관적인 관찰에 의하지 않고는 정당화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여전히 인간의 유적 속성에 기반하여 가치를 도출하자면, 스스로가 스스로를 구제할 수 있도록 결사하는 것 만큼은 부정당할 수 없지 않을까 정도가 제 사고의 한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에 기반해서 판단했을때 개인들의 결사체로 가득한 그 사회도 유토피아가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뭐 유토피아가 존재한다면 이미 그곳은 유토피아라고 불리울 수 없겠지만요^^;
14/05/06 20:11
저는 이번 사건으로 우리 사회의 제일 큰 타격은 신뢰가 무너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소한의 신뢰인 생명의 중요성이라 생각했는데 그마저도 사라진 것입니다. 생명을 구하는데 경중이 없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젠 이 신뢰를 어떻게 다시 돌릴수 있을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잃어버린 신뢰를 다시 복구할 방법은 요원해 보이기만 합니다.
14/05/06 22:56
동의합니다.
다만, 정확히는 신뢰가 무너진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이제야 서로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는 표현이 적당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고로 중요한 것은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함께 하는 경험들을 쌓아가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애초 존재하지 않지만 있다고 믿어왔던 신뢰라는 것이 종교적 믿음에 불과했음을 인정하고 이제는 만들어내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14/05/06 20:50
솔직히 군부독재가 끝나고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를 시작한게 88년입니다.
우리나라에 88년부터야 자유민주주의가 있었는데 제대로 정립되어있으면 그건 '한강의 기적'에 이은 또 다른 기적일겁니다. 그분들께 죄송스럽긴 하지만 지금 60대 이상의 분들 다수가 민주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행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그분들의 투표율은 높지만 그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이 자유민주의 프레임에 적합하지 않다고나 할까요. 아마 제대로 자리 잡을려면 적어도 80년대 생들이 50대, 60대의 위치에 올라가야 되리라 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저는 딱히 우리나라 국가 수준이 떨어지는 것도 절망적인 것도 아니라 봅니다. 분명 청년층 장년층 다수는 올바른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기도 하구요.
14/05/06 23:02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별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 내용 자체는 크게 틀린 부분이 없지만 결론이 과도하게 비약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막말로 80년대생들이 50대, 60대가 되면 정말로 민주주의적인 사고방식이 사회의 주류가 될 수 있을까요?
사회는 늘/언제나 자신을 '재생산'하고 있습니다. 제가 배운 교과서에서는 '사회화'라는 단어를 사용했지요. 사회는 자신의 규율을 내화한 주체들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습니다. 물론 푸코적인 의미에서 강력한 권력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만, 이 재생산은 계속해서 끊임없이 작동합니다. 사회가 전체주의적인데 그 사회의 구성원이 아무런 영향없이 여전히 민주주의자로 남아있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각 개인들의 생존 전략은 자기가 서 있는 지형에서 다양하게 구성될 수 있겠지만 크게 순응하거나 저항하거나로 정리할 수 있겠죠. 이미 전체주의와 지속적으로 상호작용한 민주주의자는 교과서에서 배운 그대로의 민주주의자로 남아있을 수 있을까요? 애초에 교과서에서 배운 민주주의조차도 그저 박제화한 학술 개념에 불과했는데 말입니다. 김종엽 교수가 자신의 글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매 10년마다 겪는 국가적 재난 앞에서 국가 엘리트들은 능력으로도, 인격적으로도 점점 더 후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간이 지나고 세대 교체가 일어나면 자연스레 좋아질 것이라는 주장은 과연 근거가 있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회의적입니다.
14/05/07 01:09
1.
앞에서 저는 '적어도'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뭐 그 것보다 더 이후가 될 수 있겠죠. 혹은 오히려 내려갈 수도 있고. 그렇지만 제가 말 할 수 있는건 그 것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겁니다. 2. 사회가 재생산'이고 '사회화'가 전부라면 자유민주주의가 주가되는 현 시대는 오지 않았겠지요. 전체주의를 언급하셨는데 전체주의의 색채도 옅어지고 그 것에 당당하게 저항하는 사람들도 많아집니다. 또 본인은 전체주의, 민족주의적 성향이 짙더라도 '다름'을 인정하는 사람도 많구요. 저 또한 여전히 우리나라가 전체주의 민족주의가 짙다는건 인정하지만 과거에 비해선 많이 좋아졌다고 봐요. 3. 국가 엘리트들이 능력적으로 인격적으로 후퇴된다는 말씀은 그 근거가 어떻게 되는지요? 솔직히 말해서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국가 엘리트들의 80%는 그대로일겁니다. 10년은 국가가 변하기엔 짧은 시간입니다. 적어도 제가 볼 때 군중들은 10여년 전 보다 발전했다고 봅니다. 아직 다수는 윗선의 말과 언론의 말, 혹은 근거 없는 페이스북 가계정의 글에 흔들리지만 또 그 것을 바로 잡고 진실을 보려는 사람들의 숫자는 많이 늘었지요. 4. 사회의 '변화'라는 것은 한 순간에 오는 게 아닙니다. 아주 천천히 또 하루하루는 느끼기 힘들만큼 그렇게 변합니다. 그러다가 뒤 돌아보면 어느새 성장해 있고 한거죠.
14/05/06 23:48
김종엽 교수의 글이 참 좋네요. 반면 도올은....ㅠ
사계에 대중적 인지도를 갖춘 인물이 끽해야 도올이나 강신주 정도인데 그들의 글이나 강연을 볼 때 마다 부끄러움은 왜 저의 몫이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글의 논지에 대해 전체적으로 동의합니다. 추천을 가득 받을만한 글이라고 생각해요. 반박이라기 보다는 한 가지 흥미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코멘트 하자면 조선의 성리학 수입과 토착화 과정에 대한 연구가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분야 중 하나인데요 그 이유는 (물론 한 두 가지가 아니겠습니다만) 주로 중국사와 한국사 연구자가 각자 놀고, 또 철학과에서의 연구와 사학과에서의 연구가 각자 따로 놀면서 볼만한 협연을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와중에서 간혹 나오는 자그마한 성과들을 보면 조선의 이데올로그들이 이 [책으로 배운 성리학]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조선에 이식하려고 하는지 다양한 삽질들과 노력들을 볼 수 있죠. 전반적으로 보면 해방 이후 민주주의를 이식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무수한 시행착오와 닮은 구석이 많습니다. 말씀하신 것과 같은 박제화한 학술 개념, 곧 [책으로 배운 민주주의]를 어떻게 실체화하느냐를 놓고 벌어지는 논쟁과 시행착오가 그래요. 나쁠 건 없죠. 이식의 과정에서 늘 생기는 일이고, 이런 [오독]은 본디 새로운 해석이니까요. 다만 그 과정의 복잡성과 특수성에 대한 진지한 연구와 통찰이 없다면 그 긴 시행착오의 과정은 그저 정답(orthodox)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 속에서 만들어지는 마찰(friction) 정도로, 부산물로 취급되고 버려질 가능성이 높아요. 조선 성리학이 그랬던 것처럼요. 마치 한국사 연구자와 중국사 연구자가 협연하지 않고서는 성리학의 이식과정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어려운 것처럼, 서구의 정치문화에 대한 이해 못지 않게 필요한 건 당대의 우리의 정치문화에 대한 이해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가권력의 비대라든가, 사회적 영역의 왜소함이라든가, 전체주의적 문화라든가, 가부장적 위계질서라든가 이런 판단들이 모두 한국의 정치문화에 대한 직감적 판단에서 비롯된 좋은 해석이라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너무 거대하고 불분명하고 때로는 피상적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워요. 통찰의 결과라기보다는, 직관적인 판단. 구체적이고 진지한 [논증]을 만들기 보다는 모두들 그냥 주어진(given) 셈 치고 넘어가거나, 아니면 몇 가지 사례들을 열거하거나 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 같아요. 그 부분이 아쉽구요. 나중에 시간이 나면 이런 것들도 연구해보고 싶네요. 하지만 난 아직 학위가 없잖아? 논문 쓸 시간도 없고 능력도 없고....아마 난 안 될 거야....
14/05/07 00:21
크크크 도올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조금 궁금하기는 했습니다.
말씀하신 내용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동의합니다. 일종의 공리같은 느낌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죠. 게다가 많은 개념들이 자생적인 개념이 아닌 이유로 한국적인 상황에서 사용되는 맥락이 또 미묘하게 비틀리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늘상 생각하는 문제지만 식민지의 경험과 반주변부 라는/였다는 국제정치학적 위상은, 일반적으로 소위 식자층이 빠지게 되는 '제국'의 시선으로 바라보기에 대한 욕망만으로는 정치한 해석을 불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많은 지식인들은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하죠. 그래서 그들의 이론에는 힘이 없고 말입니다. 물론 말씀하신 것처럼 거창한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연구가, 혹은 연구자가 따로 놀 뿐일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다만, 층위가 다른 것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조금 맞지 않는 느낌이 들지만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반으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다가 조금씩 조금씩 소위 한국적 맥락에 맞게 개념 작업을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말씀하신 것 처럼 생경한 것으로 받아들인 상태에서 하나씩 하나씩 내용을 채워가며 개념을 완성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떤 과정을 거치든 자신의 작업에 대한 책임감이 분명하다면 언젠가 어디가에서는 만나게 되지 않을까요^^? 어서 좋은 논문으로 학위 받으시고 하고 싶은 공부 마음껏 하실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저에게도 큰 즐거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14/05/07 19:28
도올 하니까 먼 옛날의 일화가 하나 생각나네요.
혹시 예전에 도올이 상한가 치던 시절 KBS에서 특집으로 도올 vs 추기경 방송을 내보냈던 걸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고 김수환 추기경을 모셔서 도올과 이런저런 대담(?)을 하게 했던 일인데요. 공교롭게도 이 방송 나가고 도올이 급작스럽게 모든 방송계약을 파기한 후 해외로 나가버렸던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뭐 그런 방송입니다. 지금 기억하기로 이래저래 도올이 철저하게 발렸던 것 같은데, 그 중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도올이 자꾸 자기 말을 안듣고 말을 돌리자) 고 김 추기경: 실례지만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도올: 오십 몇 입니다. 추기경: (살짝 웃으면서) 아직 이순(耳順)은 안되셨군요 ^^ 도올: 데꿀멍 뭐 이런식이었죠. 선어록의 한장면을 보는 듯했습니다. 애초에 체급이 다른 매치업이었죠 흐흐.
14/05/07 00:29
열거하신 '국가권력 비대' '사회영역 왜소' '전체주의 문화' '가부장적 질서' 중 정치학에서 '정치문화론'의 문제로 간주하는 건 뒤의 두개로 생각되고(근데 솔직히 한국 정치학에서 '한국 정치문화'에 대한 연구는 매우 빈약합니다;), 전자는 보통 '국가론' 또는 '국가-사회론'의 문제로 다룹니다. 이 분야에선 그래도 최장집 같은 학자들 중심으로 연구가 상당히 축적되어있기는 한데, 여기서는 '수입산 이론'이 지나치게 난무한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이죠.(그러나 그만큼 오랜 시간동안 국가론이 한국 정치학에서 꽤 중요하다면 중요한 주제로 다뤄졌다는 반증도 됩니다.)
14/05/07 17:17
사실 '국가권력 비대'나 '사회영역 왜소' 같은 부분도 저는 정치문화의 한 부분으로 봤습니다. 국가론, 국가-사회론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그냥 제 관심사가 정치문화라서요 -_-;
예컨대, 왜 우리 마누라의 외할머니께서는 "우리는 아직도 좀 독재가 필요해"라고 말씀하실까 하는 의문은 단순히 거시적으로 접근해서 해석할 문제가 아니니까요. 말하자면, 왜 사회보다 국가 영역의 비대화를 우리는 "꿈 꾸었"나 하는 문제죠. 국가론과 좀 더 연결시켜 말하자면 대체 "국가"란 무엇이며 어떠해야하며 어디로 가야하는가에 대한 네러티브를 다들 가지고 있으며, 그 네러티브에 맞추어 현실세계의 각종 사건들과 뉴스들을 수용하고, 그리고 그렇게 해석된 것들이 다시 네러티브를 수정하거나 강화하고..... 그 사람들 하나 하나의 머리속이 궁금해요. 좀 인류학적인 궁금증이랄까요? 이 궁금증이 해결되려면 "일제시대를 겪고 해방 이후 독재정권...전쟁..개발독재.." 이 정도 그림만으론 아마 안 될 거에요. 북한의 역사경험과도 비교해봐야 할 거고, 더 나아가서는 조선말 연구가 필수적일 거고... 더 나아가서는 아마 조선의 정치문화와 백성들의 국가 네러티브 같은게 필요할 거고, 더 나아가서는 의병들을 움직이던 동력이라든가 함경도에서 조선의 왕자들을 제깍 체포해서 왜군에게 넘겨주었던 "조선시대 북방 지역 주민들"의 정치문화도 연구해볼 수 있겠죠. 물론... 전 아직 거기까지 갈 능력이 안 되고 어서 누가 뿅 나타나서 논문 좀 써주면 좋겠네요 -_ㅜ
14/05/07 00:16
본문은 분노에서 출발해 사회를 요청하며 끝납니다. 이에 본문의 내적 맥락에서 '사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봤습니다.
이에 관해 본문에선 3가지 모델이 등장합니다. 물뚝심송의 '책임지는 사회', 도올 김용옥의 '거리 점령', 그리고 김종엽 교수의 '재난 공동체'. '책임지는 사회'가 전형적인 매디슨주의적(자주 '제도주의'라고 불리는)인 시각을 취하는데, 본문에선 대번에 기각됩니다. 본문의 문장을 인용하면 '문제는 우리가 단 한번도 우리의 시스템을 만들고 결정해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그것을 대신하여 제시되는 것들은 '민중의 직감', 그리고 '그 스스로가 선량한 만큼 타자와 세계의 선의에 대해 가진 신뢰' 입니다. 세월호 사태 같은 걸 앞에 두고 '인간의 선량함'이니 '세계의 선의'니 운운하는 것은 솔직히 대단히 근거없는 자신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4월 16일 맹골수도에서 대체 어떤 '세계의 선의'가 발견될까요?) 그런데 본문의 나머지 모든 부분은 그런 '인간에 대한 자신감'을 여러 번 재확인할 뿐입니다. '사회는 이미 있었다'고 반복하며 말하는 대목에서, 그리고 '스스로에게 분노한다'며 끝맺는 대목에서. 글쓴이가 아무리 많은 예시를, 그러니까 '각 정당, 노동조합을 비롯한 생산자 연맹, 각급 학생회 그리고 민변과 민교협 같은 직군별 협회와 새사연, 희망제작소와 같은 싱크탱크, 그리고 아름다운 재단과 민가협, 유가협같은 재난공동체, 1인 미디어와 팟캐스트와 SNS' 같은 것들을 열거한다고 해도 본문의 '대안으로서의 현실성'이 높아지는 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국가나 시장이나 법 앞에서 '현실적'으로 보일 날은 앞으로도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까 차라리 본문이 진짜 빛나는 부분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지독한 믿음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심지어 '세월호의 수백명 피해자들조차도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죽어갔다.' 말 그대로 지독한 믿음일 뿐이고 근거없는 자신감이며, 이 댓글을 그만 접으려는 이 시점까지도 이런 것을 사회의 기초로 삼을 수 있다는 글쓴이의 주장이 잘 와닿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마음 편히 '글쓴이의 주장에 동의는 합니다만, 우리 사회의 현실은 블라블라'라고 쓰는게 더 편한 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 이 글을 읽었던 순간 이 글이 결코 마음편히 비웃어 넘겨선 안될 뭔가를 건드렸다는 뭔지 모를 생각이 들었습니다. 추천 수를 보니 아마 그런 생각이 든게 저 혼자만은 아니었던 듯 한데, 이 댓글은 그 '뭔가'의 정체를 탐구해보려는 과정 자체였습니다.
14/05/07 00:34
꿈보다 빛나는 해석이네요.
사실 글쟁이라는 자기 정체성은 단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지만 endogeneity님 같은 독자를 만나면 그 글쟁이는 행복할 수 밖에 없을 거 같네요. 저는 말을 줄이겠습니다. 빛나는 해석 앞에서 필자는 침묵해야하는 법이라고 배웠습니다. 갑자기 부끄러워지네요.
14/05/07 13:30
적어도 세월호 사건의 피해자들에게는 선의가 있었습니다.
재난 상황에서 각자 살아남기 위해 우왕좌왕하는 것보다 통제 상황에 잘 따르는 것이 원래는 바람직합니다. (통제자가 올바른 대처 방법을 숙지했을 경우) 일반적으로 한국사회에 이런 질서의식을 잘 기대하지 않습니다. 요즘 아이들의 타락을 욕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아이들은 통제를 잘 따랐습니다. 또한 마지막 탈출 순간까지도 어린 아이를 먼저 대피시키고 자신의 구명조끼를 내주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박지영씨는 끝까지 긴급상황에서 자리를 떠나지 앉고 자기 맡은 일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공동체 질서유지와 타인을 위한 행동과 자기자리를 끝까지 지키는 행동을 선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아직 사회화가 덜 진행된 사람들이였다는 점입니다. 박지영씨도 정식직원이 아닌 사회 초년생 수준의 알바였습니다. 반면에 먼저 탈출한 선원들은 해상이라는 곳에 가장 적응을 잘한 사람들이였고요. 사회화가 잘 된 사람은 선의가 없고 사회화가 덜 된 사람은 선의에 따라 행동하였으므로 인간본연의 특성에 선의가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조과정 또한 언딘과 해경은 기업과 정부러눈 제도권 세력들이고 생명구조보다 이권을 위해서 상황통제를 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반면에 민간잠수부들 중 다수가 자신의 사비를 털어서 봉사를 하러 왔습니다. 제도권 세력보다 시민사회가 선의를 더 잘 실행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 이번 세월호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장해서 말하면 국가의 목적중에 선의는 사라지고 이익추구만 남아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국가는 사회가 예상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제도를 만들 수 밖에 없습니다. 아직 자연스러운 시민사회에는 선의라는 것이 남아 있기때문에 이러한 선의가 제도권으로도 전해져서 올바른 국가제도가 정착되길 바라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위에서 부터 누군가 파악해서 제도를 고치는 것이 아닌 시민사회의 선의를 시민이 직접 제도권화 시키기 위해서는 분노하고 거리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14/05/07 15:35
첫번째 글에서도 저보다 더 잘 제 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던 것 기억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이야기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4/05/07 17:15
제 생각과 비슷한 논지의 글을 발견하여 추가합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35600.html '단속사회'라는 책을 펴낸 사회학자 엄기호씨와의 세월호 사태에 관한 인터뷰입니다. 애도와 미담 만을 강제하는 분위기에서 벗어나서 나홀로 하는 애도에 갇히지 말고 애도의 공간과 시간을 통해 신뢰의 공동체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사퇴만 부각되는 면피용 책임 시스템이나 소통이 불가능한 정치에 대한 이야기에서 자연스럽게 사회의 회복을 위한 공동체 만들기로 이야기를 이끌고 있습니다. 쉽게 읽으실 수 있을 듯 합니다. 조금 흥미로운 부분은 세월호 사태에서 드러난 재난의 계급적 성격에 대한 지적입니다. (이미 PGR21에서는 Acecracker님이 조선일보와 한겨레를 대비하여 보여준 적이 있는 내용입니다만) 이제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각자도생의 시대이며, 재난은 모든 사회구성원이 동일하게 겪는 것이 아니라는 두가지 사실을 조합하면 이제 우리나라가 소득보다 재산으로, 능력보다 아버지를 기반으로 생존투쟁을 벌여야하는 사회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는 지적입니다. 누구 말마따나 '미개'한 사회죠. 요 근래에 초히트하고 있는 피케티의 책과 관련하여 흥미롭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입니다. 여러가지 의미에서 제가 쓴 글보다는 편하게 읽으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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