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회용 라이터를 두 개 샀다는 것만 빼면 평범한 하루였다. 평범하게 불면증에 시달렸고, 평범하게 쓰레기같은 음식점에서 애인과 밥을 먹었다. 평범하게 매니큐어를 새로 발랐고, 평범하게 출근했다. 근 한달간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신경이 곤두선 덕에 <라이터를 두 개 샀다>는 사소한 사실이 가게를 청소하기 전까지 내내 나를 괴롭혔다. 혹여나 자살하게 되면 유서에 '하루에 라이터를 두 개씩 사는 머저리와는 연을 끊는 것이 정의롭다' 라고 쓸 참이었다. 스피커의 볼륨을 최대로 높히고 펜쥴럼을 들으며 가게를 청소했다. 두통에는 역시 펜잘이지 펜쥴럼이 아니로군. 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담배를 피우고. 간판을 켰다. 건너편 가게의 유리창으로 bar TILT, 의 간판이 점등된다. 후. 평범한 하루가 되겠군.
조금 피곤한 얼굴로 홀로 바에 앉아 있었다. 출판사에 다니는 손님이 왔다.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뭘 마실래. 책밥 먹는 양반답게 헤밍웨이는 어때. 하며 첫 잔으로 다이키리를 추천했다. 다이키리를 마시고, 이어 그린 티 피즈를 마시며, 그는 올 겨울에 집에 위스키나 한 병 사둘까 하는데, 발베니와 올드파 슈피리어 중에 무엇이 괜찮을 지 고민하고 있었다. 글쎄. 나라면 올드파 슈피리어인데. 위스키를 병째로 사 집에 둔다는 건, 역시 혼자 마시겠다는 거잖아. 발베니는 계집애들이나 오랜 친구들을 데리고 좋은 바에서 편하게 마시라고. 방구석에서 혼자 씹는 고독에 어울리는 건 역시 올드파 아닐까. 그런 말을 나눴다. 사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살아 있는 자에게 술은 무엇이 되었건 즐거운 일이고, 죽은 사람은 술을 못 마신다.
죽은 사람은 술을 못 마신다. 이를테면 내가 몇년 전에 잠깐 일했던 바의 사장 누나는 자살해버린 덕에 이제 술을 못 마신다. 작년에 자살한 내 친구도 마찬가지다. 가끔은 산 사람들도 술을 못 마신다. 중증의 알콜중독으로 고생하다가 꽤 긴 재활 치료를 받고 다시는 술을 입에 대지 않는 내 친구도 술을 못 마신다. 아니 못 마셨었다. 그 친구는 다행히 모든 것을 해결하고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뭐, 요즘 마시는 꼴을 보아하니 가까운 미래에 또 술을 끊거나 손목을 끊거나 인생을 끊을 것 같기도 하지마는. 그리고 산 사람은 술을 마신다. 나처럼. 당신처럼. 산다는 건 좋은 것이다. 죽은 남자는 술을 못 먹으니까.
그리고 죽은 남자가 바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 뭐야. 잠깐만. 어.
엄밀히는 죽은 사람은 아니다. 죽은 사람은 바의 문을 열 수 없다. 바 틸트가 되었건 바 레몬하트가 되었건. 살아 있어야 문을 열고 술도 먹고 하지. 하지만 그는 죽은 사람 쪽에 가까웠다. 오픈 초기의 단골이었다. 여자 친구와 자주 왔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여자 친구 혼자 왔다. 헤어졌나. 싶었다. 바 안쪽에서 바 바깥의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걸 하루 이틀 보는 게 아니니 별 감흥은 없었다. 어느 날엔가, 그의 여자 친구가 혼자 와서 글렌리벳 한 병을 시켰다. 오늘은 글렌리벳 한 병 가격에 상당하는 연애 상담을 준비해야겠군, 이라고 생각하며 잔을 두 개 준비하고 같이 마셨다. 그녀가 말했다. 그 사람, 시한부래요. 얼마 전에 쓰러져서 응급실 갔었는데. 장기 이상으로 죽는데요. 올해 못 넘길 확률이 20프로인가. 5년 못 넘길 확률이 한자릿수라나. 술도 못 먹고, 소금도 못 먹고. 담배도 못 피고.
그리고 언젠가부터 둘 다 볼 수 없었다. 평범한 정도의 상상력을 가진 평범한 정도의 바텐더가 생각할 수 있는 건 남자는 죽었겠고 여자는 이제 못 오겠군, 정도였다. 그게 2년 전 일이었나. 2년이면 뭐, 뒈졌겠지. 사람이 뒈지는 데는 2초면 충분하잖아. 부음이 들려오진 않았으나 일반적으로 누가 뒈졌다고 해서 그 사람의 단골 바의 바텐더에게 부음을 전하지는 않으니.
그렇게 내 마음속에서 죽은 남자가 바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2년 만에.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을까. 남자를 꽉 안아주는 데 그닥 취미가 있는 편은 아니지만 이쯤 되면 취향을 고려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손님을 안으면 안 되지, 라는 바텐더의 직업 윤리마저도 잠깐 제껴둘 수 있는 상황이다. 꼭 끌어안고, '뭐야. 살아 있었네. 안 뒈졌냐.' 라고 인사했다. 여러 가지로 부적절하지만 여러 가지로 적절하다. 죽은 사람이 살아돌아 왔는데 적절함과 부적절함이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리고 별 의미 없는 이야기들을 나눴다. 뒈진 줄 알았는데. 살아 있었네. 평범한 날인 줄 알았는데 비범한 날이로군. 수술이 잘 끝나고, 계속 재활을 하다가, 두어달 쯤 전부터 술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마음껏 욕했다. 뭐 씨발. 지금 술 먹은지 두 달이 되어가는데 오늘에서야 나타났다고? 그렇게 벌 받을 짓을 하고 다니니 시한부 딱지나 받지. 정말 마음껏 욕했던 것 같다. 개새끼네 뭐네 하면서. '야 임마. 형한테 욕하면 안되 임마' 라는 그의 준엄한 꾸짖음에도 불구하고. 형이고 나발이고 뭔 상관이란 말인가. 죽은 사람이 살아돌아왔는데. 죽은 사람은 욕할 수 없지만 산 사람은 욕해도 되잖아. 아, 아니구나. 작년에 친구 한명이 자살했을 때 장례식장 같이 간 친구랑 집에 오면서 아주 한 30분간 욕으로 랩배틀을 펼쳤었구나. 정정. 죽은 사람을 욕하는 건 그닥 재미있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일이다. 역시 욕은 산 사람에게 할 때 흥겨운 법이다. 그게 눈 앞에 있는 사람이면 더욱 신나고, 그게 죽었다 살아온 사람이라면 더 신난다.
브랜디를 좋아하던 사람이었고, 프렌치 커넥션을 주로 마셨다. '대학생 때 다니던 락까페에선 프렌치 커넥션 한 잔에 오천원쯤 했던 거 같은데 여긴 왜이리 비싸냐?' 고 툴툴대며 프렌치 커넥션을 시키던 사람이었다. 나는 '그래, 거기서도 레미 마틴을 베이스로 오렌지 제스트를 충분히 써서 만들었다면야 오천원에 한잔 정도는 내주도록 하지' 라고 대답하며 술을 냈었고. 첫 잔을 뭘 내 볼까. 프렌치 커넥션은 너무 작위적이다. 브랜디가 들어가고, 달콤하지만 수상하면서, 식물의 느낌이 나면 충분하다. 음. 뭘 내지. 죽은 사람에게 주면 좋은 술이 뭘까.
라는 고민은 그닥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한 달간 불면증에 고생하며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진 덕에 최근에 이상한 실험작들을 많이 만들었다. 그 중에 괜찮은 게 몇 개 있었다. 레미 마틴. 샤르트뢰즈 옐로. 헤르메스 그린티. 샐러리 비터가 들어가는 수상쩍은 녹색 술이라거나. 프로토타입은 헤네시에 샤르트뢰즈 그린으로 만들었다가 너무 달아서 살짝 바꾸고, 별 생각 없는 이름을 지었었다. <평온>. 좋군. 그때 생각없이 지은 이름이었는데 이거 뭔가 너무 운이 좋구만. 망자에게 평온을. 나는 망자에게 평온을 내고, 그는 호기롭게 부활 기념으로 내게 한잔 사겠다고 했다. 아무거나 먹어. 라고 해서 나는 '그래. 아드벡 2010 빈티지 수퍼노바 한 잔 정도면 목숨값으로 되지 않냐'며 병의 테이핑을 뜯었고. 형은 '야 잠깐만 그거 다시 내려놔라. 우리 젠틀하게 하자' 고 답했다. 그래서 결국 젠틀하게 보드카 한 잔으로 받았다. 물론 그 보드카가 벨루가라는 건 조금 안 젠틀한 것 같지만 벨루가면 어떻고 네미로프 렉스면 어떤가. 뒈진 놈이 살아왔는데.
죽다 살아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역시 독한 술을 거푸 먹이면 안 되겠지. 해서 레몬을 충분히 짜고 후추로 살짝 장식한 마시기 편한 듀어스 하이볼을 두 번째 잔으로 내니 그는 성을 냈다. '야 임마. 나 몸 회복하고 매일 새벽 네시까지 술먹는데 왜 이런 걸 나한테 내냐.' 나는 대답했다. '형 그러다 뒈진다.' 시한부를 벗어난 사람에게 죽음으로 농담을 거는 것 만큼 재밌는 일이 있을까. 뭐, 시한부를 완전히 벗어났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의사의 전공 분야지 바텐더의 전공 분야가 아닙니다. 그리고 독한 향이 나는 술을 거푸 냈다. 독한 술을 내기엔 내 마음이 그리 독하지 못해서 말이지. 쓸 데 없는 농담을 했다. '야 이제 우리 다 삼십대야. 같이 이렇게 늙다가 죽는거야' 라는 그의 농담에 나는 '같은 삼십대라고 하지 마시죠. 대위랑 소령진이 같냐?' 라고 받아쳤다.
결국 취할 때 까지 마시고 그는 일어났다. '부활을 기념하는 준수한 계산서로군. 하지만 다음번엔 역시 보틀로 마시는 게 싸게 먹히겠어. 망자 할인 없냐?' 고 해서 좀 깎아줬다. 망자 할인 따위는 내 일이 아니지만, 현금은 내 일이다. 허나 이런 젠장, 현금을 꺼내는 척 하면서 카드를 쓰다니 비겁한 망자로군. 하긴, 비겁하고 비열해야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에 보자. 며 그는 나갔다. 비범하게 훌륭한 하루였다. 죽은 사람이 살아돌아오다니.
아, 여자를 데려온 것 같고 그 여자가 죽기 전에 만나던 여자랑은 다르게 생겼던 것 같은데,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왔는데 여자가 무슨 상관이람. 죽은 남자가 퇴장하고 새로 온 손님과 병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다, '서른 살 모태솔로인 친구가 고환암 판정을 받아서 고환을 절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손님이 오게 되면 나는 무슨 말과 어떤 술을 내 줄 수 있을까. 좋은 말을 해 주긴 힘들겠지만 좋은 술 정도는 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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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틸트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3-12-24 18:19)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