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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3/17 04:25
"최고의 왕"이라는 기준이 나라를 잘다스렸다, 혹은 백성을 편안하게 한 "명군"이 아니라면 진시황이죠. 진시황이 없었다면 지금의 중국은 없었을 테니까요.
13/03/17 04:41
중국역사 잘 모르겠지만 저들 못지 않게 한무제도 나름 언급이 잘 되는편인데(인지도) 실제 평가는 저 위에 나와 명군 or 성군들에 비해 미치지 못하는가봐요?
13/03/17 04:50
한무제는 한문제 한경제의 문경지치로 인한 태평성대를 박살낸 인물로 평가되고 있지요
세종대왕은 “대체로 인간이란 처음에는 부지런하다가도 나중에는 게을러진다. 아무리 강직한 사람이라도 마침내는 해이해지기 쉽다. 임금이란 부지런하고 검소해야 정치를 잘할 수 있다. 문제와 경제는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성공하였으나, 무제는 방종하고 지나친 욕심을 부렸기 때문에 실패하였다.” 라고 했습니다.
13/03/17 06:52
건륭제도 마찬가지로 간지는 최곤데 실속이
할애비 애비가 쌓아올린 부를 맘껏 쓰다가 죽은 황제 세계 역사상 가장 행복한 군주 아니였는가 마 그래봅니다.
13/03/17 18:35
진황한무가 딱 들어맞는다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진시황처럼 한무제도 이룬건 많지만 과욕을 부려 잃은 것도 많죠.
한나라가 진나라보다 훨씬 견실한 국가였고 막판에 자기정책에 대한 반성 및 사후대비를 잘해놔서 한나라가 유지된 거죠. 실제로 후세에 '진시황은 결국 나라를 멸망시켰는데 왜 한무제는 비슷한 정책을 펴고도 나라를 멸망시키지 않았을까' 하는 분석글이 종종 눈에 띌 정도죠.
13/03/17 05:11
최고의 황제가 있던 시대의 양민이라고 해도 지금 시민보다야 훨 못할거 같은데요;;
뭐 기술발전이 똑같다고 쳐도 그 시대의 양민은.... 안습;;
13/03/17 07:06
요즘이 아무리 살기 팍팍하다, 빈부격차 심하다고 해도 저런 태평성대 시절보다도 훨씬 살기 좋은 세상이니깐요... 다만 그때는 애초에 오르지도 못 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않았으니 안분자족하고 살았던 거지만. 무지를 방패삼아 행복을 얻고 싶다면 지금도 히키코모리로 편안하고 즐겁게 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13/03/17 05:11
전 옹정제요. 전제군주제와 독재체제가 만들어낼 수 있는 극한의 선을 실천한 군주 - 평가가 멋있네요.
그런데 실제 중국인들은 누구를 최고로 뽑을까요? 우리나라면 세종대왕이 뽑힐거 같은데.. 궁금하네요.
13/03/17 07:00
그래도 폭정 말년 뻘짓 감안해도 역시나 진시황이
중국통일 그리고 2000년 이상 유지된 군현제 각종도량통일등등 진시황이 중국사에 끼친 영향은 비교대상이 없다고 봅니다.
13/03/17 08:01
그런데 실제로 제갈량이 조식과 키배를 뜬 적이 있기는 하다. 조식이 광무제의 사적을 예로 들며 광무제의 운태28장은 한 고조 유방의 한신, 팽월, 영포, 소하, 장량 같은 인물에 미치지 못한다는 논설을 폈는데, 제갈량이 거기에 반박하여 주장하기를, "한고조는 재능에 부족함이 있어 신하들이 스스로 활약할 여지가 있었으나, 광무제는 너무 뛰어나서 운태 28장이 드러나지 않은 것 뿐이다."라고 한 것이다.
라고 하네요.
13/03/17 08:36
강희-옹정제는 세트로 묶어서 보는 게 좋습니다. 강희-옹정-건륭제에 대해서 저희 교수님은 강희제가 닦아놓은 걸 옹정제가 빛내고 건륭제가 시원하게 말아먹었다고... 크크
옹정제는 즉위과정의 의문을 제외하면 정말 저게 사람인지 괴물인지 알 수 없는 완벽의 경지인지라... -_-;;; 워낙 워커홀릭이었던 점도 있고, 선제인 강희제가 워낙 오랫동안 살아있던 관계로 늦은 나이에 즉위해서 제위는 10년 남짓밖에 되지 않는 게 단점이랄까요. 강희-옹정시기가 내정, 외교, 경제, 학문 전 분야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가 아닐까 싶네요. 이 동네는 워낙에 스케일이 커서 명군으로 꼽히던 부견같은 사람도 한순간에 망하고... 미스테리합니다 크크
13/03/17 08:49
일반 중국 역사 개설서에 보면 강희 - 옹정 - 건륭의 120년을 같이 묶는데.. 건륭제가 여기에 묶이는 것은 앞의 두 황제에 대한 모욕이라고 보여집니다..크크
아무리 생각해도 건륭제는 한무제와 비교를 해서 누가 더 시원하게 말아 드셨나를 비교해 보아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13/03/17 12:20
오래갈정도가 아니었죠
당나라가 생길수가 없었을겁니다. 수문제는 등극을 위해 북제 우문씨인가요 그들을 철저히 탄압 거의 씨를 말리다 시피한것 외에는 정말 훌륭한 군주라는 사람입니다. 그의 최고위업과 또한 존경할점은 지독하다 싶을 정도의 청렴성과 절약이라고 합니다. 모든것은 백성에게서 나온것 백성이 나라를 이끌라고 내온 세를 어찌 낭비하리 검약해야하고 나의 후계라면 마땅히 이나를 본받아 검약해야 한다하고 라는 유명한 말까지 남겼다고 하죠 검약하지 않기에 장남이었던 태자를 갈아치우기 까지 한 사람입니다. (이게 유일한 패착 근검절약을 자신처럼 하고있다고 본 아들 수양제야 말로 진짜 천하의 막장이었는데 아들의 연기에 완전히 속아넘어갔으니) 수가 양제시절 대운하라는 엄청난 대공사에 장성재건,황도이전,그리고 고구려와의 전쟁을 모두 일으킬수 있었던것은 바로 아버지 문제의 근검절약으로 비축된 국고덕분이었다고 할정도입니다.
13/03/17 18:37
수문제 시기의 대부흥이 얼마나 대단하냐면, 당나라는 수문제 수준의 경제력을 '비단과 금을 분토처럼 여긴' 당현종 천보 초엽 연간에나 겨우겨우 따라잡습니다.
13/03/17 12:10
당태종이 과연 명군인가에서 현대 중국사가쪽은 여전히 미지수쪽이 있다고 하지요
너무 조작의 냄새가 심한 당태종 치세에 대한의문 예로 위의 문구중 자신을 죽이려고 한 형과 동생을 먼저쳤다고하는 것부터가 대표적 조작의 사례라고 하죠 이세민이 당건국에 최고의 공훈을 세웠기에 아버지 고조는 이세민을 이미 장남에게 내린 태자지위를 줄수도 없고 해서 천책상장이라는 애매모호한 지위를 주면서 이세민을 달랬다고 할정도로 이세민은 노골적으로 왕위를 넘봤고 결국 자기가 쿠데타를 일으켜 형,동생을 죽이고 아버지를 유폐시켰다는건 이젠 사실이라고 합니다. 이세민에 대해 아주 박한 점수를 준 어떤 중국사가는 당고조의 최대실수는 이세민을 죽이지 않은거다 아들한명을 죽이지 않음으로써 그는 결국 두명의 아들과 7명의 손자를 잃었다라고 한문제도 과연 칭송만 받을왕인가에 대해선 의문이라고 합니다. 한문제의 사실상 현실을 도피한 국방-흉노정책은 무려 백년간 중국 변방백성을 지옥으로 몰고간 원인이라는 평도 적지않다고 합니다. 매년 되풀이되는 새외유목민족에 의한 변경지역의 약탈. 황폐화. 그로인해 발생한 대규모 난민 ...이문제에 있어서 한문제의 방관 한무제가 결국 이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이때의 상처가 경제때도 해결안되고 외형적으론 한나라는 굉장히 번성하고 태평한것으로 보였지만 오히력 이것이 더 융성할수있었던 한의 발목을 잡고 무제시절의 경제적 위기를 가지고오는 주범이었다로 굉장히 박하게 평가하는 학자도 있더군요 후한 광무제와 송태조 조광윤은 쌍벽이라고 하더군요 흔히 토사구팽이라는 말을 완벽하게 시전했던 한고조 유방이나 명 태조 홍무제와는 너무도 다른 이 두황제의 위업은 그냥 이렇게 밖에 설명이 안된다고 하더군요 "왕이 넘사벽이기에 신하들이 그냥 깨깽할수 밖에 없었다" 황제가 너무도 뛰어나 신하들 그누구도 감히 범접할수 없기에 그걸로 그냥 끝 하다못해 조광조가 이만하고 그냥들 쉬는게 어떻소 나이도 들었는데 하니 죄다 눈물만 흘리고 어이쿠 그러문요 했다는 일화는 넘유명하죠
13/03/17 12:28
제가 중 고등학교때 세계사를 배울때 학교 선생님이 자신의 생각에 강희 옹정 이때가 중국의 레알 리즈시절이었던 식으로 들었던 기억에
이 두명의 치세가 짱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데... 넘사벽인 사람들이 너무 많군요
13/03/17 12:46
한국에 워낙 독보적인 왕이있어서 아무래도 다른나라 왕랭킹은 매기기가 힘든면이 있죠
마 좋은 왕이면 백성도 잘살게 하고 땅도 좀 늘리고 과학기술도 발전시키고 책도 몇권 쓰면서 심심할때 종종 글자도 하나 개발해야되는거 아니겠습니까? 후덜덜
13/03/17 12:52
옹정제 하면 생각나는 건 이거 하나밖에 없네요.
[옹정황제의 여인(후궁 견환전)] 저희 어머니께서 최근에 가장 재미있게 보신 중드입니다.;;;;
13/03/17 13:48
강희제와 옹정제가 최고죠..
강희제가 황제에 올랐을 무렵..왕권은 약했고. 지방에는 명나라 잔존세력들이 남아 있었죠. 이 모든것을 다 해결하고도 치세를 확립했으니깐요. 옹정제는 서양사에서보면..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비슷하죠. 철저한 인사검증과 내치 .
13/03/17 14:18
사실 중국이랑 유럽이랑 땅 크기는 큰 차이 안나는걸로 알고 있는데 중국도 통일 왕조가 아니라 유럽처럼 여러 나라로 갈라져서 서로 싸우고 경쟁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면 세계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13/03/17 14:46
세계사는 몰라도 최소한 우리나라는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겠죠.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우리나라와 중국의 국력은 워낙에 넘사벽으로 차이나는지라 어떻게 뻗어나갈 여지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으니까요.
13/03/17 14:56
그러기에 진시황에 대해선 넘사벽,번외급이라고 하는겁니다.
진시황이 진짜 악정을 행했냐 하는문제에서도 역사가는 고개를 갸웃합니다. 결국 통일진나라는 단명했고 흔이 중국왕계를 표할때 진-한,수-당이라는 말을 쓰는게 두개의 정권은 사실하나나 다름없기때문인데 이점에서 진시황의 진은 자리를 이은 한에 의해 필요이상으로 폄하되었고 조작적인 덮어쓰기로 더럽혀진 냄새가 강하다는 거죠 자기정권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전임정권을 악으로 모는 일은 흔하기에(예로 고려가 궁예정권을 비난하고 궁예의 의문시되는 추한죽음) 결국 이모든걸 감안하고 평가해야하는 어려움이 있는데 적어도 땅속에서 나온 유물은 과연 진시황이 포악하고 문란했냐 그리고 사치에 방탕했냐에서 모두 물음표를 넘어 아니다에 가깝다는 거죠 그리고 중국이 통일왕조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오히려 중국의 문화,문명은 더발전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군요 유럽이 유럽으로 발전한것은 로마멸망후 고맘고만한 국가끼리 끝임없이 치고받으면 서로가 서로에게 자극이 되고 분발하게된 동기를 부여했다는 건데 중국이 유럽혹은 인도차이나 반도마냥 갈라졌다면 동북아시아는 더 발전됬을 가능성이 있었다는군요
13/03/17 21:58
현대 중국 사학계야말로 정치적 성향에 따른 주관적 시각을 개입하여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것을 무시하고 바라본다면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뭣보다도 통일 진나라의 붕괴는 농민봉기에 의해서였고 이는 진의 강압적이고 과시적인 정책 남발로 촉발된 것이며 이는 진시황에 의해 실시된 것입니다. 진시황이 문란하고 방탕했다 하는 기록은 애초에 찾아볼 수 없는데도 마치 그것 때문에 비판받은 것처럼 종종 이야기되는데, 이건 좀 아닙니다.
그리고 통일의 무의미성 같은 IF론은 솔직히 따질 가치도 없다 봅니다. 지리부터 해서 사회적 특성 밑 중심지의 이동까지, 서구와 중국은 완전히 다른데 그걸 통일성 유지 여부만으로 따지는 건 애초에 논리부터 성립되지 않지요.
13/03/17 16:28
러시아는 표트르대제이전까지 유럽하고는 거의 단절된 사회입니다.
거의 유럽이라 볼수없고 오히려 몽골의 영향을 많이 받아 아시아적 요소가 짓었던 사회입니다. 표트르대제이후 빠르게 유럽화가 됬고 특히 독일 출신인 예카트리나 여제가 등극하면서 러시아는 문화, 사회적으로 완전히 유럽화 되었지만 강력한 전제군주 같은 제도적인면은 여전히 아시아적이엿죠
13/03/17 19:03
그렇다면 티베트 이쪽도 중국의 영토로 넣는건 곤란하겠죠. 티베트가 중국 역사에 편입된게 청 강희제때가 최초였으니까요
티베트를 포함한 지금의 중국대륙의 영토를 중국 영토로 본다면 그게 1700년이니 이때는 우랄산맥 이전의 러시아는 유럽의 영토로 봐줘야죠. 청나라 시대의 러시아는 분명 유럽역사의 한축을 담당하던 나라이니까요
13/03/17 19:38
맞는 얘기입니다. 마찬가지로 유럽도 메인스트림은 지금 우리가 파악하는 구도보다는 꽤 좁았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북유럽이나 동유럽, 남유럽에서 좀 따로 놀거나, 다른 민족에게 침공당하거나 하는 식의 경우가 많았어서.. 생산능력 차원에서든, 중국문화가 영향을 미친 주변국까지 감안할 때, 실질적으로 중국의 규모는 분명히 유럽 이상이었다고 봐야 맞다고 봅니다.
13/03/17 20:13
그리고 영향을 미친 주변국을 감안한다고 하면
예전 유럽은 북아프리카도 하나의 유럽 영향권이라고 봐야하겠죠 그냥 지중해 자체가 옛 유럽의 활동영역이었으니까요.. 서로마 멸망후에는 동로마제국이 소아시아와 발칸 반도 까지 영향력을 미쳤고...
13/03/17 20:26
오히려 이베리아나 동유럽, 북아프리카는 이슬람 쪽 영향력이 더 강했습니다. 유럽에 편입된 건 근대 들어서죠. 유럽의 영향력이란 것도 그 시대엔 변변치 못했죠. 로마시절은 유럽이란 말도 무의미한 시대고..
13/03/17 14:48
저는 주원장도 굉장히 좋은 황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백성의 입장에서만.......관료의 입장에선...-_-공포의 대마왕...
최고의 황제는 한문제라고 생각되고 그 뒤를 이어 광무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광무제의 유일한 약점이라면 그가 토사구팽하지 않은 (정확히는 할필요가 없었죠 광무제는..) 호족들이 시간이 좀 더 흘러 외척이 되고 그 외척이 전횡을 일삼자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환관을 등용하고 그것이 당고의 금 -> 황건적의 난 -> 십상시의 난 -> 삼국시대 로 이어지게 된 1차적인 원인이라...(물론 이건 광무제도 생각할수가 없었고 그 당시엔 생각할수조차 없었긴합니다만...안타까워서 웬지 T_T)
13/03/17 14:50
아 그리고 강희제와 옹정제도 정말 넘사벽이죠
강희제야 ; 한족중심의 중국에서조차 중국 최고의 황제라고 칭송할 정도고 (강희제 이전엔 당태종을 최고라 치다가 강희제 이후론 강희제로 친다 하더군요) 옹정제는 정말 내치에 있어서 최고의 황제였죠.. 둘다 이야기거리도 많은게 특징이네요 흐흐
13/03/17 15:25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데 상대적으로 원나라시기에는 정벌군주을 제외한 명군 또는 성군이라고 부를 만한 왕이 있었나요? 아니면 한족이 아니라 평가절하 하는건가요?
13/03/17 15:28
명군은 있을지언정 성군은 없었다고 보는게 맞을지도 모르죠
칭기즈칸이나 쿠빌라이칸이나 군사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겨서 몽골의 영웅(특히 칭기즈칸)이라 할만합니다만....그닥 성군이라 불리울 수는 없는거 같아요
13/03/17 16:04
테무르 황제는 명군으로 불리는 인물입니다.
묘호는 성종인데 쿠빌라이이후 원제국시기 가장 훌륭한 군주로 평가받고 있더군요 문제는 재위기간이 좀길어야 했는데 1294에서 1307년이란 13년이란 약간 짧은기간이라는게 아쉽다고 하지요 쿠빌라이의 손자인데 원제국은 이 능력있는 황제이후 모두 2류급 인물만 주구장창 황위에 올랐다는게 문제이죠 그리고 중국역사상 한족이 아니라 평가절하는 되는 가장 대표적인 군주가 5호 16국(중국은 이게 민족 차별적용어라해서 동진16국시대로 표시합니다.)의 서막을 알리고 서진멸망시키고 그당시 일자무식에 국가체계에 대한 인식,지식 사상도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흉노족을 이끌며 최초의 이민족국가를 세운 전조의 유연이란 군주가 있습니다. 어느정도냐면 중국역사가가 오직 조조에게만 붙여졌던 초세의 걸물이라는 평가어를 조조외에 붙여준 유일한 인물로 그당시 그런세상에서 어째서 이런 인물이 왜 한지가 아닌 흉노의 땅에서 태어났는가라며 한탄케한 인물입니다.
13/03/17 16:14
강희제 이전에는 무조건 당태종이지만 강희제가 나타나면서 강희제로 끝났죠
소수민족이 다수의 한족을 효과적으로 다룰수 있는것만으로 이야기가 끝난거죠 영락제를 최고의 황제 대열에 끼기에는 그의 행적이나 내치가 너무 초라합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의 세조에 가까웠는데 조카찬탈과정에서부터 너무 피를 많이 흘렸고 10족을 멸한 유일무이한 황제입니다. 무엇보다도 영락제 최대 실책은 주원장이 죽여놓은 환관세력들을 다시 살려 놨죠 즉 과거를 통해 선발된 관료출신들을 믿지 못하여 자기의 최측근들하고 밀실 정치를 행하였습니다. 최측근중에 환관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죠 (그 유명한 정화도 환관이고요)훗날 명나라가 저무는 이유가 되고요 다행이 아들하고 손자는 잘둬서 아들 손자대에는 태평성세를 이루었죠 강희제 같은 경우에도 흠집이 있는데 자신의 큰아들과 권력다툼 끝에 큰아들을 죽여 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인조 영조와 비슷하죠
13/03/17 16:38
영락제, 한무제와 반대로 한문제하고 송태종은 내치에 강했지만 외치에 약했던 황제입니다
한문제 깃털티라노님이 말씀 해주신것 처럼 흉노족하고 관계에서 그렇고 송태종은 한문제보다 더 심하죠 거란, 서하, 대월(지금 베트남) 이민족 정벌 할때마다 대패하고 농락당합니다. 덕분에 송나라는 중국역사상 가장 호구인 통일왕조가 되어버립니다.
13/03/17 18:31
국궁진췌 사이후이(몸을 굽혀 모든 힘을 다한 후에야 비로소 그만둔다.)
제갈량이 후출사표에서 쓰고, 강희가 마음 속에 새긴 말인데, 전자는 신하고, 후자는 만인지상의 황제라는 점... 강희제가 갑 오브 갑이라고 봅니다.
13/03/17 19:56
옹정제 평가로는 그냥 군주제의 왕조에서 나올 수 있는
궁극의 군주라는 평가가 많죠. 군주제에서 가장 철인에 가까운 군주가 아닐까 봅니다. 중국사 통털어서 현대까지 포함 관리들 부정부패가 가장 없었던 시기였다고 하니
13/03/17 21:53
찾아보니 강희제는 61년
옹정제는 13년 건륭제는 60년 재위에 있었네요. 참 오래도 살았음..; 특히 건륭제는 자신이 할아버지의 재위기간을 넘을 수는 없다고 해서 황제자리 물려주고 태상황제로 4년 더 실권을 잡고 있었다고 하네요.
13/03/18 13:09
지금도 한 해에 사형을 당하는 숫자를 정확히 추산 할 수 없는 중국인데, 전제군주 시기에 한 해에 1억명이 넘는 인구를 통치하면서도 17명이라는 경이적인 사형수 숫자를 기록한 강희제가 정말 대단한 황제인거죠. 흔히 말하는 '천고일제' 라는 표현이 정말 아깝지 않은 대단한 황제라고 생각합니다. 광무제도 대단한 황제이긴 하지만, 강희제는 어린 나이에서부터 황실의 권력 암투와 반란을 이겨냈다는 점에서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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