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편에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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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 착한 사람 컴플렉스 때문이다 – 라고 한 줄 변명을 읊으려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까. 생각해보자. 정말 얼빵해 보이는 여자가, 내내 호감을 표시하더니, 일 그만 두고 무작정 넘어오겠다고 한다면, “자꾸 곤란하게 굴지 마시고 그러지 마세요” 라고 매몰차게 말 할 수 있는 남자가 몇이나 될까. 돌직구가 어렵다면 헛스윙을 유도하는 변화구를 던질 수 밖에. 그러나 이 미련한A는 이제 그만 타석에서 내려와 달라는 간절한 사인을 못알아 처먹는, 몸 쪽으로 날아간 변화구를 데드볼로 이용하는 백치미가 있는 여자였다. 암만 현실을 설명을 하면 뭘해, 내 말은 듣지도 않고 결론부터 강조하기 바쁜데. 집이 없다, 일이 없다, 사는 재미가 없다 라고 강조에 강조를 거듭해도A가 하는 말이라고는 이게 다였다.
“그럼 도와주시면 되죠!! ^^ 잘 될꺼에요!!”
내가 너를 왜 돕냐고…… 나도 나를 못 돕고 있는데…… 라고 말을 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온 몸이 묶인 채로 줄다리기를 하는 듯한 상황에서A는 급히 전화를 원했다. 사연인 즉슨, 다른 지역에 좋은 일자리가 있는데 거기로 갈 지 아니면 애초에 선언한 대로 내가 있는 곳으로 올 지 참 고민이 된다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속이 훤히 보이는 밀당도 있나 싶어서 나는 중립적 입지에서 한 발자욱도 움직이지 않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좋다 싶은 쪽으로 선택하시면 되죠. 알아서 하세요. 살짝 실망했는지 이제는 또 다른 쪽으로 줄을 당겨본다. 그리고 이것 역시도 속이 훤히 보여서 난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그래도 제가 꺼낸 말이 있는데, 가기로 약속 했으니까 역시 가야 하는 게 도리 상 맞는 것 같아서요. 잠깐만, 난 약속을 한 기억도, 받은 기억도 없어…. 존경하는 재판장님, 지금 피고는 위증을 하고 있습니다, 기각을 요청합니다.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상황극을 외면하면서, 혼자서 널뛰고 재주 넘는A에게 난 애써 웃음을 참고, 예의를 차려 정중히 말했다. 저 신경 쓰지 마시고, 좋은 쪽으로 선택하시면 됩니다. 전에도 말 했다 시피, 여기는 확실한 게 하나도 없거든요.
그리고 두 시간 뒤 전화가 왔다. 그리고 나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미는 게 안되니까 이번에는 이렇게 쎄게 당기는 구나 싶어서. 격앙된 목소리로 나에게 터트린 A의 발언은 다음과 같았다.
“ 아 그러니까 2인 1실 같이 쓸 거에요 안 쓸 거에요? 쓴다고 하면 전 가고, 안 쓰면 전 못 가요!!”
이것은 시트콤인가 로맨틱 코메디인가 멜로인가 스릴러인가…..
태어나서 관심없는 여자한테 집착이란 것도 다 받아보고. 아 진짜 웃기다. 혹시 지금이 내 전성기? 이 여자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지 알고 하는 건가 싶어 되물었더니 그럴싸 하지도 않은 말로 또 왜 2인1실을 나와 공유해야 하는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낯선 지역에서 아는 사람끼리 같이 돕고 살면 좋잖아요, 그리고 전 지금 모모씨가 거기 있어서 가는 건데, 방을 같이 안 쓰면 저한테는 가는 의미가 없어요, 자꾸 방을 못 구할 수도 있다, 방을 구했다가 다른 데로 옮겨야 하는 상황에 다른 집에서 각자 살아야 한다, 부정적인 의견만 늘어놓으시는데, 아무튼 그렇게 일만 찾고 다른 사람은 모르겠다, 그런 식으로 하실 거면 전 못가요!
극적 과장이 없는 순도 99%의 대화 내용을 발췌하였다. 쓰고 있는 나조차도 웃음이 나올 정도로. 써놓고 보니 내가 좀 와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애걸복걸한 뉘앙스인데, 난 오라고는 맹세코 한 번도 말 하지 않았다. 안 오라고도 안 했지만….
웃음을 멈추고 난 뒤, 이건 좀 안되겠는데 싶어 나는 약간 찬바람을 넣은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나만의 영업용 목소리가 있다, 주로 일 할 때 사장님한테 쓰는, 낮고 또박또박 말하는 짜가 뵨사마 목소리) 안 오시는 게 낫겠습니다. 제가A씨의 인생을 책임질 수있는 것도 아니고, A씨가 무슨 기대를 하는 지는 모르겠는데, 전 그런 기대 충족시켜 줄만한 사람도 안됩니다. 그리고 오라고 하기에는 여기는 모든 조건이 너무 불확실하니 지금 제의 받은 일자리로 선택하시는 게 낫겠네요.
일반적인 이야기의 흐름이라면 여기서 상대방은 보통 울먹울먹 하며 주인공의 우유부단함을 자극했겠지만, 현실은 확실히 다른 게, A는 조금 풀이 죽은 목소리로 그런가요 하고 너무나 미약한 최후의 단말마를 남긴 후 안 오는 걸로 이야기를 정리하고 전화를 끊었다. 진작에 이럴 것을, 하고 나는 어딘가 시원섭섭함을 느끼고 있었다. 난 지금 인기남 로드의 한 지점을 통과했어, 윤아 너 거기 그대로 있어 하고 뿌듯해하며 숙소에 들어와 잠이 들었고 그 다음날 저녁A에게서 전화가 왔다. 저 갈게요. 비행기 표 끊어주세요. 카드 번호 드릴께요.
점프 강킥 + 근접 강손+↓↘→약손 의 3히트 콤보 작렬!! 나는 스턴에 걸릴 뻔 했다. 반전의 충격, 뻔뻔함의 충격, 순진함의 충격으로. 뭘 믿고 여기 온다는 것인지, 뭘 믿고 나한테 저런 부탁을 하는 것인지, 뭘 믿고 나한테 카드 번호를 냅다 맡기는 것인지. 동시에 이런 사람들이 사짜들한테 돈을 헌납하는 구나… 하고 약육강식 세계의 먹이 사슬 분포도가 머릿속에 펼쳐졌다. 이 여자 미쳤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나는 좀 앞뒤가 안맞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이러다 내가 사기꾼이면 어쩔려고 카드 번호를 준다는 이야기를 하냐고. 그리고 진짜 남의 비행기 표 끊어주는 시다바리 짓을 하기도 싫었고A가 오는 것도 무지 귀찮아졌다. 그러더니 한 술 더 떠서 이 여자는 나에게 무다무다 한 것을 요구해왔다. 주문 안된다는 메뉴에 곱빼기를 시키는 격으로다가 아니에요, 전 모모씨 믿어요. 그리고 저 갈 때 딱 들어갈 수있는 2인 1실 좀 알아봐 주세요. 하며 피니쉬 어택을 날렸다. 이건 스턴이 아니라 KO 수준이다.
일단 오라고 해놓고 때릴까? 커피 식기도 전에? 심장 터져버리겠네….. 말춤 추고 싶은 이 심정.
그래 모르겠다 네 마음대로 해라 하고 나는 속으로 지지를 외쳤다. 이 참에 나도 돈이 없으니 일단 이 여자를 자금원으로 이용하자… 새로운 지역에서 정착하기에는 너무 적은 돈을 들고 와서 부모님에게 당장 지원을 요청하기가 좀 많이, 상당히 그랬던 나는 그럼 단기 쉐어 쓸 돈 좀 빌려주세요, 제가 방은 알아볼게요 하고 좋은 게 좋은 거 – 라는 모호한 문구를 속으로 중얼댔다. 내가 오라고 한 것도 아니고, 이게A가 말한 서로 돕는 상황 아닌가? 나도 내 마음대로 할 테다 낄낄낄 난 마침내 상황을 즐기기 시작했다. 너가 원한 게 이런 거야? 일단 돈 좀 꿔주라고~ 원하는 대로 해줄 테니~ 유세윤이 강림한 얼굴로 난 상부상조를 약속했다. 그래도 집 알아보러 다니는데 진짜 짜증나고 귀찮아서 집 하나만 본 뒤에 거기서 일단 단기로 머무르기로 했다. 그리고 비행기 표 끊는데도 짜증나 죽는 줄 알았다. 구글에 검색만 하면 나오는데 왜 이걸 못한다고 나한테 해주라고 그러지? 빨리 왔으면 좋겠다. 원샷 헤드샷으로 때려버리게.
알프레드 노릇에 지친 나는 마침내 다가온 대면의 시간에도 쓴 웃음 한번 짓고 픽업 차량을 타고 냅다 쉐어 하우스로 향했다. 얼마나 짜증나는 상황이 터질지도 모르고.
여기까지 쓰다보니 상당히 로맨틱 코메디 같이 됐는데요, 전혀 그런 글 아니구요 뒤에서 호박씨 까는 판춘문예 글이에요. 작가님들 존경합니다…. 글이 마음대로 흘러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