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0여 년 전이다. 내가 갓 PGR에 가입한지 얼마 안 돼서 눈팅이나 하며 살 때다. 일 끝나고 pc방에 들어가서, 마이큐브배 스타리그 임요환과 도진광의 경기에 대한 분석을 보려고 게시판에 글이 언제쯤 올라오나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맞은편 자리에 한 피지알러가 앉아서 임요환과 도진광의 경기에 대한 분석글을 쓰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빨리 이 명승부에 대한 분석글을 보고 싶었던 내가 그 피지알러에게 가서
“아이고, 반갑습니다. 피지알 하시는군요. 혹시 분석글 좀 빨리 써 주실 수 없으십니까?”
했더니,
“분석글 하나 빨리 써서 뭐하겠소. 급하거든 스갤이나 가시구려.”
라는 것이 아닌가.
대단히 무뚝뚝한 피지알러였다. 내 돈 주고 써달라고 한 것도 아니니 별 수 없어 잘 쓰기나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분석글을 썼다. 처음에는 빨리 쓰는 것 같더니, PC방 정액이 끝나도록 이리 돌려 보고 저리 돌려 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쓰고 있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올려 달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pc방 정액 끝나면 낼 돈도 없는데... 갑갑하고 지루하고 초조할 지경이었다.
“더 고치지 않아도 좋으니 그만 올려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이 되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아니, 보는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고친단 말이오? 당신, 솔로구먼. pc방 정액 끝나간다니까요.”
피지알러는 퉁명스럽게,
“스갤이나 가시우. 난 글 안 쓸라우.”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못 볼 수도 없고, 스갤가봤자 이상한 짤방들이나 보게 될 것 같아,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써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글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글이란 제대로 써야지, 쓰다가 대충 올리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쓰던 것을 메모장에 옮겨놓고 태연스럽게 TV로 바둑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메모장에 있던 글을 이리저리 옮겨 복붙해보더니 다 됐다고 글을 올린다. 사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글이다.
정액제가 끝나고 집에 가서 리뷰를 봐야되는 사정이 된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분석글 올리는거 보면 커플이 될 턱이 없다. 분명 연애할때도 여자생각 안 하고 제 멋대로일 거다. 그래 가지고 스갤 무시하기는. 피지알러들이 다 쏠로인 이유가 있었어!’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피지알러는 태연히 고개를 숙이고 헌터 무한맵에서 캐리어를 뽑고 있었다. 그 때, 캐리어를 뽑는 피지알러의 모습이 어딘지 스덕같아 보였다. 어설픈 컨트롤과 넘쳐나는 자원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피지알러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減殺)된 셈이다.
집에 왔더니 여친은 완전 훌륭한 리뷰글이 올라왔다며 야단이다. 스갤에 올라온 글들에 비해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이나 저 글이나 다 그게 그거 같아 보였다. 그런데 여친의 설명을 들어 보니, 사진이며 스샷을 첨부한 빈도, 분석글에 포토샵을 이용하여 적절하게 포인트를 표시하는 요령, 그리고 시간대와 남는 자원에 서로의 심리까지 이렇게 제대로 분석한 분석글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요렇게 제대로 된 분석글은 좀체로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피지알러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엣날부터 내려오는 피지알 불판은 한 번 만들때마다 기존 양식에 새로운 데이터를 첨부하고 사람들이 지루하지 않게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하며 이쁜 짤방을 첨부하는 등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새 감모여재같은 사람이 만든 불판은 어디서 복붙해서 내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불판손님 또한 찾아오지 않는다. 예전에는 자게에 글을 쓸 때 한글이나 워드를 키고 글을 쓴 다음 인쇄해서 퇴고하고 다시 고치고 맞춤법 검사까지 수차례 반복하곤 했다. 이것을 피지알 글쓰기 버튼의 무거움이라 한다. 물론 날짜가 걸린다. 그러나 요새는 CTRL+C/CTRL+V를 써서 직접 인터넷 기사를 복붙인다. 금방 쓸 수 있다. 그러나 읽을 내용이 없고 글이 가볍다. 그렇지만 요새 남이 제대로 글 보지도 않고 댓글달 것을 며칠씩 걸려 가며 수정해 올릴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다.
댓글만 해도 그렇다. 옛날에는 댓글을 달 때도 누구누구님을 꼬박꼬박 붙여가며 서로 비꼰다고 해도 격식을 지켜가며 얘기를 하는것이 관습이었다. 물론 댓글에 누구누구님이라는 호칭을 써야한다는 규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커뮤니티 내 분위기가 그랬던 것이다. 존중이다. 지금은 그런 말조차 없다. 계층형 댓글이 달려서 누가 누구에게 말하는지 뻔히 아는데 굳이 이쁘지도 않은 상대방에게 누구누구님이라고 존칭 붙여가며 댓글을 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예전 PGR은 사람들이 비꼴때는 비꼬더라도, 댓글을 다는 그 순간만은 오직 아름다운 댓글을 만든다는 그것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스스로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순수하게 심혈을 기울여 판님과 같은 훌륭한 댓글러들이 탄생했었다.
이 분석글도 그런 심정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 피지알러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연애를 해 먹는담.’ 하던 말은 ‘그런 피지알러가 나 같은 커플에게 멸시와 증오를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리뷰가 탄생할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 피지알러를 찾아가서 라면에 콜라라도 대접하며 로템 2:2라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그 다음 일요일에 지난번 갔던 PC방에 들러 그 피지알러를 찾았다. 그러나 그 피지알러가 앉았던 자리에 그는 있지 아니했다. 나는 그 피지알러가 앉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스타를 키고 그가 했던 무한헌터를 시작했다. 맵핵이 자동으로 켜진다. 아, 그 때 그 피지알러가 맵핵을 쓰고 있었구나. 어쩐지 모든 맵이 훤하게 밝혀져있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나는 무심히 ‘야 세르게이, 작은 고추의 매운 맛을 보여주마.' 라는 홍진호의 싯구를 읊었다.
오늘 친구집에 놀러갔더니 친구가 PGR에 분란글을 올리고 있다. 전에 PGR에 올라왔던 수많은 명문들이 떠오른다. 스타소설을 본지도 참 오래다. 요새는 판님의 댓글도 볼 수가 없다. 하드코어 질럿러쉬니 사우론 저그니 하는 추억을 자극하는 단어들도 들은지 오래다. 문득 10년전 PGR에 분석글을 올리던 피지알러의 모습이 떠오른다.
* 출처는 본인이며, 패러디 이외의 다른 의도는 없음을 미리 밝혀둡니다. 수타페글을 읽다보니 패러디가 하고 싶어져서...
* 라벤더님에 의해서 유머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3-09-23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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