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리니까 간단하게 쓰겠습니다.
단순히 부곡이라고 해서 병졸로만으로 볼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부곡은 호족의 사병을 이르는데 유비가 매번 곤경을 겪으면서도 그 부하들이 유비를 버리거나 죽여 적에 투항하지 않고 유비가 어디있던지 따라다니죠.
두번째는 장비에 관한 겁니다.
장비의 경우 연의에서의 우락부락한 장수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단순히 우락부락하고 성격이 거칠어서는 장비의 전공을 논하긴 어렵습니다. 장비는 장기전과 산악전 등 수전 참전을 제외한 육상전 기록이 전부 있는 장수입니다. 당장 파서에서 벌어진 장합과의 전투에서는 장기전과 함께 산악전으로 장합을 격파하기까지 하죠. 장합이 병사 30명 정도만 데리고 말도 잃은 채 도망갈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고 장비가 한중 장악 이후 맡은 지역은 바로 파서태수입니다. 이 지역은 한중이 넘어갈 경우 촉 땅으로 들어오는 주요 루트입니다. 따라서 유비는 장비를 촉 방어의 최후 저지선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큽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위연도 능력이 떨어지는 장수는 아니죠.
곽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죠.
곽회 백제. 하후연의 부관으로 한중 전투에 참전한 이후 대촉전선에서 복무한 베테랑 중 베테랑입니다만.... 곽회가 촉을 상대로 싸워 대승을 거둔 것은 228년 고상을 격파한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곽회 이사람.... 촉에 자주 털린데다가 촉에만 털렸으면 모를까 강족에게도 털린 기록도 있고 요화에게도 졌던 기록이 존재합니다. 뭐 그렇다고 해서 곽회가 무능한 장수는 아닙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바로 이미 쉬어터진 건데 아직까지도 떠도는 거죠.
자! 오! 곡!
위략의 구절을 인용해보죠.
하후무(夏侯楙)가 안서장군(安西將軍)이 되어 장안을 진수하니 제갈량은 남정(南鄭)에서 군하(群下-여러 수하)들과 함께 계책을 의논했다. 위연이 말했다, “듣기로 하후무는 어려서 주인(즉 조조)의 사위가 되어 겁이 많고 꾀가 없다고 합니다. 지금 저 위연에게 정병(精兵) 5천과 부량(負糧-군량을 짊어질 군사) 5천을 주신다면, 곧장 포중(褒中)을 나가 진령(秦嶺)을 돌아 동쪽으로 진군하고 자오(子午)에 당도한 뒤 북쪽으로 향할 것이니, 10일을 지나지 않아 장안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하후무는 저 위연이 갑자기 들이닥쳤다는 것을 들으면 필시 배를 타고 도주할 것입니다. 장안에는 오직 어사(御史)와 경조태수(京兆太守)만이 있을 것이고, 횡문(橫門)의 저각(邸閣-곡식 저장고)과 흩어진 백성들의 곡식으로도 두루 먹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동방(東方-위나라)에서 군사들을 취합하는 데는 20일은 걸릴 것이니, 공(公)이 야곡(斜谷)을 나와 (장안에) 도달하기에는 충분합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일거에 함양(咸陽) 서쪽을 평정할 수 있습니다.” 제갈량은 이 계책이 위태로워 안전하게 평탄한 도로를 따라 농우(隴右-농서)를 평정하는 것만 못하다고 여기니, 십전필극(十全必克-완전무결하게 하여 반드시 이김)하며 근심이 없어야 한다고 하여 이 때문에 위연의 계책을 쓰지 않았다.
위연이 요구한 것은 전투부대 5천명과 보급부대 5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
전투부대와 비슷한 숫자의 보급부대를 요청한 것입니다. 왜????????
진령산맥은 예전부터 엄청난 험지였습니다.
제갈량이 이용했던 한중의 석문잔도입니다. 에이 다른길도 있잖아?
네 있습니다.
각 잔도의 대부분이 이런 길입니다. 그나마 당나라 시대에 잘 복원한건데 요 길로 군량수송에 병력 진격까지 행했던 제갈량은 어쨌을까요?
그런데...자오곡은 저거보다 더 G.R 맞았다는 게 문제죠.
자, 그리고 이 자오곡을 위군이 몰랐느냐......
장로전에는 한수와 마초가 조조와 싸우려고 할때 관서 지역에 살던 수만명이 자오곡을 통해 장로가 장악하던 한중으로 피난 왔다는 기록이 존재합니다. 또한 조진전에는 촉을 선제공격할 때 자오곡의 잔도를 통해 한중으로 가려다가 폭우로 인해 잔도가 끊어지기도 해 겨우겨우 회군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거기에... 위군이 병력을 모으는데 20일이 걸린다고요?
이미 위는 제갈량이 북벌군을 이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미 동관에 위군의 병력이 모여 있었습니다. 20일이 아니라 20일도 안걸려서 요충 중 요충인 동관에 병력이 집결해 있었다는 점입니다. 거기에 당시 장안의 방어력을 생각해도 1만명 가지고 장안을 쳐서 함락시킨다? 말이 안됩니다.
자, 백번 양보해보죠. 위연이 어찌어찌 해서 전투병 5천에 보급병 5천 가지고 자오곡 넘어갔고, 하후무는 도망갔고, 동관에 정촉군이 없었다고 해봅시다. 근데 장안 먹어서 뭐 어쩌게요?
옹양주의 위군이 멀쩡하게 있고, 이들이 분단되어 섬멸되지 않았으며, 거기에 1만 가지고 당시에 낙양에 버금가는 거성인 장안을 수비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관서의 가장 큰 방어거점은 장안보다는 함곡-동관 라인입니다. 예전부터 장안의 단단함을 말할때 항상 하는 말이 효함의 험준함에 의지할 수 있다인데, 효산과 함곡관의 지형에 의한 방어로 인해 방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조예가 바보라도 이 정도는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이런 동관-함곡관 라인 비워두고 장안 먹어봤자 뭐에 쓰게요?
자 제갈량 사후 양의와 위연의 싸움을 이야기 해보죠.
위연도 독선적이었지만 양의가 조금 양보해준다?
양의 위공. 처음에는 이 사람의 식견을 높이 사 좌장군 병조연, 그러니까 군의 보좌관 격을 맡깁니다. 근데 양의 이 인간의 독선은 위연 이상이었습니다. 어느정도인고 하니....
당시 양의는 상서로 있었는데 유파와 사사건건 충돌합니다. 그런데 이 유파는 양의의 상관인 상서령 직에 있었고, 유파의 명성이 어느정도였냐면 유비를 피해 도망다녔음에도 유비는 유파를 높이 썼고 제갈량도 유파를 칭찬했으며 장비 역시 유파와 교분을 쌓으려고 할 정도였습니다. 거기에 나중에 위의 상서복야로 있던 진군이 유파의 안부를 물을 정도였죠. 그런데 이 양의가 유파와 충돌하면서 넌덜머리가 난 유비가 그를 홍농태수로 좌천시켜버립니다. 그런데 이 홍농태수의 임지인 홍농군이 위의 권역내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파면이나 다름 없었죠. 그러다가 유비가 죽은 후인 225년에야 비로소 복직됩니다.
그리고 위연의 이 말.
양의가 제갈량의 시신을 싣고 자신이 뒤를 막는 장수는 절대 못하겠다.
자, 위연전의 기록을 보죠.
양의가 부륵(部勒-부서를 정하여 배치함)한 바에 따라 뒤를 끊는 장수가 되겠소!
한마디로 양의가 나보고 후군에서 적의 추격을 막으라는 건데 나 그거 못하겠다. 라고 말한 겁니다. 그런데 이 전의 기록을 또 살펴보죠.
가을, 제갈량의 병이 깊어지자 은밀히 장사(長史) 양의(楊儀), 사마(司馬) 비의(費禕), 호군(護軍) 강유(姜維)와 함께 자신이 죽은 뒤 퇴군할 절도(節度)를 지으니, 위연에게 뒤를 끊게 하고 강유에게 그 다음에 있게 하며 .......
제갈량이 유언으로 군령을 정해 위연에게 뒤를 끊는 역할을 맡긴 겁니다. 이건 대놓고 항명이죠. 즉, 최고사령관이 죽으면서 작전계획을 세웠는데 이를 실행할 참모가 맘에 안들어서 지휘관이 이 작전 수행 못하겠다고 나온겁니다. 거기에 양의는 제갈량의 명령을 착실하게 따랐음에도 위연은 이에 반해 퇴각로를 불태워 끊어버렸습니다. 거기에 당시 조정에 있던 동윤과 장완은 양의의 편을 들죠.
자 동윤과 장완은 촉의 네 재상으로 불렸던 사람들 중 둘입니다. 거기에 사상 중 한명인 비의까지 양의의 편을 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위연이 완벽하게 반란, 아무리 좋게 봐줘도 항명한 겁니다. 이런 상황때문에 위연이 포곡을 점령하고 양의를 공격할 때 왕평이 이렇게 소리지르죠.
"승상께서 돌아가시고 그 시신의 온기가 식지도 않았는데 너희들이 감히 이처럼 구느냐!"
이로 인해 위연의 부하들은 모두 도망가버립니다. 거기에 당시 장완은 숙위군을 이끌고 위연을 치러 달려오고 있었죠.
대부분 위연을 감싸는 분들은 다음과 같은 위략 구절을 인용합니다.
제갈량이 병들자 위연 등에게 말했다, “내가 죽은 뒤에 다만 삼가며 스스로 지킬 뿐 다시 (공격하러) 오지 말라.” 위연에게 자신의 사무를 섭행(攝行-대행)하도록 명하고 은밀히 상여를 지니고 떠나게 했다. 마침내 위연이 이를 숨겨 포구(褒口)에 도착하고 이내 발상했다. 제갈량의 장사 양의는 예전부터 위연과 불화했는데, 위연이 군사를 섭행(攝行)하게 되자 해를 입을까 두려워했다. 이에 부풀려서 말하길 위연이 군사를 들어 북쪽에 귀부하려 한다고 하고 마침내 자신의 군사를 이끌고 위연을 공격했다. 위연은 본래 이런 마음이 없었으니 싸우지 않고 군이 패주했는데 이를 추격하여 위연을 죽였다
배송지는 이를 적국에서 전해 들은 말로 보이니 위연전과 더불어 다투어 살필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곧 "위략은 위나라에서 나온 책이니 딱히 이것이 위연의 본심이라고는 볼 수 없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거기에 이미 유선은 장완과 동윤의 의견을 들어 양의의 편을 든 것으로 인해 이미 게임은 끝난 상황이었죠.
거기에 어찌 지금 철수한단 말인가! 지금이야 말로 양주를 평정할 수 있는 기회 이거늘!!"라고 하는데... 이러한 의도의 발언은 정사 등의 기록에서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자 하나 더.
'위연은 병사 출신'이라는 딱지가 붙어있었으니...
생각해보죠. 당시 생존해있는 장수들 중 유비를 객장시절부터 따라다닌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관우, 장비, 조운 등도 어떻게 보면 유비 휘하의 한 부하나 병사로 생각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위연은 이들처럼 거의 밑에서 구르면서 공을 계속 세워 승진한 인물입니다. 야전에서 굴러서 장군까지 되었고 한중태수까지 지낸 사람인데 거기에 장완이나 동윤과 충돌할 만한 일을 겪지도 않았는데 단순히 병사 출신 이라고 이들과 반목한다는 것은 지나친 비약입니다.
원글을 쓰신 블로거 분이 사료를 너무 자의적으로만 해석하신게 아닌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이글 쓰기 전 읽어보니...얼토당토 않는 주장을 조금 하시는거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