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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8/07 23:46:40
Name 때보아빠
Subject [일반] [일상]짧은 인연
폭염과 올림픽으로 잠 못 드는 밤이 계속되는 여름밤입니다.
여느 때와 같이 출근을 하기 위해 아침에 일어났고, 밤사이 올림픽 메달소식을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을 눌렀습니다. 3통의 부재중 전화와 1통의 문자. 문자내용은 ‘왜 전화 안 받냐. xxx 죽었어. 다른 사람한테도 연락해라’

제가 그녀를 알게 된 것은 3년 전입니다. 그녀는 제가 근무했던 직장을 다니다 악성뇌종양으로 그만 두었고, 몇 달이 지나 그 자리에 제가 입사를 했습니다. 저희 팀에 전에 아파서 그만둔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가끔 들었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그녀를 그리워 하는 듯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리석게도 ‘내가 지금 입사해서 이런저런 일을 많이 하고 있고, 그녀 보다 못하지 않은데 왜 내 앞에서 자꾸 예전 사람 얘기를 할까‘라고 속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렇게 1년여의 시간이 흐른 뒤 몸이 많이 좋아진 그녀가 다시 출근 한다는 얘기가 들여 왔습니다. 정식직원은 아니고, 1주일에 2번 정도 나와서 제품 개발을 하고 성과에 따라 보수를 받는 일종의 프리랜서 같은 개념이었습니다. 그동안 말로만 들었던 그녀를 직접 본다는 생각에 왠지 모를 기대감과 설레임이 있었습니다. 많이 건강해 졌다고는 하나 그녀의 첫인상은 창백한 얼굴과 가느다란 팔다리, 수술로 인해 짧게 자른 머리카락 등 언뜻 봐도 약해 보였습니다. 그녀는 짧은 머리를 가리기 위해 항상 모자를 쓰고 출근 하였고, 꼭 실험복을 챙겨 입고 일을 하였습니다. 처음엔 같이 근무하는 것이 어색하기도 했지만 착하고 둥글둥글한 성격의 그녀와 농담도 하고 모르는 것도 물어 가며 금새 가깝게 지냈고, 그녀가 나오는 날을 기다리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같이 근무할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담당 품목 개발이 끝났고, 또 그녀도 더 하고 싶지 않다며 대학원에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시작해, 다음해 봄이 될 무렵 그만 두만 두었으니 채 4개월이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만 둘 무렵 머리카락이 많이 자랐다고 중학생 소녀처럼 좋아 했고, 저는 속으로 ‘그래도 짧은데’ 라고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한동안 전화를 해 안부를 묻기도 하고, 문자로 인사를 했지만 이런 연락조차 제가 퇴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뜸해지게 되었고, 1년 전 마지막 문자를 보냈던 기억과 함께 저의 일상에서 잊혀져 갔습니다.  

오늘 하루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서울의 모병원 장례식장 홈페이지에서 고인의 이름을 확인하였고, 찾아가는 길도 미리 알아 두었습니다. 그리고 퇴근 후 아직 열기가 식지 않은 도심의 길을 따라 장례식장으로 향했습니다.
영정사진속 그녀의 모습은 저와 함께 일하던 그때의 모습으로, 옅은 미소를 띄고 있었습니다. 순간 머리카락이 많이 자랐다고 좋아 하던 기억이 스쳐지나 갔습니다. 그리고 진짜 떠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공부 잘 하는 딸이었고, 남에게 못된 짓도 하지 않았던 사람이었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사람이었는데..

그녀를 좋아 하거나 특별한 감정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녀를 잘 알지 못할 때 혼자 질투 했던 기억이 미안해 더 잘 해주고 싶었고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어쩌면 별거 아닌 인연입니다. 오래 안 것도 아니고, 함께한 시간이 길지도 않았으니.
하지만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 할 것 같았습니다.

서른넷 짧은 생을 살다간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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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깎이
12/08/07 23:48
수정 아이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세상은 참 불공평해요.
La Vie En Rose
12/08/08 04:47
수정 아이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두둔발
12/08/08 08:45
수정 아이콘
젊은 나이에 알고 있던 사람을 잃는다는 건 정신적으로 충격에 가깝고 허망한 생각과 공허함까지 밀려들더군요.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글쓴님의 애도가 마음에 와 닿는 글입니다.
제네식
12/08/08 14:54
수정 아이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2/08/08 15:33
수정 아이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2/08/09 12:53
수정 아이콘
좋은 곳 있겠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2/10/08 15:25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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