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7년은 견훤에게 최고의 한 해였습니다. 서라벌을 침공해 경애왕을 죽였고, 이걸로 왕건을 낚아서 대승을 거두었죠. 하지만 신숭겸이라는 활 잘 쏘는 놈 때문에 왕건이를 놓쳐버렸으니... 왕건을 잡았다면 쉽게쉽게 후삼국시대를 끝낼 수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이 때 이미 견훤 나이 61세, 환갑이었습니다. 이런데도 계속 전쟁터 나다닌 거 보면 대단합니다만... 문제가 컸죠.
뭐 그래도 일단 지금은 치고 나갈 때였습니다. 이렇게 2년, 승승장구를 계속합니다. 헌데 이런 상황에서도 경순왕은 왕건이랑 붙으려고 하네요. 신라와 고려의 연결을 끊고 신라를 완전히 복속시킬 때였습니다.
장소는 고창, 대군을 동원해 고창을 포위하게 됩니다. 여기가 먹히면 죽령 이남이 다 먹히는 거였죠. 왕건도 이를 대비해 3천명을 주둔시켜둔 상태였습니다. 헌데 후백제가 너무 셌죠. 왕건은 장수들을 불러모읍니다.
"싸움이 만일 불리하면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 시작부터 이러고 있습니다. -_-; 장수들은 어땠냐구요?
"만약 불리하게 되면 죽령(竹嶺) 길로 돌아 올수 없게 될 것이니 빠져 나갈 길을 사전에 수리하여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 홍유, 공훤
이러고 있습니다. -_-... 그런데 말이죠.
"제가 들으니 무기는 흉악한 도구요 전투는 위험한 일이라 죽자는 결심을 가지고 살려는 계책을 생각하지 않은 연후에 비로소 결승할 수 있다고 하는데 지금 적과 대치하고 있으면서 싸우기도 전에 먼저 패배할 것을 생각하는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이요? 만약 급히 구원하지 않으면 고창(古昌)의 3천여 명을 고스란히 적에게 주는 것이니 어찌 절통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진군하여 급히 공격하기를 바랍니다."
그 이름 유금필(유검필), 네 싸우면 언제나 이기는 고려의 에이스가 나선 거였습니다. 왕건은 이 말을 따라 친정했고, 유금필의 대활약 속에 아주 대승을 거둡니다. 여기서 고창의 호족인 삼태사의 도움이 컸고 왕건은 동쪽을 안정시켰다 해서 안동으로 이름을 바꾸죠.
이 하나로 분위기는 완전히 바뀝니다. 호족들이 아무리 자기 이익대로 논다 해도 경상도 쪽의 호족들은 친신라였고, 신라에 호의적인 왕건이 더 나았죠. 명분도 명분이지만 신라에 그런 짓을 저지른 견훤보단 왕건이 자기들에게 더 잘 해 줄 거 아닙니까. 이런 상황에서 왕건이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힘도 왕건이 더 세다, 그럼 답은 간단하죠. 이걸로 양주의 호족들까지 왕건에게 붙습니다. 현 포항, 울산의 호족들도 붙어버렸죠.
이런 상황에서 분위기 좀 바꿔보겠다고 뒷치기를 시도합니다. 수군으로 예성강 유역을 공격한 것이죠. 작전은 제법 성공했습니다만 참소를 받아 귀양갔던 유금필이 돌아와 버립니다. (...) 그리고 유금필은 933년 견훤의 신라 침공 때 단 80명으로 구원갑니다.
"만약 여기서 적을 만나면 나는 필연코 살아서 돌아 가지 못할 것인데 다만 그대들이 같이 희생당할 것이 염려되니 그대들은 각자가 살 도리를 잘 강구하라"
"우리들이 모두 죽으면 죽었지 어찌 장군만을 홀로 살아 돌아 가지 못하게 하겠습니까?"
... 그리고 승리, 거기다 경주 갔다 돌아오는 길에 또 이겨서 백제장수 7명을 생포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이 때 백제군 대장이 바로 신검 (...)
934년, 왕건은 웅주의 운주성을 공격합니다. 현 충청도, 여기를 뚫으면 후백제는 전라도만 남게 되는 거였습니다. 이전부터 왕건은 한 타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걸 위해 930년에 천안에 대규모 군수기지를 완성시킨 상황이었습니다. 견훤은 급히 요격하니 이 때 그의 나이 68세였죠. 헌데 맞서자마자 화친을 시도합니다. 몸이 안 좋았던건지 늙고 계속 지니 마음이 약해진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상황에서도 친정할 정도로 중요한 곳이긴 했다는 거겠죠. 그런데 말입니다.
"오늘의 정세는 싸우지 않을 수 없으니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염려마시고 저희들이 적을 격파하는 것이나 보십시오!" - 유금필
이걸로 끝 (...) 이걸로 웅진(부여) 이북 30여개성이 우르르 왕건에게 항복합니다. 경상도에 이어 충청도까지 이렇게 됐으니 후삼국의 미래는 결정난 것이나 다름없었죠.
후백제 최악의 상황, 헌데 이런 중요할 때 곪을대로 곪아 온 내부의 상처가 터져 버립니다.
"처음에견훤 이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멀리 대궐 뜰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리므로, 이게 무슨 소리냐고 묻자신검 이 아버지에게 아뢰었다. “왕께서는 늙으시어 군국의 정사에 어두우시므로 장자 신검 이 부왕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해서 여러 장수들이 기뻐하는 소리입니다.” 조금 후에 아버지를 금산의 불당으로 옮기고 파달 등 30 명의 장사를 시켜서 지키게 하니, 동요에 이렇게 말했다.
"가엾은 완산 아이 아비를 잃어 울고 있도다"
- 삼국유사
이를 주도한 능환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습니다. 이찬이니까 백제의 주요세력이지 않았을까 하는 정도죠. 견훤이 군인일 때부터 따랐는지 호족인지도 잘 -_-a 아무튼 그와 신검, 양검, 용검이 힘을 합쳐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폐위시키니 935년이었습니다.
이 때 양검은 무주도독으로, 용검은 강주도독으로 가 있었습니다. 형들에게 확실한 무력이 있었는데도 금강을 앉히려고 한 건 참... 뭐 이성계의 경우부터 다른 참 많은 전례들을 보면 딱히 이상하진 않습니다.
후백제의 쿠테타, 고려에게는 참으로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여기에 최고의 대박이 터졌죠.
"견훤이 막내아들 능예와 딸 애복 및 애첩 고비 등과 함께 나주로 도망친 후 고려에 입조하겠다고 요청했다. 이어 장군 유금필과 대광 왕만세 등을 보내 군함 40여 척을 거느리고 해로로 견훤을 맞아오게 했다."
견훤은 유금필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 (...) 이 때가 935년 6월, 최고의 명분이 손에 들어온 것이죠. 여기다 10월에는 신라의 경순왕이 항복해 옵니다. 12월에 받아들이고 서라벌의 이름을 경주로 고치니 이렇게 신라 천 년의 항해가 끝나게 되죠. 이제 남은 것은 후백제 뿐이었습니다.
"이 늙은 신하가 멀리 바다를 건너와 성군께 투항했으니, 원컨대 그 위엄을 빌려 역적 아들을 처단하고자 하나이다"
936년 2월, 순주(현 순천)의 박영규가 몰래 귀부해 옵니다. 견훤의 사위였죠. 견훤이 백제를 떠난 상황, 신검이 후백제 내의 혼란을 잘 정리했을수도 없고(하기에도 짧은 시간이었고) 고려의 계속된 뒷공작의 결과였겠죠. 여기에 견훤이 직접 후백제 정벌을 요청합니다. 역적 아들들을 자기가 직접 처단하겠답니다. 이보다 더한 명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왕건은 그리 서두르지 않습니다. 우선 천안에 태자인 왕무와 박술희에게 1만을 보내 대기하게 했고, 전국에서 후삼국시대 사상 최대의 병력을 모읍니다. 여기에 보급을 위해 낙동강 곳곳에 군량기지를 설치했구요. 이렇게 모인 10만 대군으로 일리천, 현재의 구미로 향합니다. 이건 그냥 백제를 깨뜨리기 위해 모은 게 아니죠. 삼한 전체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리는 마지막 전투였습니다.
이 때 백제군이 얼마나 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습니다. 당시 백제의 영토에서 최대한을 뽑으면 6만 4천이 모인다고 합니다만 혼란 상태였을테니... 어쨌든 가능한 한 대군을 동원했겠죠.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은 고려로 기울어진 상태였죠. 국력도 군사력도 명분도 말입니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애술 등 4명이 견훤의 말 앞에 무릎을 끓습니다. 백제를 세우고 여기까지 이끌어왔던 자가 이제 백제를 없애러 온 것입니다. 어찌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백제군의 사기는 꺾일대로 꺾였고, 고려군의 총공격 한 방에 무너져 버립니다. 신검 등 수뇌부는 황산까지 도망쳤다가 항복합니다. 참 여기는 백제와 인연이 깊은 곳인가 봅니다. 안 좋은 쪽으로요.
이렇게 근 50년을 끌었던 후삼국시대가 끝납니다. 보통 이 시대의 시작을 892년, 견훤이 무진주(광주)에서 칭왕할 때로 잡습니다. 다시 말하면 견훤은 후삼국시대를 열었고, 끝낸 것이죠.
이 때 그의 나이 70세, 그의 목숨도 여기서 끝납니다. 불과 며칠 후 절에서 등창으로 죽은 것이죠. 사서에는 왕건이 신검을 용서해준 것 때문에 열 받아서 그랬다고 합니다만...
자기가 세운 나라를 자기가 없앤다, 세계 역사에서 이런 인물이 정말 더 있기는 할까요? 그 때 그의 심정은 어떘을까요? 나주에서 배 타고 개성으로 갈 때, 생포된 아들들과 재회했을 때, 그리고 죽음의 순간... 참 길고 험했던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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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은 신라 백성으로 일어나 신라의 녹을 먹으면서도 불칙한 마음을 품었으며, 나라의 위기를 다행으로 여겨 도성과 고을을 침략하였다. 그는 새를 죽이고 풀을 베듯 임금과 신하를 살육하였으니 천하의 원흉이었다. 그러므로 궁예는 자기 부하로부터 버림을 당하였고, 견 훤은 제 자식으로부터 화를 입었다. 이는 모두 자업자득이었으니, 누구를 다시 원망하겠는가? 항 우와 같이 뛰어난 재주로도 한 나라의 흥기를 막지 못하였고, 이 밀과 같이 뛰어난 재주로도 당 나라의 흥기를 막지 못하였거늘, 황차 궁예나 견훤과 같은 흉한이 어찌 우리 태조에게 대항할 수 있었으랴? 그들은 다만 태조에게 백성들을 모아주는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삼국사기에 나온 견훤에 대한 평입니다. 욕하고 빈정거리는 느낌인데 마지막 말은 맞다는 게 함정 (...)
삼국유사에는 좀 특이한 기록이 있습니다.
"내가 신라말에 후백제를 세운 지 여러 해가 되었다. 군사는 북쪽의 고려 군사보다 갑절이나 많으면서 오히려 이기지 못하니 필경 하늘이 고려를 도우는 것 같다. 어찌 북쪽 고려왕에게 귀순해서 생명을 보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이렇게 말하니 신검양검용검 다 반대했다는 내용인데요. 애초에 항복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인데... 진심인지 그냥 명분용으로 넣어둔건지는 모르겠네요. 재밌는 건 이게 936년으로 나온다는 거죠. -_-; 935년 때 한 말을 잘못 넣었을수도 있고 (따라서 이게 쿠테타의 원인 중 하나가 맞고) 936년에 고려에 있을 때 편지라도 보낸 게 아닌가 싶기도 한 부분입니다.
아무튼 이후 견훤은 환생해서 고려의 마지막을 지키게 되고 박영규는 전생의 장인어른과 친하게 지내는 권신이 되고 신검은 고려를 무너뜨리는 데 한 몫 한다는 전설이 (...)
원래는 나주 공방전으로 하나 써볼랬는데 시간이 안 돼서 이거라도 ㅠ 써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