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학교 2학년때. 학교 점심시간에 담임선생님에 의해서 외할머니의 부고를 들었다. 헐레벌떡 뛰어오셔서는 평소의 엄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빨리 짐을 챙겨 집으로 가보라는 선생님의 얼굴은 아직도 선명하다. 그때는 그랬다. 왠지 오후수업을 듣지 않아도 되는구나- 하는 바보같은 감정. 집에 갔더니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미 까만 옷을 입고 준비하고 계셨다. 교복을 벗으려는 나에게 그냥 가자며, 몇가지 옷가지만 챙겨서는 어린 동생을 데리고 외할머니댁으로 내려갔다. 불편하다고 불평을 하려던 찰나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어머니의 눈을 보고는 도로 꿀꺽 삼켰다. 처음이었다. 엄마의 그런 모습은.
외할머니는 어릴 때 거의 날 키워주셨었다. 그런데 기억은 차곡차곡 쌓여서 잊혀지는 법일까. 어쩐지 외할머니의 장례 내내, 나는 슬프지 않았다. 전통장례는 특히 시끌벅적하게 고기를 굽고 노는듯한 분위기였던 만큼, 실컷 먹고 놀았던 기억이 난다. 그저, 외숙모들과 외삼촌들. 어머니의 통곡소리는 멈추지 않았던 것 같다. 시끄러움과 울음소리가 함께 어우러지는 그 곳에서, 나는 죽음이라는 것을 전혀 실감하지 못했다. 지금도 후회하는게 있다면, 날 키워준 외할머니의 앞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 외할머니는 왠일로 온 가족에게 전화를 돌리며, 보고싶다고 하셨다. 시골에서 새벽같이 일어나 정정히 마당을 쓰시고 소 여물을 끓이던 외할머니. 언제나 허허로이 웃으며 바쁜데 뭘 내려오냐던 외할머니. 그런 외할머니가, 화라고는 낼 줄 모르던 그 분이, 늙어서도 굽어짐 없는 등으로 선선히 웃음짓던 그 분이, 직접 전화로 보고싶다며 가족들을 불렀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가족들 처럼 바쁘다는 핑계로 내려가지 않았다. 고작 차로 두시간이면 가는 거리였는데. 결국, 외할머니는 언제나처럼 새벽에 비질을 하시고, 아침식사를 절반쯤 드신 뒤, 아랫목에 앉아 커피를 반잔쯤 남긴 채, 조용히 피곤하다며 누우신 후 웃음을 지우지 않으신 채 그렇게 홀로 떠나셨다.
어머니는 가끔 잠자리에서 어머니의 엄마를 찾았다. 나는 그 모습이 어린마음에 생소하고 불편했다. 어머니는 한동안 습관처럼, 그때 시간내서 얼굴 한 번 못 뵌것에 대해 자신을 탓했다. 어릴 때 막내딸이라고 서울로 유학까지 보내며, 앞으로 여자들도 사회생활을 할 꺼라고, 너는 잘 배워야 한다며 묵묵히 시골에서 뒷바라지를 해주던 엄마의 어머니. 엄마는 그렇게 가끔 꿈 속에서 딸이 되었다. 때로는 어린이가, 때로는 어른이 되어서 엄마의 엄마를 찾았다. 그리고는 잠꼬대처럼, 차라리 아프다 가셨으면 가는 모습이라도 볼 수 있었을 거라며 조용히 흐느꼈다. 아버지나 나는 그저, 숨죽인 채 자는 것처럼 듣는 것 밖엔 할 수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외할머니가 정말 이젠 없구나. 하고 느꼈다. 죽음이라는건, 이렇게 여러 사람의 가슴 한켠을 떼어 도망가는 거라고. 몰래 야밤에 들어오고 나가는 도둑님처럼, 사람들 가슴을 도려내어 도망간다고. 그래서, 그 메꿔지지 않는 상처난 가슴에 한 바가지의 눈물과 슬픔을 쏟아부어야, 겨우 흉터가 생기는 거라고. 그 때서야 비로소, 외할머니가 가신 길에 뒤늦게 눈물 한방울을 흘려보낼 수 있었다.
#2
슬퍼해야할 일이 하나. 속죄해야 할 일이 하나.
그럴사람이 아니라는 것 쯤은 알고있었다.
바보같을 정도로 성실하고, 책임감 넘치고, 가끔 어설펐어도 최선을 다하려고 했던 사람.
한심하고 못난 나는, 며칠도 그 사람을 믿지 못한 것이다.
계속 보아온 그 사람의 모습은 믿지 못하고
남들의 세치 혀에 홀로 슬픔에 잠겨서는.
그렇게 그 사람을 못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무슨 일이 있기를 바랬다. 그래. 그래서 웃는 얼굴로 보지 않기를 바랬다.
그런데, 정말로 웃는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이런걸 바란게 아니었다.
이런게.
그 사람은 가끔 자기 가족이야기를 해 주었다.
첫째인 자기에게는 아무것도 안해주면서, 둘째한테는 지극정성인 엄마의 이야기를.
자기는 잘 되도 엄마한테 아무것도 안해줄꺼라고 툴툴대는 그 사람.
참 서투른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열심이었다. 일년에 쉬는날이라고는 열흘도 채 안되는 사람. 명절들 다 반납하면서 일하는 사람.
밤 늦게까지 일하며 사는 사람. 그런 그녀를 엄마는 유독 걱정했나보다. 언제나 공무원이나 준비하라며 다그쳤다고 한다.
그 엄마의 그 딸인지, 어쩜 그리 서투른걸까.
그런 그녀가 드디어 결실을 맺은 것 같다. 나에게만 조용히 그걸 말해주어서 너무 기뻤다.
며칠만 있으면 계약서를 체결하니까, 그러면 확실해 지니까.
기대도 안했었다는 그녀는 너무나 기뻐보였다.
그렇게 열심히 해 온 결실이니까.
그리고 아마, 이제는 당당하게 나도 열심히 하고 있다고, 서툴게 말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리고 그렇게 훌쩍 떠나셨다.
진짜 며칠 남지 않았는데.
누가 서투른 엄마와 딸이 아니랄까봐.
대체 무슨 급한일이 있었는지.
그렇게 그 사람은 투덜댈 사람을 한명 잃었다.
잘 되도 아무것도 안해줄 사람을 한명 잃었다.
나 열심히 하고 있다고. 걱정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을 한 명 잃었다.
오래간만에 온 연락은 슬픈 이야기 하나, 사과 하나. 그리고 부탁 하나였다.
무슨 일이 있기를 바라던 마음에 무언가가 쿵 하고 떨어졌다.
그렇게 힘든일앞에서도 연락 못해 미안하다며 말하는 사람에게
바쁜거 아는데 일 걱정에 잘 부탁한다는 그 사람에게
아무 말도 이을 수 없었다.
글 나부랭이를 쓰면서
좋은 문장을 찾아가면서
누군가가 나의 글에 대해 칭찬해 주어서.
나는 위로의 한마디를 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힘내라는 한 마디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뻔하고 흔한 그 한 마디를 결국 입에올려야 하는 내가 싫었다.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할까.
내가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이야.
웃는 얼굴이 보기싫다고했지만
이렇게 잔인하게 데려갈 수 있나 싶었다.
어째서 꼭 이렇게 사람들 가슴 한켠을 눈치도 못챌 정도로 빠르고, 크게 도려가냐아.
그 사람도 이제는 꿈에서 밖에 전할 수 없게 되었다.
나 잘 하고 있다고. 열심히 하고 있다고.
서투르게 말할 수 있는 기회라고는
잠꼬대 밖에 남지 않았다.
도려낸 가슴 한켠에 얼마만큼의 눈물을 부어야 할지
그 먹먹함이 견딜 수 없었다.
나는 떠나간 그 분의 이름도, 얼굴도 모른다.
그리고 그 분이 좋아하는 술의 이름도 모른다.
아무 사이도 아닌 아는 사람인 그 사람의 슬픔을 나누고 싶건만
그 슬픔에 다가서는 방법도 모른다.
그저,
가시는 길이 부디 편안하기를 바라며.
남 몰래 소주 한잔을 담아 헌배하련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소서.
좋은 곳으로 가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