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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10/15 15:38:53
Name 눈시BB
Subject [일반]  고려의 마지막 명장 - (2) 신돈, 개혁의 끝

"일찍이 듣자옵건대, 국왕과 대신이 참소와 이간질하는 말을 많이 믿는다고 하오니, 절대로 이와 같은 일이 없어야만 세상에 복과 이익을 줄 수 있습니다"

편조, 혹은 변조라 기록된 (뭐라고 읽는지 통일이 안 된 건지 -_-a) 이 중은 1365년에 혜성같이 나타나서 어진 이를 참소했다고 합니다. 그 이전에도 계속 이런 저런 참소를 계속하다가 이 때 가서 본격적으로 힘을 얻었다고 하죠. 그가 공민왕에게 한 말입니다. 이에 공민왕은 아예 맹서를 만듭니다.

"스승이 나를 구원하고 내가 스승을 구원할 것이다. 생사를 같이하여 다른 사람의 말에 의혹됨이 없을 것이니 부처와 하늘이 이를 증명할 것이다"

이 때부터 그는 탈속해서 머리를 기르고 제 2인자가 됩니다. 이름도 바꿔서 신돈이라고 했죠. 그가 말한 것은 자신을 무조건 지켜 달라는 것, 공민왕은 콜을 외친 겁니다. 공민왕이 그를 등용한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 권문세족은 지들끼리 당을 이뤄 허물을 숨겨준다.
- 초야의 신진들은 착한 척 하다가 정계에 들어가면 권문세족 뒤만 따른다.
- 유생들은 나약해서 동기끼리, 같은 스승 문하끼리 뭉친다.

이렇게 자기 무리도 없고, 욕심 없으며 출신도 미천하니까 맡길 수 있다는 것이었죠. 신돈의 정치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1. 언제까지 그렇게 살텐가

고려사에서는 그를 아주 신나게 까고 있습니다.

"권세를 잡은 지 30일 만에 훈친과 명망 있는 자를 파면시켜 내쫓고, 재상과 대간의 임명이 모두 그 입에서 결정되었다."
"신돈이 겉으로는 공의(공적인 의)를 빙자하고 있었으나, 실상은 사람들에게 환심을 사고자 하여 천민들로 양민이 되겠다고 호소한 자는 한결같이 모두 이를 양민으로 만드니, 노비로서 주인을 배반한 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말하기를, “성인이 세상에 났다." 하였다. 신돈이 여러 소인들의 환심을 얻어서 간특한 계책을 성취시키려 함이 이와 같았다."

에 뭐 -_-a 자... 뭐 많이 알려진 거지만 좀 따져 볼까요?

이 때 훈친과 명망 있는 자들을 내쫓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누굴까요? 고려사는 조선이 생긴 이후 권력을 잡은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쓰여졌습니다. 이들이 제대로 정계에 진출한 것은 한참 후의 일입니다. 대체로 그 이전의 권력자들을 까는데, 여기에는 이색까지도 들어가 있죠.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친원파들이죠. 기존의 권문세족들입니다.
신돈이 내쫓을 만한 권력이 있는 자들이라면 바로 신진사대부의 적 권문세족인데, 오히려 이들을 명망 있는 이들이라고 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신돈이 했던 과거제 개혁 역시 피해 입는 쪽은 권문세족이지 신진사대부가 아니죠. 물론 신진사대부와 뜻이 있는 사람도 없진 않았겠죠. 그런데...

1367년 이색은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됩니다. 이로부터 정몽주, 정도전 등 그의 제자들이 대거 진출하죠. 한창 신돈이 까일 때의 일이었습니다. 공민왕이 신돈을 견제하기 위해서 한 거라고 보기에는 신돈이 한창 때였고, 공민왕이 절대적으로 믿을 때였죠.

명망 있는 사람들을 내쫓았으면서 정작 신진사대부들을 대거 등용한다라... 뭔가 이상하죠?

두 번째 인용한 것은 그 유명한 신돈의 토지 개혁 때의 일입니다. 역시 마찬가지죠. 이들이 돌려준 땅은 다 권문세족의 것이었을 것이고, 풀어준 노비 역시 이들이었습니다. 돌려준 땅 역시 권문세족의 땅을 백성들에게 돌려준 것이죠. 이걸 단지 인기를 얻으려 한 거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해 본다면, 개혁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그는 정말 급진적으로 밀어붙였다고 봐야 됩니다. 지지기반이 없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죠.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그리고 그 자신도 유교를 숭상했기에 신진사대부들을 등용한 것이구요. 불도저라고 할 만 하죠.

문제는 역시 그의 지지기반이 없었다는 거죠. 말장난일까요 -_-;;

2. 사면초가
권문세가들은 당연히 그를 싫어했습니다. 애초에 기득권층, 밀어도 밀어도 남을 수밖에 없죠. 당장 다음해부터 이존오 등이 그를 맹렬히 공격하는데, 그가 집권하자 어디서 어떤 재앙이 일어나고 어떤 재앙이 일어났다느니 하는 내용입니다. 시작이 참 유교적이었는데 이러니 공민왕도 어이 없었을 겁니다. 하긴 이런 재앙 드립은 조선에도 늘 있었군요.

문제는 그가 등용한 신진사대부들 역시 그를 싫어했다는 겁니다. 신돈 덕에 힘을 얻은 그들은 오히려 신돈을 공격합니다. 신돈이 아무리 지지층이 없다 한들, 그는 고려에서 개혁해야 할 최고의 적, 중이었거든요.

안 그래도 지지기반 없는 상황에서 양 쪽에서 몰리게 됐습니다. 애초에 이런 급진 개혁가는 반격도 신나게 먹을 수밖에 없죠. 그가 믿을 건 공민왕 뿐이었고, 그래도 공민왕은 자기 약속대로 열심히 믿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 더 따져 볼 것이 있습니다. 그를 향한 비난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인가 하는 거죠.

이색은 덜 했지만, 정도전을 비롯한 유학자들은 불교를 증오했습니다. 조선 건국 이후 불교가 얼마나 탄압받았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그들의 신돈을 향한 마음이 어땠을지 알 수 있죠. 어쨌든 불교를 믿었으니 불사는 계속됐을 겁니다. 유학자들이 이걸 가만 볼 수가 있을까요.

그가 열심히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권문세족만 딱 골라서 했다고 보기도 힘듭니다. 대표적으로 최영이 이 때 국문을 당하고 유배갑니다. 권력을 틀어 쥐는 과정이겠지만, 이런 식으로는 없는 적도 만들어집니다.

한 가지 더 볼 것은, 이 자리에 누구를 채웠느냐입니다. 신진사대부도 있겠지만, 신돈 자신을 따를 이들이 가장 중요했겠죠. 상황이 바뀝니다. 자기 무리가 없기에 등용했던 신돈이 힘을 얻기 위해 자기 무리를 만들게 된 거죠. 이들이 신돈과 순수하게 뜻을 같이 하는 무리라고 생각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그를 따르던 대표적인 이 중 이인임이 있거든요. 역시 권문세가 출신이었지만 신돈에 의해 중용된 자였습니다.

이런 면에서 그 외에 나타난 그의 비리들을 아예 없던 일이라고 단정할 순 없습니다. 그가 승려 출신이기에, 역모로 몰려 죽었기에 과장됐을 순 있겠지만요. 그리고 더 큰 것은... 공민왕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거겠죠.

1369년, 공민왕 18년에 신돈은 사심관을 다시 만들기를 청합니다. 각 도의 지방관을 뜻 하는 직책인데, 5도의 도사심관이 되려 했다고 하죠. 공민왕은 이를 거절하며 그 글 자체를 불 질렀습니다. 다음 해에는 직접 정무를 보기 시작했죠. 여기까지 보면 그렇게 나쁘게 보이진 않습니다만... 아 이 때 떠오르는 강국 명나라에서도 "니네 불교 믿고 논다며?"라면서 은근히 신돈을 압박하죠.

71년, 신돈 최후의 해가 밝았습니다. 선부의랑 이인이 신돈의 반역 사실을 알고 몰래 재상 김속명의 집에 그 사실을 적은 글을 던졌고, 곧바로 왕에게 보고됩니다. 공민왕은 기현, 최사원, 정귀한 등 신돈의 일파들을 모조리 처형하죠. 잠시 유배 갔던 신돈 역시 정말 속전속결로 죽여 버립니다. 고려사에서는 신돈이 공민왕이 자길 꺼려 죽일까 두려워서 일을 꾸몄다고 적고 있습니다만...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신돈을 죽일 무렵 고려사절요의 한 구절입니다. 신돈을 신나게 까다가 뜬금 없이 나오는데, 단지 공민왕을 까기 위해 만든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일까 생각해 볼 만한 부분이죠.

"왕은 성품이 시기심이 많고 잔인하여, 심복 대신일지라도 권세가 강성해지면 반드시 꺼려 목베었다"

나름대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신돈은 갑작스러운 등장만큼이나 허무하게 사라집니다. 이런 점에서 전 신돈의 개혁이 효과는 있었지만 너무 급진적이었고, 적을 많이 만들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의 타락 역시 기록에 적힌 것처럼 극적이지는 않겠지만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구요.

하지만, 그가 키운 신진사대부는 갈수록 커져서 마침내 나라를 뒤엎게 되죠. 이후 역사는 불자에게 주도권을 주지 않습니다.

3. 타락
이후의 일들은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권문세족들은 돌아왔지만, 신진사대부들도 딱히 몰락 수준까지는 아니었죠. 가시적인 성과는 없었고, 왜구들은 여전히 신나게 쳐들어 왔습니다.

하지만 외적으로는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원이 결국 몰락한 거죠. 그들은 북쪽으로 쫓겨 북원을 만들었고, 명은 새롭게 일어납니다. 공민왕은 반원의 기치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최영은 그의 손발이 되어 왜구들을 토벌했고, 제주도의 몽골 잔당들을 공격했습니다.

+) 이 때 제주도 탈환에 흥미로운 시각이 있습니다. 몽골 잔당도 잔당이지만, 제주도인들도 싸우다가 많이 죽었죠. 고려의 토벌군 장수가 남편 잃은 아내를 취하려다가 거부했고, 그걸 열녀로 기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제주도는 고려 때에야 제대로 귀부했고, 조선 때까지도 유배지 내지 변방으로 여겨졌습니다. 뭐 현재 제주 고씨 장흥백파를 이루는 (에 그러니까 저희 집안이라든가 (...)) 한반도에 정착한 이들이야 달랐겠지만, 제주도 토착민들은 고려나 몽골이나 그리 다를 바 없었다는 거죠. 뭔가 대만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아무튼, 고려 역사에서는 제주도를 제대로 탈환한 기념비적인 사건이겠지만, 제주도에서는 비극의 한 장일 뿐인 거죠.

친원 권문세가들은 여전히 이에 반발했지만 대세를 막지는 못 했습니다. 그저 아예 적대적으로 하는 걸 막는 수준에 그쳤죠. 공민왕이 죽은 후,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는 거세게 격돌합니다.

뭐 이런 문제는 둘째 치고... 공민왕 말년이라면 역시 자제위가 있겠죠? (...)

자제위 자체는 그리 특별하지 않습니다. 상류층 자제들을 뽑아서 직접 호위하게 하는 거니까요. 공민왕 자신의 친위대 느낌도 볼 수 있을 것이구요. 조선 초에도 이걸 어느 정도 잇긴 했습니다. 문제는... 그 행각이죠.

자제위를 시켜 궁녀 등을 강간하게 하고 그걸 지켜봤다든가 하는 일화들... 자식을 갖지 못 한 스트레스, 노국 공주를 잃은 슬픔, 이래저래 신하들에게 치인 스트레스 등으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도 참 쇼킹하죠. 어쨌거나 정치는 잘 굴러갔으니 이게 거짓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에 뭐 낮에는 요순이요 밤에는 걸주였던 임금은 조선시대에도 있었긴 하죠.

뭐라고 생각해야 될까요? 가장 큰 문제는 공민왕을 죽인 게 바로 이들이라는 거겠죠. 그게 아니었다면 아 엽기적이구나... 과장이 쵸큼은 있겠지? 이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는데요. 그 날과 그 직후의 일들로 한 번 추측해 보겠습니다.

그 때 그 날 ( --) 로 가시죠.

4. 그 때 그 날
1374년 9월 갑신일 밤, 궁궐에서 변란이 일어납니다. 고려사에서는 이 일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 전 날 내시 최만생이 공민왕을 따라 변소에 갔는데(-_-) "익비가 아기를 배었다"고 했습니다. 공민왕이 기뻐 누구 자식인지 묻자 홍륜이라고 했죠. 이 때 공민왕은 이렇게 말 했습니다.

"내가 내일 창릉에 배알하고 주정하는 체하면서 홍륜의 무리를 죽여서 입막음을 하겠다."

이어 최만생에게도 말 하죠.
"너도 이 계획을 알고 있으니 마땅히 죽음을 면하지 못할 줄 알아라"

이 말을 들은 홍륜과 최만생은 그게 진심이라고 생각하고 자제위들을 모두 모아 다음 날 밤 공민왕을 죽입니다. 어찌나 참혹하게 죽였는지 병풍에 그 피가 흥건했다고 하죠. 이어 그들은 밖에서 적이 들어왔다면서 소리칩니다. 남이 한 일로 꾸미려 했다는 것인데... 이 때 궁궐을 호위하는 병사들은 두려워 움직이지 못 했고, 소식을 들은 대신들도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음 날, 그 진상이 밝혀졌고, 시중 이인임은 최만생의 옷에 피가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을 붙잡아서 공민왕을 죽였다는 것을 밝혀냅니다. 이제 이인임의 시대가 펼쳐지는 것이죠.

흔히 이 사건은 우발적인 게 아니고 배후에 권문세족, 특히 이인임이 있다고 합니다. 딱히 정설로 다뤄지진 않고 카더라 수준이지만... 파 보면 은근히 나오죠. 일단 아무리 미쳤기로서니 자기 무덤을 팔 만한 말을 했겠느냐는 의문이 있습니다. 물론 왕이니까 무슨 말을 한들 어쩌랴 하는 반론도 가능하죠. (박시백 화백은 취해서 한 말이라는 쪽을 강조하더군요)

이인임은 우왕을 내세우면서 세력이 꺾인 북원과의 관계 회복에 나섭니다. 명의 사신을 죽이기도 했죠. 이인임은 명에서 왕을 죽인 걸 따질까 두려워 했고, 원나라에서 가장 먼저 한 말은 "공민왕이 나쁜 놈이니 왕을 죽인 죄를 묻지 않겠다"였습니다. 여기에 더 해서 익비가 밴 건 정말 공민왕의 자식이었는데 홍륜이 한 것으로 꾸며졌다는 것이죠. 뭐 이 정도면 냄새가 솔솔 나긴 하죠. 이 점이 권문세족의 공민왕 암살설의 요지입니다. 그런데...

이 정도로 잘 알려진 사실을 왜 최영과 이성계는 이용하지 않았을까요? 이용 문제가 아니라 당연히 문제 삼아야 될 내용입니다. 이인임의 죄는 우왕을 앉히고 자기가 권세를 마음대로 휘둘렀다는 것, 최영 축출 후에는 신돈의 자식인 우왕을 앉혔다는 것입니다. 공민왕을 죽인 죄까지 넣자니, 공민왕을 까는 건 자기에게도 나쁠 게 없다는 거죠. 그럼 한 번 비교해 볼까요?

공민왕은 미쳤고, 권문세족 대신 신진사대부를 키웠는데, 이인임이 이게 싫어서 죽였다 (암살설)
공민왕이 미쳐서 제 무덤 파고 죽었는데 이인임이 그 틈을 타서 정권을 잡았다

이성계가 왕이 된 명분은 "왕씨에 더 이상 덕이 있는 사람이 없어서"입니다. 좀 확대해 보자면 공민왕이 죽은 후 그의 피가 끊겼고, 이인임 같은 권신이 나라를 마음대로 휘둘러서 어쩔 수 없이 왕시 중에 공양왕을 골랐는데 이 양반이 자기가 덕이 없음을 알고 왕자리에서 내려왔으니 가장 어진 이가 (자기는 몇 차례나 거부했지만) 왕이 되어야 했다... 이게 그들이 원했던 스토리죠. 어차피 공민왕의 단점을 덮어 쓸 신돈이라는 요승도 있었습니다. 공민왕을 굳이 깎을 필요가 없는 거죠. 오히려 조선 초부터 공민왕은 명군으로 대대로 모셔졌고, 곳곳에 사당이 건립됩니다. 왕조의 마지막 왕, 거기다 이런 저런 단점들이 노골적으로 기록돼 있는 상황에서는 특이한 일입니다.

조선에 들어 아무리 까도 모자람이 없을 이인임, 하지만 그가 공민왕을 죽였다는 건 빈말로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원이 말 했다는 "왕을 죽인 죄"와 명에 알려지기를 두려워 했다는 사실은 이인임과는 별개로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이런 상황에서 공민왕의 단점이 적혀 있다는 것은, 그게 정말 그의 단점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거죠. 물론 불교에 관련된 건 욕 하더라도 말이죠. 반대로 공민왕의 업적이라는 것 자체가 과장된 게 아닐까도 생각해 봐야 됩니다.

이 정도가 암살설에 대한 제 생각입니다. 진짜라 생각하기엔 황당하고 지어냈다고 하기엔 뭔가 조잡한 사건, 그렇다면 역으로 그게 사실일 수 있는 거죠.

5. 공민왕과 신돈

공민왕은 보통 노국공주랑 커플로 많이 나오죠. ... 더러운 세상

이렇게 고려의 마지막 불길은 꺼졌습니다. 이후에는 이인임을 비롯한 구세력과 정몽주,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신세력간의 다툼이 벌어지고, 최영과 이성계라는 실세를 업은 신세력이 승리합니다. 하지만 이 중에서도 최영과 정몽주 VS 이성계와 정도전으로 갈리죠. 이제까지의 다툼이 고려를 어떤 방식으로 살리느냐에 대한 갈등이었다면, 이후의 갈등은 고려를 죽이느냐 그대로 두느냐의 갈등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공민왕과 신돈은 고려의 마지막 불길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겁니다.

분명 그들에게 개혁이라는 큰 틀은 있었습니다. 고려의 옛 복식과 제도를 되살리고 권문세족의 영향력을 줄이는 것, 그런 과정에서도 수많은 외침을 (정말 조선은 명함도 못 꺼낼 정도로 -_-;) 이겨낸 건 대단하죠. 타이밍도 절묘했습니다. 흔히 말 하는 것처럼 원나라를 아예 무시한 건 아닙니다. 어쨌든 현실이었으니까요. 조금씩, 여러 명분을 들이대며, 원나라가 힘을 잃은 틈을 타서 그들의 세력을 누르고 영토를 되찾은 모습은 정말 대단합니다.

하지만 그 한계도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원나라의 간섭을 받은 게 백 년이고, 그 이전의 백 년은 왕이 별 힘을 쓰지 못 하는 무신정권 시대였습니다. 그걸 다시 되살리는 건 젖은 라이타로 젖은 담배에 불을 붙이는 것과 비슷... 할까요? (...) 그런 상황에서도 성과를 보인 건 대단하지만, 역시 시대의 한계였죠. 반면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뽑은 새 시대의 인물들은 고려 자체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숭불의 고려와 억불의 사대부, 구세력은 개혁을 원치 않고 신세력은 개혁을 아예 넘어 체제 자체를 뒤엎으려는 상황이었습니다. 어차피 그가 정말 미쳤는가, 혹은 원래 그랬던 사람이었는가의 확실한 판단은 할 수 없습니다. 영조처럼 미친 거 같은데 정치를 잘 한 경우도 얼마든지 있죠. 그리고... 공민왕의 상황은 미치기 충분했습니다.

아무리 개혁가라 하고, 후에 조선에서 그들의 단점을 과장시켰다 한들 그들 자신이 단점이 없었다고 볼 순 없습니다. 공민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휘둘렸다는 걸 왕권이 약했다는 걸로도 볼 수 있지만, 그런 상황에서 영토 수복 등을 밀어붙였다는 점에서 다른 걸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가 신하들을 잘 믿지 못 했다는 것이죠. 홍건적 침입 후의 숙청은 토사구팽으로 봐도 될 것입니다. 김용, 신돈이 모반을 일으켰다는 것 역시 별 일 없는 상황에서 만들어진 말은 아닐 거구요. 애초에 신돈을 등용한 것부터가 그가 믿을 사람이 얼마나 없었는가를 말 해 줍니다.
신돈 역시 불도저로 열심히 밀어붙이긴 했겠지만, 그 과정에서 불만이 나타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밀기 위해 투입한 자기 편이 얼마나 옳은 인물이었는가, 나아가서 신돈 자체가 얼마나 옳았는가에 대한 생각은 따로 해 봐야 됩니다. 개혁가에 대한 선망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게 한국이지만, 개혁가들의 한계 역시 역사가 말 해 주고 있죠.

조선 말과 비교해보면 참 이런 저런 생각이 듭니다. 그 때도 구세력은 그대로 있기를 원했고, 신세력은 정말 급진적인 개혁을 원했죠. 구세력의 인물이면서 신식 개혁을 밀어붙인 왕이 공민왕이라고 생각한다면, 조선 말에는 그 수준의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흥선대원군도 그런 면에서 큰 한계가 있죠. 공민왕의 시도와 한계를 이것과 비교해 보고 싶습니다.

+) 물론 조선 말은 그 새로운 거라는 게 고려 말과는 비교가 안 됐지만요. -_-;

공민왕과 신돈의 시대, 이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새로운 세력이 자랐다는 것입니다. 친원과 친명, 숭불과 숭유, 공민왕 대에서는 이 둘이 그나마 큰 탈 없이 산 모양입니다만, 공민왕이 죽고 난 후 대립은 극대화 됩니다.

싸움은 좀 잘 하는, 동북면에서 오랑캐들이나 사는 땅에서 세력을 키웠던 한 장수 역시 이 때부터 두곽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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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진주인공 얘기를 간단히 끝냈으니 페이크 주인공으로 넘어갈게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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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0/15 16:21
수정 아이콘
역사는 승자의 편이라는 말도 있듯이..

신돈의 기록들은 많이 왜곡되고 변형되어 있다고 봅니다.

역시 필력이..............

손이나 드세요...
재이님
11/10/15 17:00
수정 아이콘
내일부터
중요한 거사가 있는데
계속 글을 쓰실겁니까?

이럴 때일수록
우리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여
모든 공력을 자이안쓰에게 바치..

아.
여튼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크크
11/10/15 19:33
수정 아이콘
신돈하면 서지혜씨만 생각이 나는 흑.. 드라마에서 정말 예쁘게 나오시더라구요 -_-;;
11/10/16 00:37
수정 아이콘
우왕이랑 창왕이 정말로 신돈의 자식인가요?????
11/10/16 07:40
수정 아이콘
개인적으로 조선사를 좋아하다보니
고려말의 이야기도 궁금하고 그러다보니 고려라는 국가 자체에 관심이 슬슬 가더군요.
아직은 아는 게 너무 없어 고려사에대해 뭐라고 주장할만한 기본적인 지식조차 없지만...

언제나처럼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11/10/16 09:34
수정 아이콘
제주고씨 장흥백파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눈시님 저랑 같은 집안 분이셨군요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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