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말에 온몸이 발가벗겨진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역시,
그녀가 날 철저히 간파하고 그녀의 말이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이중성.
그것도 심히 뒤틀리고 모순된,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인정하기 싫었던, 애써 부정하고 있었던 나의 단면.
남에게 보이는 나와 내 자신이 보는 나 사이의 간극은 '사람이라면 누구나'라는 수식어로 변명하기에는 조금 더 넓고 커 보인다.
언제부터 그렇게 돼버린걸까. 타인의 존재를 인식함과 동시에?
나의 가장 오래된 관찰자인 어머니는, 언제나 객관적이고 냉정한 평가를 주셨다. 넌 이기적인 놈이라고.
그랬다. 유년의 나였음에도 좋지 않은 어감이 주는 반발심을 가지는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객관화가 되어 있었다.
인정하기 싫지만서도, 결국 나는 내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구슬려도 지가 편한 옷만 입고, 알겠다고 해놓고서도 하고 싶은 데로 해버리는 그런 애였다.
남들의 시선보다는 내 자신의 가치관과 판단을 고집하곤 했다.
사춘기를 건너고 어른으로 향하는 과장에서, 점점 외부의 자극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타인의 평가.
그것은 그간 내가 받았던 수치화되어 나오는 학업의 성취도나, 그럴싸한 말만 늘어놓은 상장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나'라는 인간에 대한, 내가 아닌 다른 개인의, 집단의 생각.
나이를 먹을수록, 상대하는 사람의 숫자가 늘어갈수록 그것에 대한 나의 연연도 강해졌다.
'정말로 나는 누군가의, 그리고 내 자신의 애정의 대상이 될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
내 자신이 특별하거나 중심 또는 주류라고 생각했던 적이 없던 나였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괜찮은 녀석, 쓸만한 놈이 되어 있었다. 괜찮은 외모에 머리좋은 친구가 되어 있었다.
누군가의 친교 상대이고 누군가에겐 사랑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날 향한' 나 혼자만의 사랑으로는 흔들리고 무너지기 쉬운 자존감을 타인의 평가가, 호감이, 애정이 붙들어주었다.
대립하고 모순되기 시작하는 나의 두 성질.
나는 '나의' 나를 '타인이 보는' 나 안에 감추기 시작했다. 부끄럽지만 타인이 보는 나라는 껍데기는 거짓과 미화 투성이었다.
진정한 내 자신보다는 그것을 포장하고, 나의 동경과 일반론을 내 자신인양 연기하려 했다.
꽤나 그럴듯한 행세와 스스로를 속이는 감정노동은 나에 대한 좋은 평과 호감을 지속시켜 주었다.
내가 간과하고 있던 것은 스스로를 내보이고 싶어하는 '나'의 열망정도.
진정으로 내것이 아니기에 실상은 약하고 허술했던 껍데기 사이로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내보내곤 했다.
불완전하고, 미숙하고, 열등하지만, 온전히 나인 나를.
700일을 나와 함께한 그녀는, 어떻게 보면 필연적으로 나의 이중성을 찾아내고 지적하였다.
아니 찾아내주고 지적해주었는지도.
그리고 깨닫는다. 지속할수도, 지속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서툴고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나라는 것을.
진실함만으로도 모순된 껍데기와 포장으로 싸여진 나보다 크다는 것을.
돌이켜보면 그녀와의 관계를 굳건히 했던 것은 자존심을 버린 솔직함이었고,
내가 가장 환하게 빛나던 곳은 거리낌없이 내 자신을 내보일 수 있는 친구들 곁이었다.
내가 아닌 내가 바란 누군가를 연기하는 것은 너무나 미련한 짓이었다.
결국 난 스로를 못나고 모자라다고 여기고 있었을 뿐. 지금껏 내가 생각했던 스스로에 대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내가 되련다.
진정 스스로를 사랑하고, 그런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