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들어도 청량한 그녀의 목소리가 마지막 조모임의 끝을 알렸다.
나는 쭈뼛쭈뼛 내 짐을 싸는 둥 마는 둥 그녀의 눈치를 봤다.
다행히 다른 두 사람은 잽싸게 짐을 챙겨서 먼저 나간다.
"저기 연주야."
"네?"
나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두 사람이 나간 것을 재차 확인하고는 그녀를 불러 세웠다.
"오늘 혹시 시간되면 같이 저녁 먹을래?"
과연 그녀가 어떤 답변을 줄 것인지 기대반 걱정반으로 기다린다.
"으음."
그녀는 미묘한 표정으로 왼손에 찬 손목시계를 잠깐 보더니 이내 대답했다.
"좋아요."
***
기쁨에 차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기분은 바로 이런 것일까?
나는 참을 수 없이 삐져 나오는 웃음으로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다시금 방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니 더욱 웃음이 터져 나온다.
미리 알아둔 식당으로 연주와 함께 식사를 하고,
과제 이외의 개인적인 이야기들도 잔뜩 주고 받았다.
식사를 마치고 헤어지는 길에 물었다.
"혹시 주말에도 괜찮으면 영화 같이 보러 안 갈래?"
"네."
연주는 흔쾌히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
이후로도 꽤 연주와 꽤 여러 번 데이트를 할 기회가 있었다.
데이트를 거듭할 수록 나는 그녀가 더 좋아졌다.
예쁜 얼굴과 목소리는 그녀의 매력 일부분일 뿐이었다.
연주는 사려깊고, 상대를 편안하게 하고, 즐겁게 하는 그런 질리지 않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단순히 호감이었던 감정이 이제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열병같은 마음으로 바뀌었다.
생각의 끝에 나는 그녀에게 고백할 것을 결심했다.
***
"으음."
연주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그녀의 표정이 순간순간 바뀔 때 마다 괜스레 나는 몸을 움찔거렸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도 아무리 다그쳐도 진정하질 않는다.
"사실... 제가 누군가 사귈 여유가 지금은 없어요. 오빠 마음은 정말 고맙지만..."
영겁같은 순간이 지나고 사형선고와도 같은 대답이 떨어졌다.
그녀의 대답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애를 써보려 하지만, 눈 앞이 캄캄해졌다.
아, 나는 생각보다도 그녀를 훨씬 더 좋아하는구나.
가슴이 먹먹하다.
연주는 내 고백을 거절한 것이 못내 미안했는지 내게서 멀어지는 동안 두 번이나 뒤를 돌아본다.
나는 연주가 뒤를 돌때마다 애써 밝은 표정으로 손을 흔든다.
참 이런 기분 비참하구나.
***
그 뒤로 연주에 대한 마음을 정리해보려고 했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닌것 같다.
어쩌다가 스치듯 보는 연주만 보면 가슴이 제멋대로 분탕질 쳤다.
몇 번이고 그녀의 눈에 띌까봐 움츠러 숨어들었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굳이 내가 숨어야할까.
그래 꼭 저 여자였음 좋겠어.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내가 어떻게 해야할지는 명확해졌다.
계속 연주를 좋아하면 된다.
(엔딩 주의 속터짐)
***
"그 때 나 한 번 차였잖아? 그러고 나서 나중에는 왜 받아준거야?"
내 물음에 연주는 예상치 못했다는 듯이 깔깔 웃었다.
"사실은 나도 그때 오빠가 나쁘지 않았는데, 정말로 누굴 사귈 여유가 없었어.
집안 일도 있었고, 학교에서 학점은 받아야겠고.
그래도 그때 생각하면 조별 모임할 때마다 늦은 적도 없고, 해야할 부분도 척척 제대로 다 해오고
꽤 듬직한 남자구나 싶었지. 사실은 그냥 여기에서 끝나버릴 수도 있는 거였지만.
그렇게 첫 고백 거절했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나한테 연락하면서 잘해주다가
더 나중에 고백했을 때는 정말 나를 좋아하는 남자구나 싶었어."
이제 내 연인이 된 연주는 과거를 회상하며, 후식으로 나온 달콤한 미니케익을 한 입에 넣어버렸다.
그녀에게는 그 때 그 기억들이 나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내게는 꽤 절망적이었지.
'안녕?'
첫 고백이 차이고 연주와 마주쳤을 때 내가 아무렇지 않은 듯 인사를 건네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그녀와 나는 쭉 남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가정은 무의미하다. 결국 나는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고, 그것을 시작으로
나와 연주는 연인이 될 수 있었으니까.
(끝)
***
제 친구인 이xx의 사연을 풀어봤습니다.
결론은 될놈될.. 쿨럭...
(사실은 처음 차였다고 포기하지 말고 몇 번은 찍어보자지만..)
허접한 글 끝까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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