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말체인 점 양해바랍니다.*
[책 리뷰] 욕망해도 괜찮아 – 나는 지금 누구의 삶을 살고 있는가
(김두식,
[욕망해도 괜찮아], 창비, 2012.)
욕망해도 괜찮아? 섹스를 먼저 떠올리다
저자의 솔직담백한 고백과 가감 없는 내면의 이야기를 들은 만큼, 나 또한 솔직하게 리뷰를 시작하고 싶다. 처음 새빨간 표지에 커다랗게 적힌 이 책의 제목
[욕망해도 괜찮아]가 눈에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성(性), 더 정확히 말해 섹스였다. 사실 욕망, 그리고 색(色)과 계(戒)의 영역을 다루는 담론에서 섹스를 떠올리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만큼 색(色)의 영역 혹은 욕망이라는 영역 안에서 섹스가 차지하는 지분이 결코 적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책
[욕망해도 괜찮아]는 성에 대한 개방적인 담론만을 주구장창 늘어놓는 뻔한 책은 아니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욕망이란 결국 우리가 삶의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모든 종류의 억눌림과 답답함, 또 모든 종류의 외로움과 공허함의 근원일 것이다. 곧, 욕망은 외로움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가벼운 보폭으로 시작해서 무의식의 내면을 깊숙이 건드리는 각 장의 이야기들이 생각보다 더 풍성하고 인상깊게 다가왔다.
내 안의 거울을 들여다보기
[오늘 내가 하는 말, 쓰는 글 중에 '유명해지고 싶다' 또는 '잘난 척하고 싶다'는 욕망을 지워도 그대로 남아 있을 문장이 몇 개나 될까요.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올리는 글 중에 은근히 잘난 척하는 걸 빼고 나면 몇 개나 남을까요. 한번 세어보십시오. 그런 말을 하지 말고, 그런 글을 쓰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 말, 그런 글을 빼고는 별로 할 얘기가 없는 게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자는 겁니다. 자신이 욕망의 덩어리임을 인정하고 나면 남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길은 한결 따뜻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p.44/ 거울부터 들여다보기 中)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라면 글쓴이의 솔직담백한 욕밍아웃(?)에 있다. 즉 평생을 규범 안에서 모범적으로 살아온, 이른바 뼛속까지 '계(戒)의 인간'인 저자가 자신의 욕망, 즉 색(色)에 대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놓는 솔직함. 이러한 정직함과 진솔함이 독자들에게까지 전염되어 읽는 이를 무장해제 시키는 힘이 이 책엔 분명히 있다. 나 또한 첫 번째 장 '거울부터 들여다보기'의 글쓴이의 솔직한 자기 고백을 읽으며 곰곰이 생각해봤다. 나는 왜 글을 쓸까?
'내 글을 통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고 누군가에게 힘과 위로를 주기 위해.'라고 막연히 생각해왔던 나는 다시 한 번 내면의 거울을 들여다본다. 정말 그 것 뿐일까? 어쩌면 더 내밀하고 본질적인 욕망이 따로 있는 건 아닐까? 이를테면, 많은 이들로부터 글솜씨를 칭찬받고 싶다는 욕망. 즉,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유명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더 내밀하고 본질적인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 사실 그렇다. 지금껏 누군가로부터 칭찬받고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을 대놓고 드러내며 글을 쓴 적은 단 한 번도 없고 나 스스로도 이런 욕망을 속물적이라고 규정하며 선을 긋고 부정해왔지만, 사실 누군가로부터 칭찬받고 또 누군가에게 잘난 척하고 싶은 욕망은 어쩌면 내가 글을 쓰는 본질적인 힘이자 원동력인지도 모른다. 이른바 욕망은 나의 힘이랄까.
지난 내 모습을 찬찬히 되돌아보면 사실이 그랬다. 누군가 내 글재주에 대한 칭찬을 한 줄이라도 댓글에 적어놓으면 마우스 휠을 올렸다 내렸다하며 여러 번 곱씹어 읽으며 흐뭇해하곤 했다. 이상하게도 그런 칭찬들은 아무리 여러 번 읽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반면, 내 글재주나 본문 내용과 하등 관계없는 내용으로 댓글이 점철되거나 혹여 댓글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하고 많은 글 중에 왜 하필 여기 와서 이러고들 있나.' 라는 짜증섞인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내가 남들에게 드러내 보이고 싶은 고상한 작가정신(?)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기에 항상 이런 내 모습을 애써 부정하고 이러한 욕망은 내 것이 아니라며 경계해왔다. 더 과거로 돌아갈 것도 없이, 이것이 지금 현재의 나인 것이다.
나는 왜 나이키를 사달라고 하지 못했나
[욕망과 규범에 대해 고민하면서 최근 이런 의문이 생겼습니다. 나는 왜 부모님께 모터 달린 조립식 전차나 자동차를 사달라고 한 번도 이야기하지 못했을까, 정식으로 말씀드렸다면 못 사주실 형편도 아니었는데.···(중략)···나는 왜 나이키 운동화를 사달라고 한 번도 말씀드리지 않았을까, 간청한다면 안 사주셨을 리도 없는데.···(중략)···그런 '계'의 세계에서 인정받는 모범생이던 저는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뭘 사달라고 매달리거나 투정 부리는 일이 없던 소년의 내면에는 '갖고 싶다'는 욕망이 고스란히 눌려있었습니다. 카메라 가게 앞에 서 있는 중년의 아저씨도, 충동적으로 세계문학전집을 구입하는 아저씨도, 모범생 이미지 속에서 끈임 없이 소소한 일탈을 꿈꾸는 아저씨도 모두 그런 분위기에서 만들어졌고요.] (p.184/ 색의 인간, 계의 인간 中)
이 부분을 읽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남들에게 칭찬받고 인정받으며 관심받고 싶은 내밀한 욕망의 근원에는 어쩌면 마음껏 욕망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 성장 과정의 경험이 뿌리내리고 있는 건 아닐까. 즉, 서른 한 살의 성인이 된 나의 욕망은 동시에 내 안에 미처 다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 이른바 열다섯 살짜리 꼬마아이의 욕망인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책의 글쓴이와 마찬가지로 나 또한 어린 시절 부모님에게 무엇을 사달라며 징징대고 떼써본 기억이 없다. 친구랑 싸우거나 학교에서 속상하고 억울한 일이 생겨도 절대 엄마, 아빠에게 얘기하지 않았고 부모님에게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는 일은 되도록 피하려고 노력했다. 괜시리 부모님에게 털어놔서 엄마, 아빠 속을 상하게 만들고 마음 아프게 만들 바에는 나 혼자서 조용히 씹어 삼키고 넘기는 것이 낫다고 어린 마음에 생각했던 것 같다.
엄마, 아빠를 속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고, 부모님을 실망시키거나 부모님의 기대를 배반하고 싶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이런 나 스스로가 철들어보였고 또래 친구들에 비해 성숙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마음껏 욕망하지 못하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못했던, 소심하고 마음 약한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누군가의 지지와 격려, 그리고 칭찬과 사랑이 그리웠던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그렇게 공부를 통해, 연애를 통해, 그리고 글쓰기를 통해 이렇게 끊임없이 세상을 갈구했던 것은 아닐까.
색(色)과 계(戒)의 경계에 서서
[영화 속의 이와 왕 자즈는 색과 계의 경계선에서 목숨 건 고민을 계속합니다. 간통현장에서 붙잡혀 조사를 받는 남녀도 어느 시점엔가는 그런 고민을 했겠죠. 색과 계의 경계선 사이에서 방황하고 갈등하는 사람이 그들만은 아닐 겁니다. 이런 문제가 몸, 살, 섹스와 관련해서만 터지는 것도 아닙니다. 매일의 아주 작은 일상에서도 우리는 자기 내면의 욕구에 충실하려는 색과 남에게 그럴듯하게 자신을 포장하려는 계 사이에서 갈등을 겪습니다.] (p.282/ 고백은 나의 힘 中)
결국 이렇게 내면의 욕망과 감정을 억압하는데 익숙해진 채로 성장한 아이는 어른이 돼서도 자신의 욕망을 알지 못한 채 그렇게 계의 세계에서, 규범 안에서 안전하고 평화롭게 지내게 된다. 하지만 나는 때때로 불안했고 또 이유 없이 외로웠다. 그 불안과 외로움이 내 안에 억압되고 갇힌 또 다른 어린아이의 욕망이자 내면의 목소리라는 점을 그때는 깨닫지 못했다.
[감정수업]의 강신주 식으로 표현하자면 규범으로 정의되는 '계'의 세계란 '선(Good)과 악(Evil)'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세상인 반면, 욕망으로 정의되는 '색'의 세계는 '좋음(good)과 나쁨(bad)'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세상인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렇듯 규범 안에서 보장받은 안정된 '계'의 삶은 내게 편안함과 안락함을 주었지만, 그것이 결코 삶의 기쁨과 행복까지 담보해주진 못했다. 인생의 갈림길마다 항상 내가 원하는 길을 선택하며 내 뜻 때로 살아왔다고 믿었지만 사실 뒤돌아보면 그 '원하던 길'마저도 규범 안에서 누군가가 정해놓은 '선(善)의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내 안의 욕망이 아닌, 이른바 규범 안의 욕망. 더불어 이따금씩 시도한, 욕망으로의 일탈마저도 지나고 보면 규범 안에서 수용가능한 안전한 탈선이었을 뿐이었다. 마치 영화
[설국열차] 안에서, 열차 시스템의 통제 하에 이루어진 커티스 혁명대의 예고된 반란처럼.
욕망해도 괜찮아
이렇듯 규범으로 점철된 '계'의 세계는 우리들에게 너무나 많은 '선(Good)과 악(Evil)'의 행동준칙들을 제시한다.
["사내 녀석이 함부로 우는 거 아냐."
"여자 나이 서른이면 시집가야지."
"공부해라. 명문대 나와야 사람대접 받는다."
"니가 애니? 아직도 이런 걸 좋아하게."
"결혼은 현실이야, 사랑이 밥 먹여주니?"
"그냥 포기하고 잊어, 붙잡아봤자 달라지는 거 없잖아."]
'계'의 세계에선 그 어느 누구도 "괜찮아."라고 함부로 말해주지 않는다.
["울어도 괜찮아."
"시집 좀 안 가면 어때, 혼자 살아도 괜찮아."
"그게 정말 하고 싶으면 해. 공부 못해도 괜찮아."
"애라고 놀림 받으면 어때, 좋아해도 괜찮아."
"결혼은 현실이지만, 그래도 니가 살고 싶은 삶을 살아. 그래도 괜찮아."
"붙잡고 싶으면 포기하지 마. 못 잊겠으면 끝까지 가 봐도 괜찮아."]
이 모든 '괜찮아'에는 뒷말이 생략되어있다.
"괜찮아. (네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리고 행복해도 괜찮아
김어준의 말처럼 사실 이 한 세상, 짧은 우리네 삶, 아등바등 열심히 사는 것이 결국 이 한 몸뚱이 행복하자는 수작 아닌가. 하지만 그 행복하려는 발버둥 속에서 정작 우리들의 진짜 행복은 어디로 사라진 채, 누군가에게 담보 잡혀있는 것일까. 왜 지금껏 나는 나 스스로에게 "괜찮아."라고 속 시원히 말해주지 못했나. 뭐가 그렇게 두렵고 불안했을까. 이러한 두려움을 떨치고 스스로의 삶을 온전히 선택하고 책임지는 길은 과연 무엇일까.
[거품을 거두고 자기가 정말 누구인지, 뭘 원하는지 살펴보는 건 모두에게 중요한 과제입니다. 자기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자기가 누군지를 아는 것이야말로 모든 문제해결의 출발점이니까요.···(중략)···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내면에 꿈틀거리는 욕망을 잘 다독이며, 자신만의 공간을 지키고, 깊은 내면을 이웃과 나누다보면, 나도 모르는 새 주변에는 같은 길을 걷는 친구들이 하나씩 늘어납니다. 비슷한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 혼자서도 행복할 줄 아는 개인, 사냥꾼의 광기 속에서 남을 지켜주려는 따뜻한 이웃,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서로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동지들이죠. 그런 개인들과 아주 작은 연대가 싹트고 나면, 이 험한 정글 속의 삶도 한결 견딜 만합니다.] (p. 284, 301/ 고백은 나의 힘 中)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내게 주어진 첫 번째 숙제는 하나였다. 내 안의 거울을 들여다보며 내 자신에게 "괜찮아."라고 스스럼없이 말해주기. 더불어 그만큼의 온전한 책임감도 부여해주기. 어느 누구도 내게 함부로 "괜찮아."라고 얘기해주지 않는 이 갑갑하고 조심스러운 세상에서, 나 스스로라도 이렇게 얘기해주기로 마음 먹었다.
'욕망해도 괜찮다'고. 그리고 '마음껏 행복해도 괜찮다'고.
이 험한 세상, 나라도 너의 든든하고 열렬한 1호 팬이 되어주겠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