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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4/06 20:20:55
Name 눈시BB
Subject [일반] 임진왜란 - 7. 형 왔다
왜놈은 얼레빗, 되놈은 참빗이라는 말이 있죠. 참빗은 다들 아실 거고 얼레빗은 참빗보단 덜 촘촘한 빗입니다. 말 그대로 일본군의 약탈보다 명군의 약탈이 더 심했다는 것입니다.

임진왜란에서 주로 부딪히는 IF 중 하나가 명군이 참전을 안 했으면? 일 겁니다. 명군의 역할을 얼마나 보느냐에 따라 결론이 달라지죠. 뭐 명군 없었으면 조선 먹혔다는 시각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_-; 일본에서는 조선은 이순신 외에는 거의 언급 없이 명나라와의 대결이라는 것에 중점을 두죠. 뭐 큰 게 좋다 이런 거 아니겠습니까.

어찌됐든 명군은 신나게 욕을 먹고 있습니다. 당대부터 그랬고 구원하러 왔대놓고 신나게 약탈하고 간 것, 정작 명군이 한 제대로 된 전투는 평양성 전투밖에 없다는 것, 선조가 명나라에게 너무 기댔다는 것, 그리고 현재 미군이 주둔한 현실과 비교하면서겠죠.

자, 시작해 봅시다.

1. 구원 요청
91년부터 이미 조선은 "정명가도" 요구를 명에 통보한 상태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적이 쳐들어오고 한양까지 함락되자 명도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었죠. 평양까지 후퇴했을 때 임세록 등 적을 탐지하기 위해 명에서 사신이 여러 차례 오죠. 신점은 이 때 명에 있다가 임란이 발발하자 밥도 먹지 않고 계속 구원군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6월 13일, 선조는 영변을 떠나면서 분조를 만듭니다. 세자 광해군으로 하여금 전쟁을 지휘하게 하고 자신은 중국으로 튈 지 말지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죠.

이미 한양을 떠나 개성으로 갈 때부터 선조는 내부, 중국으로 도망가기 위한 말들을 꺼냅니다. 이 때 이산해와 류성룡을 불러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괴로운 모습으로 말하기를" "이모야! 유모야!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내가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라고 하죠. -_-;
이 때 이항복은 의주로 가서 언제든 명으로 도망갈 수 있게 하자고 하고 윤두수는 북도의 병력이 강하니 함경도로 가자고 합니다. 선조는 이항복의 말이 어떤지 묻고, 류성룡은 "대가가 우리 국토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땅이 되지 않는다"고 했죠. 이 때 선조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부하는 것은 본래 나의 뜻이다."

... 더 덧붙일 필요 있나요? 동파관은 개성 근처에 있는 곳, 선조는 이 때부터 도망갈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겁니다. 말을 꺼낸 이항복은 류성룡한테 갈굼당하면서 "나중에 진짜 안 될 경우를 말한 거다"고 변명하죠. 뭐 자존심 생각 않고 현실적인 방안을 내세웠다고 평가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6월 14일. 선조는 요동으로 건너갈 것을 결정합니다. 그 뜻을 요동 도사에게 발송하게 하죠. 이 때 명에서 일부 병력을 보낼 것을 알리고 선조는 좋아서 대접할 준비를 하자고 합니다. 몇 일간 이런 논의가 계속되죠. 6월 17일에 이덕형은 의주로 가서 명군을 맞이하는데 이 때 병력이 일천명, 선조는 이들을 임빈관에서 맞이하면서 지금까지의 일을 자세히 알립니다. 뭔가 내용을 보면 징징 짠다는 느낌밖에 안 들지만 -_-;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B%82%B4%EB%B6%80&keyword=%EB%82%B4%EB%B6%80
이게 그 전문입니다.
이에 사신으로 온 송국신은 조선과 일본이 짜고 치는 줄 알았다고 하면서 가서 확실히 알리겠다고 하죠.

21일에는 윤두수가 요동으로 가지 말자고 하고, 이를 확실히 알려야 된다고 합니다. 안 들었겠죠. -_-; 22일에 "명나라 애들한테 말 해야 되나?"라고 하자 "오지 말라고 할 테니 지금 말 하면 안 된다"고 하죠. 23일에는 넘어가게 준비하라고 하는데 윤두수와 류성룡이 강력히 반대합니다. 이 때 윤두수가 필부(보잘것 없는 사람)이나 하는 짓이라며 말리죠.
24일에 황제가 은 2만 냥을 하사하고 "적이 서쪽으로 오면 출동하겠으니 군량을 준비해 놔라. 근데 왕은 어디로 갈 거냐"고 하고 "나라가 이 꼴이 됐으니 명나라의 보호만 기다린다. 제발 출동해 달라"고 하죠.

그 후, 윤두수가 배를 타고 남쪽으로 가는 건 어떨까 하는 식의 의논을 합니다. 명의 반응이 영 아니었거든요. 26일에 요동에 있는 빈 관아에 살게 하고 건너오는 사람들도 100명 이내로 줄이라는 말을 하고 그제서야 포기합니다. 그래도 한 나라의 왕이었는데 말이죠. 대신 명은 심유경을 파견합니다. "왜놈들한테 내 말 안 들으면 다 죽인다고 하겠다"면서 큰소리를 치죠. 히데요시와 아는 사이라고 자랑하는데... 글쎄요?
그나마 아직 미련이 남아서 7월 3일 이덕형이 요동에서 돌아오자 요동아 살기는 어떻니 물은 어떻니 하면서 물어보며 갈 수 있을까 물어보죠. 이덕형은 "한 고을도 남김 없이 떨어지면 가자"고 반대 의견을 내면서 사신을 접견하라고 합니다. 이 때 선조는 "평양에서도 일곱 번 만났는데 또 만나봐야 뭐 함 -_-"하면서 짜증을 내네요.

이 때 조승훈을 비롯한 소수의 명군이 17일 평양성을 공격하지만 실패하고 돌아갑니다. 이 때 병력이 명군 삼천에 조선군 삼천.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양성의 이점을 이용해 적을 성 안에 들인 후 공격하는 공성계로 별 피해 없이 승리합니다. 애초에 평양성 점령 때도 조선군의 매복을 걱정했던 고니시이니만큼 그걸 잘 활용한 거죠. 나름 반격을 계획하며 하삼도에 알렸던 조정은 급히 명군이 돌아갔다고 알리죠. 조승훈은 "우리가 먼 길 왔는데 니들은 제대로 돕지도 않고 어떤 놈은 항복하고 왜군에 대한 정보도 제대로 안 알려주니 뭐 하는 거냐"고 호되게 질책하고 갑니다. 조선이야 그냥 업드려서 굽신굽신-_-;

8월 2일에 보면 명군의 상황에 대해 의논하면서 "또" 요동으로 갈 뜻을 비추는데 신잡이 "필부가 되고 싶으면 가셈"이라고 하죠. 필부 드립이 윤두수가 한 거라고 알고 있었는데 일단 실록에 나오는 건 신잡이 한 말이네요.
8월 중에 계속 논의가 계속되는데 현재 군량 사정으로는 사오천밖에 안 된다. 가을을 넘어서 부르자. 일만 정도로는 안 된다. 사오만은 있어야 된다. 왜 안 온다고 하냐. 빨리 오라고 해라. 이런 식의 평화로운 회의가 계속 됩니다.

9월 1일. 심유경은 평양으로 가서 고니시와 회담, 50일간의 휴전을 얻어 냅니다.

2. 명나라의 상황

이상이 전쟁 초반에 있었던 설와설래입니다. -_-; 보시다시피 명은 평양을 떠난 직후부터 개입을 하긴 한 상태였죠. 다만 조선의 왕을 호위한다는 식으로 일천 정도의 병력만 보낼 뿐이었습니다. 애초에 명은 조선을 믿지 않았습니다. "고구려 때부터 대국"이었다는 게 명의 기본적인 인식이었으니까요. 만주를 잃고 한반도에만 집중했다고는 하지만 고조선, 고구려 때 힘들게 싸웠고 신라는 나당전쟁을 이겨냈으며 명의 조공국 1순위였습니다. 고려는 거란의 공격을 굳건히 막아내면서 동아시아의 강국 중 하나로 거듭났고 몽골과도 힘들게 싸운 끝에 부마국의 지위를 얻어냈습니다. 이런 나라가 한 달만에 살려달라고 빕니다. 어이가 없죠.
오히려 일본과 공모해서 명을 공격하는 게 아니냐고 의심하고 그걸 계속 확인하죠. 선조는 징징 짜며 아니라고 했고 겨우 조승훈의 원군과 협상을 위해 심유경을 보내는 걸로 끝납니다. 하지만 심유경은 평양성을 한 번 건드렸다가 혼줄 나고 도망가죠. 그래놓고 명 조정에는 "조선과 일본이 내통했다"고 하면서 파병 논의는 또 산으로 갑니다.
이 때는 영하지방에서 부총병 발배가 반란을 일으켜서 한창 진압 중이었죠. 명으로서도 쉽게 대군을 보낼 형편이 못 됐던 겁니다. 일단 급히 불을 끄기 위해 심유경을 보내 휴전협정을 맺었고, 반란이 평정되자 동정군을 편성합니다. 조선에서 계속 독촉하지만 강이 얼면 건너겠다느니 하면서 시간을 끌죠. 반대의견이 많았다고 하지만 이미 명은 조선이 "정명가도"를 알리고 초반에 일부 병력을 파병할 때부터 발을 담군 상태였습니다. 명은 조선을 무시할 수 없었어요. 200년간 정말 지극정성으로 사대를 했던 나라고, 최영, 정도전의 요동정벌을 무마시키며 철저하게 친명 정책을 추구했던 나라였습니다. 이~전에 말 나왔던 대로 "마일리지"는 충분했죠.

파병을 주로 주장했던 이는 병부상서 석성, 뭐 여기에서 나름 야사 비스무리한 게 있습니다만 무시하구요. -_-a 그 이전부터 명은 현재의 오키나와인 류큐 등에서도 일본에 대한 정보를 얻고 척계광이 절강성에서 왜구를 무찌르고 그에 대비한 편제를 짜는 등 일본의 위협을 경계해 왔습니다. 명의 칙사인 설반의 보고서에서 이 전쟁에 대한 명의 인식을 잘 알 수 있죠

[요진(遼津)은 경사(京師:수도=北京)의 팔이요 조선은 요진의 담장입니다. 200년간 복건(福建)과 절강(浙江)에 왜적이 침범했으나 요양은 그렇지 않았으며 이는 조선을 담장으로 삼은 까닭입니다. 만약 왜적이 조선을 점령한다면 요양이 하루도 안심할 수 없으며 배를 타고 오면 수도의 앞뜰인 천진도 화를 당할 것이며 북경이 진동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빨리 출정하면 조선 사람 힘을 빌려 왜적을 치는 것이되고, 늦게 출정하면 왜적이 조선사람을 이끌고 와서 우리와 싸우게 될 것입니다.]

명의 파병은 결국 이런 상황 끝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명에서는 최대한 피해 없이 끝내기를 원했고, 그것이 조승훈의 1차 파병에서 잘 드러납니다. 하지만 거기서 제대로 깨지면서 일본군이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결국 대규모의 파병이 불가피했죠. 이런 태도는 후에 강화협상에서 아주 잘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조선은 명의 파병에 결사적으로 매달렸죠. 평양이 먹히고 적이 언제 의주까지 올 수 없는 상황이었고, 후방의 반격이야 어떻든 당장 자기가 죽을 상황이었죠. 하지만 심심하면 요동으로 도망가겠다고 한 건 정말이지 -_-; 고니시가 더 이상 진격하지 않고 후방에서의 승전 소식이 계속 들리면서 안정을 찾게 되긴 합니다. 대신에 선조는 바닥까지 떨어진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세자에게 선위하겠다는 쇼를 벌이게 되죠. 이게 전쟁 동안 계~~속 벌어집니다.

일본으로서도 후방에서 보급줄이 계속 끊기고 전라도 침공이 완전히 좌절되면서 더 이상 진격할 힘을 잃게 됩니다. 그저 지금까지 얻은 땅을 토대로 버티기에 급급했죠. 그나마 함경도에서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의 왕자들을 사로잡으면서 정치적으로 큰 힘을 얻게 되었구요. 평양에서 어떻게든 버틸 자신은 있었을 겁니다.

3. 평양성 전투
92년 12월, 제독 이여송, 경략 송응창 등을 필두로 한 명의 대병이 압록강을 건넙니다. 25일 선조는 이여송을 영접하며 이제야 살겠다면서 기뻐하고 이여송은 주연을 술 두 번 받고 사양하며 "부산까지 적을 쓸어버리고 놀자"고 합니다. 그 휘하의 삼대장도 부산까지 쓸어버리겠다면서 자신감을 내비치죠. 에 뭐 아직까지는 개념 있네요.

1월 6일부터 명군의 위력은 여실히 드러납니다. 각종 화포의 위력이 드러났고 고니시군은 반격을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오히려 패하고 쫓겨났죠. 9일에 총공격을 벌이면서 고니시는 퇴로를 열어주기를 청하고 이여송이 받아들이면서 3일간에 걸친 평양성 전투는 끝이 납니다. 이 때 전과가 목을 벤 것이 1천 2백 85, 말 2천 9백 85필과 기물 4백 52건을 노획하고 사로잡힌 백성 1천 15명을 구출합니다. 그야말로 대승이었죠. 하지만 적의 저항도 만만치 않아서 양측의 피해가 일만에 달했다고 하는군요. 이여송이 퇴로를 열어 준 건 그만큼 명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였겠죠.

이 때 김응서, 이일 등의 조선군도 참전했는데 황엽이 80급을 베었다는 기록이 있고, 김응서는 퇴로를 열어주라는 명령에 분노합니다. 이 과정에서 양군의 충돌이 있었는지 이일이 이빈으로 교체되기도 하죠.

이여송은 승승장구하며 개성까지 진격했고, 선조도 천천히 남하하기 시작합니다. 평양에서 패한 일본군은 급히 후퇴하여 서울로 집결, 이를 따르지 않는 건 가토 기요마사 뿐이었죠.

4. 벽제관 전투
개성에 도착한 이여송은 병력을 정리하면서 개성의 백성들을 구휼하고 부하들에게 약탈을 하지 마라는 명령을 내리는 등 나름 개념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황제에게 류성룡과 윤두수 등의 신하들이 왜군을 칠 생각은 없고 술만 퍼 먹고 있다느니 하는 장계를 올리면서 까 버리죠. -_-; 어쨌든 조명연합군은 한양 수복을 계획합니다. 이 때 진주대첩에 대한 장계가 올라오고 권율은 조명연합군의 진격에 발 맞추기 위해 수원에서 행주산성으로 북진합니다. 한편 일본군은 한양까지도 지키기 힘들 거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가토가 반대하든 말든 전쟁이 더 이상 힘들다는 결정을 내리죠. 하지만 고바야카와 다카가게는 이대로 물러나면 적이 우습게 보게 되니 한 차례 싸움을 통해 적을 물러나게 한다는 주장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해 반격작전이 세워집니다. 애초에 명장이기도 했지만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 한 것에 대한 자격지심이었겠죠. 사실상 일본군 패배의 일등공신입니다. -_-;

1월 27일, 이여송은 2만의 병력으로 임진강을 건넜고, 우키다 히데이에 아래 집결한 일본군은 역시 2만의 병력으로 여기에 맞섭니다. 이 때 사대수, 조승훈의 명군은 조선의 고언백과 함께 적을 쳐서 600여 급을 베었고, 이 기세를 탄 이여송은 전군을 이끌고 벽제관으로 진격합니다. 하지만... 이게 매복이었죠. 이여송은 자기가 직접 활을 쏘면서 목숨을 걱정해야 될 정도의 상황에 빠졌고, 후퇴하고 맙니다. 개성까지 후퇴한 그는 이어 평양까지 가서 틀어박히죠. -_-; 이후 갖은 핑계를 대면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패배의 충격은 커서 명군은 후에 강화 회담에만 집중했고, 일본에서도 더 이상 한양을 지키는 게 무리라고 판단, 4월 8일부로 한양에서 철수하게 됩니다. 명군은 추격하지 않았고, 조선군의 추격조차 막았죠.

이 때 일본군은 두 왕자를 앞에 내세우고 조선의 광대들을 동원해서 마치 개선군 같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1년간의 급박한 전쟁은 멈췄고, 96년까지의 지루한 종전 협상만이 계속되었죠.

5. 명이 없었다면?
이순신이 없었다면과 함께 최고의 떡밥이 명이 없었다면? 이죠. 보통 "명이 없었더라도 우리가 이겼다"는 게 대부분입니다. 보면 명이 제대로 활약한 전투는 평양성 전투밖에 없고, 벽제관 전투 후부터는 아예 조선이 공격하려는 것도 필사적으로 막으면서 강화에만 몰두하죠. 선조를 비롯한 조선은 이에 결사 반대하지만 명은 요지부동, 경략 송응창은 "조선의 군신들이 내 말을 안 듣는다"면서 "오랑캐를 가르치는 어려움이 이와 같다"고 합니다. -_-; 결국 조선은 말 잘 듣는 오랑캐일 뿐이었죠. 조선에서 나름 여러 작전을 구상하고 실행하지만, 이 역시 명의 제지에 막힐 때가 많았죠. 이후 선조는 명나라 장수들의 강요에 의해 "일본과 강화해서 사직을 살려달라"는 글까지 황제에게 올리게 됩니다. 기분 참 좋았겠죠.
명군의 횡포는 "참빗과 얼레빗"의 비유에서 볼 수 있듯 엄청났고 군량을 전쟁이 지속되고 군량을 조선이 대게 되면서 피해는 더 커집니다. 선조는 명이 적극적이지 않은 것과 계속 피해를 주는 것을 깠죠. 하지만 선조나 신하들은 1, 2천 명을 이끄는 하급 장수에게도 굽신거려야 했고 명 장수들의 횡포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병마절도사까지 승진했던 박진은 사소한 잘못으로 명의 하급장수에게 두들겨 맞았고, 죽음에 이르게 되죠. 경주성을 수복하는 등 큰 공을 세운 걸 생각하면 너무도 허망한 죽음이었습니다.

거기에 당시 조선의 활발한 반격으로 일본군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고, 이 정도면 명 없어도 충분히 반격이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가정이 가능합니다. 다만 생각해 봐야 될 점은, 조선이 반격을 하고 있었다고 하나 일본군 역시 악착같이 버티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경상도군은 큰 규모로 모여서 반격하기는 힘들었고, 평안도까지 후퇴한 상황에서도 조선은 반격할 엄두를 낼 수 없었습니다. 믿을 건 권율의 전라도군 뿐이었는데 이 단독으로 한양을 탈환할 수 있을 가능성은 적죠. 고니시가 평양을 점령한 후 북진하지 않은 것은 군량 등의 한계 때문이겠지만 아예 군사행동을 할 엄두를 못 낸 것은 명이 초반에 병력을 보내서 직접 개입을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미군의 숫자보다 미군이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를 가지듯 일천 정도라고 하나 명이 직접 나섰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죠. 이후 평양성 전투에서 명군은 사만 삼천, 이후 팔천이 더해져서 오만의 대군을 이루게 됩니다. 단독병력으로 오만의 존재는 엄청나죠.
그런 점에서 저는 당시 조선군으로는 결정타를 날릴 수 없었고, 일본이 철수한 직접적인 이유로 명의 참전을 꼽고 싶습니다. 기세가 중요한 전쟁에서 명군은 평양성을 탈환하면서 반격의 실마리를 마련했고, 조선군이 공세를 전환하는데 큰 도움을 줬습니다. 이 전투 하나와 명이 직접 개입했다는 것 자체의 의미가 큽니다.

조선군 단독으로도 겨울이 지나고 일본의 피해가 극에 달할 때에 퇴각시킬 수 있었겠지만, 하필 겨울에 명군이 와 버려서 -_-; 확실히 추측하기 힘들고 결정타가 없는 이상 일본군의 후퇴는 더 늦춰졌을 것입니다. 즉, 임진왜란 당시에 명군은 할 만큼 한 거죠. 거기다 휴전 중에 전염병이 돌면서 조선군은 큰 타격을 입었고 단독으로 쫓아내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유재란 때는 시작부터 명군이 주력이 돼 버려서 더 이상의 가정이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잘못을 따진다면 선조에게 더 물려야 될 것입니다. 아무리 절박한 상황이라고 하나 명군에 너무 큰 비중을 뒀고, 휴전이 성사된 이후 조선군의 비중을 극도로 줄이면서 계속 명에게 의존합니다. 명군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던 선조가 나중에 "재조지은"을 외치며 조선군의 활약을 평가 절하하고 명을 찬양하는 모습은 정말 재밌죠.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명의 참전은 개전 1년만에 적이 후퇴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그 점은 인정해 줘야 됩니다. 조선군 단독으로도 적을 후퇴시킬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시간은 역사보다 길었을 거구요. 하지만 명은 소극적인 태도로 전쟁이 다시 벌어지는 명분을 만들어 줬고, 그 공만큼이나 많은 피해를 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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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을 뒤적거리다 선조가 한 게 어이 없어서 초반에 쭉 써 버렸네요. -_-; 에휴... 뭐 이런 식입니다. 선조와 명이 하는 짓거리는 앞으로도 쭈욱 나옵니다.
해전편을 하나로 줄이려고 했는데, 그것도 좀 늘여야겠네요. -_-a 계획을 좀 바꿔서 다음 편은 "전쟁이 끝나는가"입니다. 두 대첩을 다뤄보면서 휴전 협상과 일본군의 피해를 보도록 하죠. 그 다음에 휴전 후 정유재란까지의 기간을 다루고 임진왜란편을 끝내겠습니다. 그리고... 기다리시고 기다리시던 임진왜란 해전사 편을 시작하죠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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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4/06 20:38
수정 아이콘
양아치 좀 쫓아 내라고 형 불렀더니 보호비 명목으로 돈만 뜯고 집안에 들어와 밥이나 축내고 양아치 하고는 잘 싸우지도 않고 막상 싸울때도 신통찮고;;; 이 형 왜왔죠?
11/04/06 20:40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봤습니다.
다음 글도 기대가 되네요.
명군이 밥만 축내는 놈들은 맞았지만
심리적인 면에서 일본군의 사기를 꺾는데 주요했다고 생각합니다.
있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이 드네요.
11/04/06 20:43
수정 아이콘
음 흥미롭습니다. 제가 군대에서 병장시절 할게 없어서 임진왜란에 관한 책을 읽은게 있는데 임진왜란은 조선이 승리한 전쟁이고 어쩌구

서양은 러시아가 프랑스에 모스크바까지 발렸다가 추위+보급+재정비후 역습으로 위대한 승전이라고 설명한 책을 다 읽은적이 있었는데..

하여튼 그 책 논지도 관군과 명군이 정말 한거 없다는것은 뻥이라는 관군은 첫 1년만 발리고 이후에는 잘 싸웠다라는 논지였는데..

음.. 하여튼 이 임진왜란 시리즈 다시 읽으니 그때 그책도 생각나고 신비롭기도 하고 그렇네요.. 정말 잘 읽고 있습니다..
나이트해머
11/04/06 20:47
수정 아이콘
전투력 측면에서 명군의 도움은 임란보다는 재란때가 더 크죠. 명군이 10만여 가량 들어왔으니.

이것도 꽤 이야깃거리가 많은 편인데 시간여유가 없군요.
간단히 윤민혁님의 짤막한 글이나 하나 달아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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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가 달라질 뿐 원칙 자체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좋은 예가 임진왜란입니다만, 임진왜란 시기 명군은 5만 정도인 원정군의 병참부담을 본국에서 감당하지 못해 결국 조선에서 현지조달을 했습니다. 일본군 20만 역시 현지조달을 했고요. 그 대가는? 명군 5만 명을 위한 병참소요 지원 중 수송소요로 최소 30만 이상의 조선군과 거의 비슷한 숫자의 민간인이 동원, 1594년 기준으로 최소 2~30만 명 정도는 명군 병참소요에 대한 직접적인 노력동원의 결과 과로 및 굶주림으로 죽었습니다. 사람을 소나 말 수준으로 부려먹은 탓이긴 한데, 이 사람들이 제대로 영양을 공급받기만 해도 죽지 않았을 것이고, 덤으로 서해를 통한 물자 공급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 조선의 기아상이 알려진 뒤 명에서 대량의 쌀과 좁쌀을 서해를 통해 수송, 1593년의 흉년기를 겨우 넘겼습니다. - 는 걸 생각할 때, 군의 작전기동에 따른 병참지원이라는 게 그 시대에도 어마어마한 부담을 주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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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ypemoon.net/bbs/board.php?bo_table=freeboard&wr_id=553789&sca=&sfl=wr_name%2C1&stx=%C0%B1%B9%CE%C7%F5&sop=and

원문은 여기. 주제가 '중세시대의 보급' 인가 했는데 하다보니까 임란 관련한 댓글도 다셨더군요.
28살 2학년
11/04/06 21:04
수정 아이콘
저는 명이 비록 많은 도움이 되진 않았지만 명이 없었다면 종전도 빨리 오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명의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않아도 워낙 대군이었기에 왜군의 주력을 계속 잡아 놓을수 있었고 이에 전투력이 분산된 왜군은
의병에게 더욱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됩니다. 그리고 이에 보급선이 취약해지며 밀릴수밖에 없었구요.
또 한가지 효과를 들자면 위에 Ben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감이 작용해서 무리한 전술을 사용하도록
유도하는 효과도 있구요.
요건 현대전의 전술개념에도 들어갑니다. 이름이 뭐였더라..... 전직 전술학 교관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네요 크크

명 입장에서 봤을때 출병을 안했으면 누르하치나 홍타이지에게 그렇게 속절없이 발리지는 않았을거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조선 입장에서는 후금이 그렇게 크지 못했으면 인조가 대가리박아를 안했을지도 모르구요... 인조는 까야 제맛인데..
키스도사
11/04/06 21:31
수정 아이콘
아 이번편도 잘봣습니다. 야구도 하는 마당에 이걸 작성하시다니 대단합니다. 물론 오늘 꼴데야구는 뭐.....

나중에 이순신장군이 진린과 합류후 승전을 거두자 선조가 "별거 아닙니다. 이게다 명의 덕분입니다" 라는 이야기도 나오죠.
이순신을 싫어해서이기도 하지만.
11/04/06 21:42
수정 아이콘
명말고도 조선의 파병 하겠다고 하는 나라가 있었죠
하나는 훗날에 후금을 세우고 20만 조명연합군을 쳐부순 누르하치가 있었습니다.
누르하치는 명나라를 통해 파병을 요청 하였고 명은 당시 조승훈이 평양성에서 패한후라서 강남에 정예병이 오기까지 시간이 너무 걸리기 때문에
누르하치의 조선 파병을 심각하게 고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조정에서 누르하치 파병요청으로 술렁이게 되는데 왜의 침입보다 더큰 화를 입게 될것이라고 강력히 반대 하게되죠
아마 누르하치가 파병 하였다면 동북아 역사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또 하나의 나라는 '샴' 오늘날의 태국인데요
태국 사신이 명에 가서 자신들이 함대를 이끌고 일본 본토를 치겠다고 큰소리를 쳤답니다.
그리고 명측에서 조선정부에게 섬라(샴의 한자식표기)와 류큐연합군이 일본을 본토를 칠것이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답니다.
그러나 조선 조정에서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 다는데요 '쿠빌라이도 못한것을 섬라가 할수 있겠는냐' 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태국은 당시 미얀마의 침입으로 파병할 여유가 없었고 명에가서 자신들이 강함을 보이기 위해서 허세를 부린 겁니다.
결국 태국파병을 이루어지지 않았죠
양정인
11/04/06 22:59
수정 아이콘
만약... 명의 수도가 '북경' 이 아니었다면 명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11/04/06 23:17
수정 아이콘
잘 읽고 있습니다. 병부상사 석성의 야사도 궁금한데요. 가르쳐주세요~!
눈시BB
11/04/06 23:30
수정 아이콘
나이트해머 님// 흔히 알려진것과 달리 명나라는 조선에서 식량을 자급할 생각이 없었고, 잘갖추어진 관리체계를 따라 지속적으로 수십만석에 달하는 군량미를 의주지방으로 보급해 주었으며 그곳에 운반된 수십만석의 막대한 식량은 조선정부로 인수인계되었다. 그리고 조선정부가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군인들에게 보급을 해줘야하는데 문제는 조선정부에게는 그런 대규모의 군량을 운송시킬 능력이 없었다. 그에따라 의주를 비롯한 압록강변의 국경에는 엄청난 양의 군량이 비축되면서도 전방의 군인들을 굶주림에 시달리는 기현상이 발생;;;

이때문에 전방의 명군이 굶주림에 시달리며 아사자가 다수 발생하기 시작하자 빡친 명나라조정이 조선정부를 여러차례 맹비난하며 빨리 군량미를 운반할것을 요구했으나... 조선은 못하겠습니다로 일관하며 명나라정부를 더더욱 빡치게 만든다.

이런 어처구늬없는 일때문에 명군은 명나라정부가 보낸 수십만석의 군량을 보급받지 못하게되고, 결국 명나라 조정은 자급자족을 위해 수많은 은전을 전선으로 보내는 것으로 방침을 선회하게 된다. 문제는 명나라에서는 은본위 제도가 정착해서 은자의 사용이 당연시 되었으나, 사실상 물물교환에 의존하는 열악한 화폐경제체제를 지닌 조선에서는 이런 은자가 소용이 없었다. 따라서 명군은 계속해서 굶게 되었고(;;) 이에 빡친 명군의 약탈이 시작되게 되었다.


이라는 내용이 엔하위키에 있는데 그에 관해 아시는 거 있나요? 저로선 처음 들어보는 소리라서요. 전쟁 초반에는 명군이 군량도 대려고 했다고는 들었지만요.
토스희망봉사
11/04/07 00:23
수정 아이콘
명은 어차피 이자성의 난으로 망한것이죠 물론 후금의 침략을 막느라 이자성을 거의 칠뻔한 병력을 눈물을 머금고 회군해야 했고 이게 결정타가 되기는 했습니다 북쪽을 굳게 지켰다면 이자성의 난은 어떻게든 진압이 되겠지만 그전에 이미 10만의 대군이 후금에게 당했기 때문에 이자성이 아니더라도 오래 못갔을지 않나 생각 합니다.
루크레티아
11/04/07 00:42
수정 아이콘
명나라의 파병은 그저 조선을 위한 생색내기 용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이여송은 몰라도 심유경은 아예 싸우려는 의도 자체도 그닥 보이지 않았고 말이죠. 반면에 왜군 입장에서는 설마설마 하던 일이 진짜로 터졌으니 심히 난감했을 것 같습니다. 속사정을 모르는 마당에 당장 몇 만이나 되는 명나라 군대가 들이닥치니 가뜩이나 이곳 저곳에서 산발적으로 얻어맞던 입장에서는 심리적 결정타나 다름이 없었겠고 말이죠. 결국에는 선조가 욕을 디립다 얻어먹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으니 참 중국이라는 나라는 우리에게 밉상으로 보일 수 밖에 없는 나라 같습니다.
11/04/07 00:44
수정 아이콘
혹 왜란종결자 라는 책 읽어보셨나요?
만약 그렇다면 그책에 묘사된 이순신장군이나 선조 히데요시 신립
원균 등의 모습들이 실제와 비교하면 어떻다고 생각하시나요?
무리수마자용
11/04/07 00:51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삼국지나 임진왜란이나 어릴때 읽었을때는 참 쉽게 보였는데 머리에 피좀 마르고 나서 읽으니까 어른의 사정이라는게 녹록치 않음을 깨닫습니다.
11/04/07 14:24
수정 아이콘
명나라 조선 원정이 실제 명에게도 상당히 무리로 작용했고
그 덕분에 명의 멸망?을 상당히 앞당겼다고 하는데,
정말 명의 임진란 참전이 그정도로 무리한 거였나요?

이 부분에 대해 좀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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