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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4/17 01:46:02
Name nickyo
Subject [일반] 혜화동 대학로 스타벅스 2층 구석진 자리에서 다시 만난 날.
에스프레소를 주문하자니 타는 목을 적시기엔 너무 적었고, 아메리카노를 주문하자니 초조함에 떨릴 손을 보일까 두려웠다. 결국 물 한잔을 플라스틱컵에 담아두고 그 사람을 기다렸다. 혜화동 대학로 스타벅스 2층. 별로 좋아하는 카페도, 커피가 맛이 있지도 않지만 그 사람과 한 번 같이 온 이곳, 같은 장소에서 난 다시 그 사람을 기다린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당신이 날 기다려 주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내가 당신의 자리에서 기다린다.



그 사람은 내게로부터 언젠가 '그' 누나가 되어있었다. 때때로 그것은 '그' 녀가 되기도했다. 그녀는 내게 특별한 사람이었다. 내게서 특별한 의미로서 자리잡았다. 사랑해서 다행이라고 여기게 해 준 사람, 그랬기에 그 사람이 그렇게 휙 하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예고도 없이 떠나가 버린것이 더 아팠던 사람이었다. 사라진 그 사람의 뒤로 나로부터의 그래, 이제 모르는 사이가 되자며 고래고래 악을 썼던 선언 그 뒤로부터도 벌써 근 한달. 결국 난 그것을 버티지 못하고 그 사람을 다시 찾았다. 그 동안에 쌓였던 아픔들을 이젠 정말로 정리하기 위해서. 그녀는 여전히 특별한 '그'누나였지만, 한달여만에 들은 목소리는 참 차가웠다. 그때 어렴풋이 생각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가 이 사람에게 화를 내고 나면, 나도 이제 정말로 끝나겠구나 하고.

It's a

또각 또각


익숙한 구두소리가 들리자 화들짝 하고 놀라버렸다. 슬쩍 보이는 정수리에 벌써부터 입술이 바작바작 탄다. 이윽고 그 사람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반대편 자리에 태연하게 앉으니 그 사람의 눈에 마주친다. 긴장으로 굳어진 입술을 겨우 떼내어서 바보같은 한 마디를 던졌다.


"뭐 마셔야죠?"


"괜찮아요. 할 말 있다면서요. 말해요."



괜찮다는 말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게 먼저 물어올 줄은 몰랐다. 나는 그녀가 사라진 후 거진 한달동안 품었던 것들을 잘 정리해서 담아왔다. 차분하게 생각한 대로 그것을 말하면 되는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첫 마디를 뭘로 시작해야 할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수 없이 생각했건만 마치 잠시 머리가 백지가 된 것처럼. 그 몇 초사이에, 그 사람이 먼저 말을 꺼냈다.



"할 말 없나봐요? 그럼 내가 먼저 말 해도 되죠?"


"예...예?"



멍청하게 어어 하는 사이에 그녀의 입술이 툭 떨어진다. 그 순간이 마치 슬로우모션처럼 느려졌다. 그녀가 내게 말 할게 남아 있었나? 정말 흔적 하나 없이 슥 하고 사라진 그 사람이 내게 할말이 있다고? 이상했다. 내가 생각한건 이게 아니었다. 오늘 난 그녀에게 그 동안 겪은 아픔- 혹은 그리움, 서운함, 슬픔, 화 따위의 것들을 찌질하게 쏟아부으려고 왔다. 그녀는 아마도 그걸 쿨하게 듣고는 so WHAT? 우린 아무것도 아니었잖아 라며 떠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진짜 끝나는 것 답게 끝나는 것이 내가 생각한 것이었다. 그 사람이 할 말은 그것 뿐이겠거니 하고 믿었다.


"철수씨 나랑 장난해요?"



"뭐가요?"



아아, 이런 등신 삼룡이를 보았나. 거기서 뭐가요라니.

Fiction

"몰라서 물어요? 그럼 하나하나 다 말해줄게요. 완전 비참하고 어이없고 화나지만 어쩌겠어요, 눈치도 없는 둔탱이니까 하나하나 다 설명해 드려야죠. 철수씨가 그랬죠? 이제 모르는 사이가 되자고. 내가 진짜 얼마나 어이없었는지 알아요?"


"그래요. 내가 연락 안받은거 잘못한거 알아요. 근데 내가 뭐 몇 달을 잠수탔어요? 고작 열흘 좀 넘었던 거였잖아요. 그게 그렇게 잘못된 거에요? 아니, 내가 그때 무슨 다른 남자를 만난것도 아니었어요. 근데 내가 이걸 왜 이렇게 설명해야해요? 생각해보니까 되게 웃기네. 철수씨랑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거잖아요."


"그냥 가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하면 다에요? 그럼 난 뭐가 되는거죠? 난 진짜 제일 친한 친구에게도 못 한 말들 철수씨한테 다 했다는거 철수씨도 알죠? 나한텐 이런 사람 진짜 처음이었다고. 그거 알아요? 우리 만난지 생각보다 오래 됐다는거. 그 동안 내가 철수씨랑 만나고 이야기한건 다 뭐에요? 우리가 쌓아온건 뭐냐구요. 난 철수씨한테 대체 뭐였어요? 철수씨한테는 내가 그렇게 믿음을 못 주는 사람이었나봐요?"


격양된 그녀가 숨가쁘게 날 몰아쳤다. 이게 아닌데 싶음에도 그녀의 숨가쁨에 나도 숨 쉬기가 덩달아 어려웠다. 식은땀에 축축히 젖은 등이 걸리적거렸다. 그녀는 훅 하고 숨을 내뱉고는 아직 안끝났다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철수씨는 바보에요? 세상 어떤여자가 관심도 없는 남자가 밤 열두시에 부르면 나가요? 아침까지 놀자고 하면 좋다고 따라나서요? 그래요. 솔직히 난 철수씨보다 나이도 많고, 얼굴이 막 예쁜것도 아니고 애교도 없고 몸매도 별로에요. 나도 안다고요. 그래도요, 철수씨가 부를때마다 좋다고 나갈수 없잖아요. 쉬워보이고 싶지 않은걸 어떡해요. 그치만 내가 괜히 튕겨보겠다고 거절한 적 있었어요? 없잖아요! 혹시라도 쉬워보일까봐 걱정되도 우리 자주 만날 수 없었으니까. 정말 우리 느렸으니까. 철수씨가 나한테 고백했을 때 기억나요? 내가 하루만 시간 달라고 그랬죠. 사실 시간같은거 필요없었어요. 근데 이렇게 매번 하자는데로, 만나자는데로 다 하면 안될 것 같아서. 그래도 이제 애인이 되면 한번쯤은 튕겨야 될 것 같아서. 기쁜 마음 겨우 감추고 하루만 달라고. 근데 철수씨 다음날 나한테 전화했죠? 유학간다고. 신청해놓은거 합격했다고. 내가 그때 얼마나 진짜 황당하고 어이없었는지 알아요? 그러면 나한테 뭐하러 고백한거냐고, 근데 그때 내가 어떻게 했어요? 잘 됐다고 축하해줬죠? 그리고 나서 어땠는지 알아요? 술도 못하는 내가 애꿎은 동생 불러다가 철수씨 이야기하면서 이게 뭐냐고 한탄하고, 묻고, 고민하고. 그래도 내가 몇 년 더 살았으니까. 내가 더 어른이니까. 내가 놔줘야 한다고 겨우 그렇게 마음먹고 일주일 지난 여기 이 자리에서. 좋은 동생이 되어달라고 그랬을 때, 덜컥 그러겠노라는 철수씨를 보면서 난 진짜 괜찮았을 것 같아요?"



"친한 동생이 되어가는 철수씨를 보면서 몇 번이고 접어야 한다고, 참아야 한다고. 기대지 말자고 그렇게 나한테 수십번도 넘게 다짐했는데 갑자기 철수씨가 유학 안간다고 했을 때, 취소됐다는 말에 애써 어떡하냐고 말하며 사실은 내가 엄청 기뻐한거, 모르죠? 그 때 철수씨랑 갑자기 약속 잡고는 이틀 연속으로 만나서 놀고. 그리고 나서는 아차 싶어서, 유학 안 간다는 말에 내가 너무 쉽게 다시 다가간 것 같아서. 조금 무서워져서. 그래서 잠깐만, 나 일도 많고 집에 문제도 있으니까 조금만 혼자 있어보자고. 확신이 없었으니까. 철수씨 이제 나 같은건 안중에 없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내가 아무말도 없다고 해도 당신이 날 아직 좋아한다면 다시 잡아줄 거라고 그렇게 나쁜 생각했으니까."


"근데 뭐에요? 전화 몇 번 하고, 뭐 하냐는 문자 몇 번 보내더니 그냥 가라고. 모르는 사이가 되자고. 내가 잘못 안했다는거 아니에요. 근데, 난 그럼 이제까지 누구한테 그렇게 마음 주고 믿은건데요? 철수씨는 내가, 내가 그렇게 만만했어요? 나랑 보낸 시간들이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버릴 수 있을만큼, 그랬어요? 그게 그렇게 쉬웠어요? 난 철수씨가 한번은 더 말해줄 줄 알았어요. 전화 몇 통 하고, 문자로 뭐하냐고 몇 번 하고는 일방적으로 가라고하고. 그럼 난 뭐라고 설명해요? 난 변명도 못하고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만나자면 쪼르르 달려나오는 그런 여자에요?"


그때 그 눈이다. 어떻게 말해야 할 지 모르겠다며 어렵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이 자리에 앉아있던 당신의 그때 그 눈이다.

그렁그렁함에 울렁거리는 눈동자, 뱅글뱅글 애써 떨구지 않으려는 슬픔이 차오른 눈. 그 날과 똑같다. 이상했다. 오늘 화 내는건 나였다. 말 하는 것도 나였다. 그런데 저 사람이 더 아파한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 눈과 한번 더 마주쳤을 때, 그리고 천천히 그 사람이 힘 없이 떨리는 입술을 떼었을 때 그때서야. 그때서야 난 지금 이 사람이 그 사람 그대로라고 느꼈다. 사랑해서 다행이었던, 애써 나쁜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그대로였던 그 사람임을. 쏟아붓고 싶었던 아픈 마음들이, 죄다 아래로 쓸려내려간다. 다시는 올라오지 못할 저 깊은 아래로.


"정말 몰랐다고 할 수 있어요? 내가 철수씨 정말 좋아했다는거, 많이 믿었다는거. 정말 몰랐냐구요!"

"대체..난 철수씨한테 뭐였냐구요..............."


떨리는 목소리를 뒤로하고는



데구르르 하고 흘러내린다. 아, 하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손을 뻗는다. 예전보다 조금 더 야윈듯한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훔쳐낸다. 얄상한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소리없이 흐느낀다. 그 흐느낌을 두 손으로 훔쳐내다가 나도 모르게 일어서 다가간다.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난 그저 왜 그랬냐는 물음도 미안하다는 말도 건네지 못한 채, 두 팔로 그 사람을 당겨왔다. 들썩이는 어깨를 품 안에 품자, 그녀는 너무나 가녀리고 작았다. 웃으며 안았던 마지막 그 날과 다르게, 그녀의 메마른 두 손이 내 가슴팍을 꽈악 잡아 저민다. 가라앉지 않는 들썩임에, 나도 모르게 툭 하고 애써 모른척 하던 한 마디를 건네었다.



"사랑해요, 여전히."



움찔 하는 그 사람은 이내 고개를 들지 못 한채 들썩임만 더해간다. 그녀의 샴푸향기가 익숙해 질 즈음에서야, 그녀는 조금 진정된 듯 천천히 두 손으로 날 밀어낸다. 그리고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번진 화장을 보여주기 싫다며. 그러니까 그냥 그렇게 들으라며. 다시는 날 버리지 말라며. 무서웠다며. 싫었다며. 자긴 나이만 많고 해줄 것도 별로 없는데다가, 고집세고 애교도 없고 경험이 없어서 리드도 못해준다고. 그러니까 철수씨가 다 해줘야 한다고. 가르쳐줘야 한다고. 싸워도 좋고 화내도 좋으니까. 이렇게 그냥 내동댕이 치지만 말라고. 자긴 이기적이고 바쁘고, 마음도 시소같지만 다신 그렇게 서운하게 안 해줄테니까. 노력할 테니까. 한번만 더 말해달라고. 지금이라면 생각할 시간 안 줘도 된다고.




혜화동 대학로 스타벅스 2층, 좋은 기억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커피맛도 맘에 안드는 그 곳에서 우리는 겨우 다시 만났다. 번진 화장을 고쳐야겠다고 일어서는 그녀에게 다짜고짜 키스했다. 파르르 떨리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전해졌을까. 떨어져가는 입술 사이로 그녀는 내게 처음으로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우리는 너무 먼 길을 돌아왔다. 그래서 나도 그녀를 사랑한다고. 미안하다고. 그렇게, 난 그녀를 오래도록 품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봄보다 따스한 그 사람이, 그 향기가 내게는 진짜 봄처럼 느껴졌다. 다시 만난 날. 여전히 우리는 사랑하고 있었다.

실화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둘이서 손을잡고 갈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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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Vgoodtogosir
11/04/17 01:57
수정 아이콘
제목을 보고 에스프레소 트리플샷 쯤을 예상했는데, 결말은 시럽 잔뜩 넣고 휘핑크림 얹은 화이트 카라멜 마끼아또 같은 느낌이로군요.
다행입니다.
Saussure
11/04/17 01:59
수정 아이콘
픽션... 아니지요? nickyo님 글을 쭉 읽어왔는데, 해피 엔딩이라 다행입니다. 축하드립니다. :)


...라고 썼는데, 드래그를 이제야 발견했네요. 하아...
너마저
11/04/17 02:09
수정 아이콘
축하드려요. 진심으로!! :)

한밤중에 괜스레 제가 코끗이 찡해졌네요~

진짜. 봄이 오나봅니다^^

라고 썼는데!!!! 이건 무슨 반전인가요...... 크~~
가치파괴자
11/04/17 02:25
수정 아이콘
영화같네요 이건 ;
감정이입도 되는게 코끝이 약간 찡하기도 하네요
goGo!!@heaveN.
11/04/17 02:30
수정 아이콘
휴.. 일인칭으로 동화되고 몰입되어 신나게 읽고 기분이 새콤달콤해졌었는데 드래그 하셔도 좋습니다에서 기분이 '픽' 하네요..
기운빠져도 어쩌겠습니까, 사람마음이란게 보이는 만큼만 보이는 것이며 보이지 않는 속마음은 알지 못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을;;
'그녀'도 이런 뉘겨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 볼 수 있었으면 좋을텐데..
너무 거리두지 마시고 기회가 생긴다면 배수의 진을 치고 다시한번 어필해보세요. 아무것도 없이 끙끙 속앓이만 하고 계시다
나중에 돌아보면 다시 그 때로 돌아갈것만 같은 가슴아림에 한동안 멍해질 테니까요.
화이팅!
사랑헌신믿음
11/04/17 02:56
수정 아이콘
대학로에 살고있는 사람으로써 어디 스타벅스인지 궁금하네요 대학로에 스타벅스만 네군데 정도 있거든요 전던킨도넟츠옆 스타벅스2층 에 자주 가곤 했었습니다 글 참 잘쓰셨네요 이름이철수라서 좀 몰입도가 떨어지긴 했지만요
11/04/17 03:04
수정 아이콘
나도 저랬으면 진짜 좋겠다ㅡ 이러면서 읽고 있는데 픽션이라니 ㅜㅜ
SCVgoodtogosir
11/04/17 03:31
수정 아이콘
아아악
11/04/17 09:35
수정 아이콘
아아아 [m]
11/04/17 10:25
수정 아이콘
실화가 아니라서 다행
응?
11/04/17 10:44
수정 아이콘
처, 천재다..........

제길슨... 눈물이 핑 돈게 허무해지네요 크크크크

정말 제가 다 좋아하다 말았네요..
11/04/17 11:09
수정 아이콘
다시 만나신줄 알고 신나서 읽어내려갔는데....;;;;;
너무 슬프군요...봄은 잔인합니다.
무지개빛깔처럼
11/04/17 13:31
수정 아이콘
너무 가슴아픕니다 ㅠㅠ 전 깨진지 3개월 정도 되거든요. 매일 생각나지만 연락도 못하는 것이 너무 안타깝고 서럽고. 글이 너무 마음에 와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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