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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4/23 15:07
쉽게 클릭하고 읽다가 내용이 눈으로 흘겨 읽을만한 건 아닌거 같아 다음에 보려고 일단 댓글 남기고 갑니다;;
신문에 기고한 칼럼 느낌이네요.
14/04/23 15:20
다들 애쓰고 있는 것이죠. 기억을 남기기 위해서.
누군가는 수학여행을 탓하고, 누군가는 선장을 욕하고, 구호 시스템을, 사회 경제적 시스템을, 정부에게 책임을 돌리는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사건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기억하고 싶어하고 있습니다. 이런 슬픔의 재발을 방지 하기 위한 기억은 무엇일지, 그런 기억이 남겨지길 바랍니다.
14/04/30 23:24
기억을 남기는 것만큼이나 어떠한 기억을 남기는가 정말 중요한 일이죠.
저 역시도 그에 대한 고민이 있고, 앞으로도 꾸준히 신경써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14/04/23 15:33
인간은 무력합니다.
단지 자신의 삶은 그렇지 않다고 믿으며 치열하게 살아온 대한민국이 이번사태를 통해 또다른 자괴감에 빠진거라고 봐요. 인간의 힘의 한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14/04/30 23:25
네. 이러한 거대한 재앙 앞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를 실감하고는 하는듯 합니다.
문제는 한계 인식에 멈춰서 회의주의로 빠질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희망을 볼 것인가의 차이이지 않나 싶습니다.
14/04/23 15:38
3년쯤 전에 한겨레에서 이런 글귀를 본 적이 있습니다. 다행히도 노트에 적어두었었군요.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소금창고에 대해 말한 것은 이런 아름다움들 때문이지만, 언젠가부터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는 것이 마음 불편해졌지. "나무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 그 많은 범죄행위에 관해 침묵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 거의 범죄처럼 취급받는 이 시대는 도대체 어떤 시대란 말이냐!" 이를테면 브레히트의 이런 구절이 가시처럼 아프기 때문. 과연 그런 시대이기 때문 그러니 우리가, 반년 동안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 채 거리에서 울부짖고 있는 용산 참사 유가족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무슨 소금창고 같은 것에 대해 말한다면, 이것은 범죄가 되는 것일까. 쉽게 부인해버리는 것이야말로 범죄가 될 테니 일단은 그렇다고 해야겠네. 그렇지만 끝내 그렇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도 해야지. 좋은 시가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아름답게 말할 때, 그것은 지금 이 세계가 충분히 아름답다는 뜻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들이 이 세계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뜻이므로 본문의 맥락과는 조금 다른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나온 말이 예술의 가치에 대한 옹호라면, Naomi님께서는 예술가의 사회적 감수성에 주목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사회의 균열을 가장 먼저 포착하고, 문학으로 자신의 메세지를 전하는 사람들. 우리나라에서는 일제강점기라든지, 7~80년대 유신정권 시기에 시대에 대한 저항으로 시와 소설을 택했던 이들이 포함될 수 있겠네요. 사실 저도 사회의 모순을 지적하고 변화에 대한 동력을 일으키는 것이, 예술가의 진정한 사회적 책임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노래하는 것은, 진정 아름다운 것들이 이 세계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뜻이므로'라는 말은, 좋은 말이고 맞는 말이지만, 그냥 받아들이기엔 좀 찜찜한 구석이 있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14/04/30 23:31
글의 전체 맥락은 "재앙 이후에 어떻게 삶이라는 것을 지탱해 낼 수 있을까"하는 문제였지만, 그 문제에 대답에 있어서 저는 문학적 서사에 기대고 있고, Everlas님이 제 글을 재앙과 고통 속에서 예술의 가치로 읽으셨다면 글 기저에 있는 제가 가지고 있는 위치를 잘 포착하셨다 생각합니다.
예술과 사회적 책임의 대한 문제는 아마도 끊임없이 이야기 되고 고민되는 지점이라 생각합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사실 위 작품보다도 <죽음의 푸가>를 가지고 이야기하면 좋은 부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학살을 그려내면서도 아름다운 시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파울 첼란이라는 시인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나 다름 없지요. 혹시 기회가 되면 읽어보시길 추천해드립니다. 감사합니다.
14/04/23 15:52
언젠가 그런때도 있었지 라고 말할 때가 오겠지요.. 잊혀질지도 모르구요.. 어떤 사람들에겐. 직접적인 피해자에겐 영원한 상처로 남겠고.. 다른 사람들에겐 한 날의 해프닝정도로 끝나겠지요.. 시체... 라고 해야하나요. 사람들이 모두 돌아오면 그때 애도를 맺어야겠습니다. 한 번도 찾은 적없던 제가 믿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뉴스를 볼때 마다 찾게 되네요. "오 주여..." 라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말하곤 합니다. 정말 슬픈날입니다... 좋은 글 잘 읽고갑니다..
14/04/30 23:34
랜슬롯님의 글을 읽으면서 저만이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습니다.
여전히 세월호의 고통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서, 앞으로의 삶의 조그마한 위로랄지, 희망을 가지고 싶다는 마음으로 써 보았던 글인데 어찌 읽으셨을지 모르겠네요. 감정은 점차 희미해 지겠지만, 모두와 함께 기억 속에서 이 순간들을 지워버리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14/04/30 23:38
남겨 주신 댓글들에 이제서야 댓글을 달게되어서 송구하기 짝이 없습니다.
저 역시도 무거운 마음으로 쓴 글이기에, 진중한 마음으로 대응하고 싶어 미뤄두다 이제서야 댓글을 씁니다. 읽어주신 분들, 댓글을 남겨주신 분들께 감사한 마음입니다. 한 가지 수정해야 할 부분이, 인용된 파울 첼란의 시가 [누구도 아닌 자의 장미]가 아니라 [찬미가]였다는 걸 최근에 다시 책을 찾아보면서 확인했습니다. 안그래도 조금 햇갈렸었는데, 인터넷에서 인용을 하다보니 이러한 착오가 생겼었네요.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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