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잡지의 청탁을 받고 실은 조선시대 인권이야기 두번째 편입니다. 편집자가 다 좋은데 내용이 너무 참혹해서 다음에는 좀 더 훈훈한 걸로 부탁하더군요. 이번 편은 어린 아이에게 일어난 참혹한 범죄와 거기에 대처하는 지배층들의 모습이 들어있습니다. 범죄가 개인의 책임인가 혹은 사회가 안아야할 문제인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논의가 있어왔고, 아마 해답이 나지 않을 논쟁중 하나일 겁니다.
사람들은 신문이나 방송에서 끔찍하고 잔혹한 범죄가 보도될 때 마다 혀를 차면서 ‘옛날이 좋았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순진하고 착한 사람들만 살 것 같았던 조선시대에도 잔혹한 범죄가, 그것도 어린 아이를 상대로 한 범죄가 발생했다. 중종 28년(서기 1533년) 2월 16일, 한성부에서 임금에게 놀랄만한 사실을 보고했다.
<용산강(龍山江)에 사는 무녀의 집 뒤에 대 여섯 살가량 되는 어린애가 두 발이 잘린 채 버려졌습니다. 그 아이가 말하기를 ‘나를 업고 가면 내 발을 자른 집을 가리켜 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급히 군사들을 보내서 아이가 말한 범인을 붙잡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한 겨울에 대 여섯 살 밖에 안 된 여자아이가 두 발이 잘린 채 길가에서 발견된 것이다, 요즘에 벌어졌다고 해도 신문 방송에 대서특필되고, 온라인 실시간 검색어에 오를만한 경악할만한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두 발이 잘리고도 용케 살아난 아이의 사연은 더 끔찍했다. 정월 초, 한 겨울의 추운 날씨 속에서 길거리를 떠돌던 아이는 한덕이라는 종을 비롯해서 몇 사람에게 거둬졌다가 다시 버림받은 것이다. 너무 어리고 동상에 걸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옥가이라는 이 여자 아이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친 어머니인 중덕에게 첫 번째로 자기를 주웠다가 버린 한덕이 두 발목을 잘랐다고 얘기했다. 주변 사람들도 한덕이 옥가이를 데려왔었다는 사실을 증언함으로서 사건은 종결될 것 같았다. 하지만 옥가이가 너무 어려서 증언의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진상을 밝히기 위해 대질신문까지 벌였지만 결국 누가 어린 소녀의 두 발목을 잘랐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이 사건이 보여주는 잔혹함이 아니라 그것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나온 후속대책이다. 사건의 여파가 제법 가라앉은 2월 21일, 중종은 백성들을 구휼하는 일 중에 어린아이를 돌보는 것 보다 중요한 일이 없다며 추운 겨울날 아이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잘 돌볼 것을 지시한다. 그리고 2월 28일, 또 다시 전교를 내린다.
<요즘, 백성들이 길 잃은 아이들을 산속으로 유인해서 죽이거나 감추어 길러서 노비를 만들거나 하는 자들이 많다고 한다. 이후로는 부모를 잃은 아이를 몰래 길러서 노비로 삼은 일이 발각되면 당사자와 관령(管領)을 모두 엄중하게 처벌할 것이다. 그 절목(節目)을 마련하여 방을 걸어서 널리 알리게 하라.>
물론 이것만으로 길 잃은 어린 아이를 죽이거나 몰래 잡아다가 노비로 부려먹는 일이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성의 인권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16세기에 어린 아이를 보호해주는 조항이 마련되었다는 점은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다. 중종과 신하들은 이 일을 일회성 사건으로 보고 범인을 잡아서 엄한 처벌을 내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런 일이 왜 벌어졌는지, 그리고 같은 사건이 반복 되지 않게 하려면 나라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것이다. 그리고 재발 방지를 위해 합리적인 대책을 내놓은 것이다.
마속 나무위키 문서 2.3. 가정의 패전 인용
"그런데 여기서 마속은 제갈량의 명령을 무시하고 길목에 세워야 할 방어진지를 산 꼭대기에 세우는, 전쟁사상 다시 없을 바보짓을 한다.
부장 왕평이 필사적으로 말렸지만 이마저도 무시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