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하니 좀 만만한 걸 주제로 삼아 보도록 합시다.
후삼국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고려의'가 맞겠죠. 자세하게 다뤄볼 수 있는 건 고려밖에 없거든요. 궁예 휘하의 장수 중에서 왕건 편에 들지 않는 이상 서술은 이렇습니다.
"태조가 왕위에 오른 후 반란을 일으켜서 참수되었다."
견훤 휘하의 장수에 대한 서술은 이렇죠.
"무슨무슨 전투에서 태조에게 패해서 붙잡히거나 항복했다."
... 어쩌란 말입니까. 결국 이 시기 몰락한 장수들은 후손도 제대로 못 남기면서 족보로라도 그 뒤를 가늠할 수 없죠. 그래도 누구 누구가 인정받지 않았을까 추측도 해 보면서 글을 시작하겠습니다. 사실 완벽하게 미괄식 글입니다.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인물에 주목하세요. ( - -); 뭐 제 글을 이제까지 보신 분들은 누굴 위해 쓴 글인지 짐작 가시겠죠. 아무튼... 저번 글을 연표 보듯이 보셨다면, 이번에는 그냥 주요 인물 열전 보듯이 봐 주세요. 마지막만 빼고 말이죠.
1. 고려
- 신숭겸, 박술희
드라마에서 긴 수염과 충성심 등으로 관우 포스를 보여 준 장수죠. 명대사로 '형님폐하!'가 있죠. 원래는 전라도 출신이라고 합니다. 그 때문에 유랑민이라는 설이 있는데, 패서 출신도 아니면서 사기장의 자리에 오를 정도면 그 능력이 대단했다는 거겠죠. 초명은 능산, 왕건에게 신씨 성과 숭겸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습니다. 그의 활쏘기는 유명합니다. 어느 날 왕건이 '저기 기러기 중에 앞에서 세 번째 맞춰봐라' 하니까 진짜 그렇게 맞췄고, 이에 왕건이 감동 받아서 그 땅을 신숭겸에게 줬다고 하죠.
사기장 중 하나로 왕건의 역성혁명(왕건 편 얘기하니까 혁명이라고 해 줍시다)을 주동했고 개국 공신 1등에 랭크되죠.
하지만 그의 진정한 활약은 바로 공산 전투. 포위된 왕건을 대신해 갑옷 등을 입고 돌격해서 전사, 그 동안 왕건은 무사히 도망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후에 그의 시체를 발가락에 있는 사마귀로 찾았다고 하며 머리를 결국 찾을 수 없어 황금으로 만들어서 대신했다고 하죠. 왕건은 술자리에서 나무로 그의 모습을 만들어서 함께 했다고 하며 술을 따라주자 술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고려시대 충신의 대명사로 조선시대까지도 평산 신씨는 무반 가문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게 신립이죠.
박술희는 면천 박씨의 시조죠. 18세 때 이미 궁예의 호위병이 될 정도로 무예를 알아줬다고 하네요. 그 희한한 먹성으로 유명합니다. 개미와 개구리, 뱀까지도 먹었다니 정말 -_-; 이런 면과는 달리 문무에 다 밝아서 왕건이 혜종을 부탁했을 정도입니다. 훈요십조를 받은 사람이고 혜종이 죽는 순간까지 모셨지만 후에 참소로 몰려서 귀양갔다가 결국 암살... 개국공신이자 그의 활약을 생각하면 참 아쉬운 최후죠. 오래 사는 게 오히려 도움이 안 됐을지도요. 아무튼 지지기반이 약했던 혜종의 후견인을 부탁 받을 정도였다면 그의 위치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드라마에서는 정말 개그캐릭터였죠. 장비의 이미지가 씌워지면서 전쟁터에서는 그야말로 맹장으로 날뛰면서 아자개 앞에서 문자 쓰는 반전도 보여 주고...
아마 유금필보단 이 둘이 더 유명할 겁니다. 신숭겸은 역성혁명을 주도했고 주군 대신 죽는 모습으로 충성심의 화신으로 얘기 되고, 박술희도 훈요십조를 남기면서 교과서나 역사 만화에 등장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으니까요.
- 홍유, 배현경, 복지겸
궁예 때의 사기장으로 역성 혁명의 주체들입니다. 홍유의 경우 청주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유금필과 함께 파견되는 등 여러 활약이 보이죠. 역성혁명 당시에는 왕건을 거의 윽박지르듯이 하면서 왕위에 오르길 청하는 강경파의 모습을 보여주죠. 그래서인지 드라마에서는 공신 세력의 주축으로 유금필과 라이벌 의식을 느끼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실제로도 유금필과 의견이 다른 모습이 나옵니다. 문제는 그게 고창 전투에서 도망갈 길을 미리 확보하자 같은 약한 모습이라는 거 -_-; 하지만 이런 발언도 할 정도면 발언력이 컸다는 거겠죠. 아무튼 세 사람 중 가장 야전 사령관의 느낌을 보여줍니다.
배현경은 인사 문제 등에서 잘못된 점이 있으면 직언도 서슴치 않는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왕건도 그를 신뢰했으며 그가 죽었을 때 '죽으니 어쩝니까 ㅠㅠ 그래도 님 자식 있으니 님 절대 안 잊을거예요'라는 말까지 했다고 하네요. 초명이 백옥삼이라고 하는데 이 때문에 병사에서부터 자수성가한 인물일 거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전투면 전투, 정치면 정치 양 쪽에 다 어울리는 인물인 것 같네요.
복지겸의 경우 딱 국가정보원 느낌으로 각종 반란 등을 알아내는 역할을 했죠. 특히 개국 직후 환선길, 이흔암의 반란을 정말 귀신같이 알아내는데 이 때문에 그가 일부러 적대 세력 청산을 위해 누명 씌운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오죠. 다른 사기장들에 비해 전투에 나선 기록이 전무한 게 특이합니다. 역시 국가정보원 내지 경호실장의 임무를 한 듯 하네요. 그래서 장수보다는 군사 내지 모략가의 이미지를 씌우는 사람도 있더군요.
아무튼 세 명 다 개성은 뚜렷하네요. 홍유는 야전 사령관 쪽, 복지겸은 경호실장 쪽, 배현경은 전투 정치 양 쪽 다.
- 염상, 박수문, 박수경
염상은 개국 2등공신입니다. 드라마에서는 은부 휘하의 내군이었다가 설득에 의해 등을 돌린 걸로 나오죠. 전투보다는 축성의 기록이 많이 나타나는데 그 때문에 축성 전문 장수라는 평가가 나오죠. 그 외에 청주 호족 경종이 반란을 일으키다 잡히자 용서해줄까 하는데 처벌을 주장하죠. 이런 걸 보면 엄격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물론 그 때문에 유력한 호족 공직이 백제에 투항합니다.) 후에 왕건의 유언을 들을 정도면 그가 얼마나 신임 받았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박수문, 박수경 형제는 평주 호족 박지윤의 아들로 패서 지역을 대표하는 장수라고 할 만 합니다. 이 중 박수문은 주로 축성에서 모습을 보이고 박수경의 경우 나름 전공이 보이는데, 조물성 전투에서 패할 때 하군을 맡아 겨우 백제군을 이길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발성(어딘지는 모릅니다)이라는 곳에서 왕건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큰 전공을 세웠죠. 이 전투는 박수경 열전에만 나오고 공산 전투 후로 추측되는데 왕건이 이 때 얼마나 지고 다녔는지 짐작 가능하기도 하죠.-_-;
- 김락, 전의갑, 전이갑, 전락, 김언
의외로 묻히는 인물이 김락인데... 대야성을 공격할 때 주장을 맡습니다. 그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죠. 이후 공산 전투에서 신숭겸과 함께 특공대를 조직해서 적의 시선을 돌리는 역할을 맡죠. 왠지 신숭겸에게 가려지네요.
전의갑, 전이갑은 정선의 호족으로 정선의 두 영웅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양주, 광주, 상주, 나주 등에서 큰 활약을 했다고 하네요. 그리고 공산 전투에서 이 두 장수와 그 사촌 전락은 왕건을 호위하다 장렬히 전사합니다.
김언은 왕건이 나주를 점령할 때 함께 했던 장수로 왕건이 시중에 오른 후 수군대장에 오릅니다. 수군 작전과 나주 방어에 있어서 왕건의 바로 아랫자리로 볼 수 있죠. 그 이후 기록이 없는 걸로 봐선... 나주가 다시 뺏기는 과정에서 전사한 걸까요? 드라마 등에서 이걸 따랐던 거 같은데요.
대~충 대~충 아예 호족 출신으로 세력 쌓은 사람은 뺐는데 이 정도네요. 사실 보면 더 많습니다. 고려는 후백제에 비해 풍부하니까요. 뭐 여기저기에서 말 할 기회 있겠죠?
2 궁예
- 환선길, 이흔암
태조 왕건의 영향 덕분인지 세트로 붙는 두 사람입니다. 환선길은 '유금필!'과도 맞설 만한 맹장으로, 이흔암은 환선길을 형님이라 부르면서 뭔가 개그 역할을 맡는 장수로 그려졌죠.
환선길. 마군장군. 왠지 궁예 휘하 맹장 하면 환선길이 떠오르지만 그 역시 왕건의 역성혁명에 참가한 한 명입니다. 알려져 있는 것은 참 짧죠. 마누라의 꼬임에 넘어가 (니도 능력 있으면서 남 밑에 있음?) 반란을 일으켜놓고 호위 병력 없는 왕건을 치려다 너무 태연해서 도망치다가 참수. -_-; 왜 이환경씨는 환선길에게 맹장이라는 역할을 줬을까요? 아무튼 이런 아내의 말에서 그가 쿠테타 이전에는 왕건과 비슷한 위치 내지 능력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은 해 봅니다만... 설은 많죠. 진짜 궁예의 측근이었고 그 충성심 때문에 그랬다는 것, 그냥 세력이 커서 숙청당한 것 등등... 진실은 정말 저 너머에 있을 것 같군요. 같이 죽은 동생 향식과도 역시 세트로 취급됩니다.
이흔암. 사실 할 거면 이흔암을 좀 높게 쳐 줘야 됐습니다. 마군'대'장군이었거든요. 일단 출세한 건 '은밀한 일을 탐지해 바치는 것으로 신임을 얻어'라고 나옵니다. 좋은 말은 안 나오네요.
현재의 공주인 웅주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쿠테타 후 허락 없이 올라옵니다. 그리고 올라온 뒤 얼마 안 지나서 역모 혐의가 드러나서 참수당하죠. 근데 그 이유가 겨우 마누라가 화장실에서 '우리 남편 일이 잘못 되면 다 큰일 남' 이라고 한 걸 복지겸의 부하가 들어서였으니... 왜 다 아내의 잘못으로 모는지 모르겠지만 이 아내의 성이 환씨라서 환선길과의 연관성이 의심되는 겁니다.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마군대장군이라는 직함이나 웅주를 맡았다는 점 등에서 군사적인 위치 하나만큼은 왕건과 비교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왕건의 주요 전장은 나주 아니면 상주 등 경상북도 일대였죠. 백제의 옛 도읍이었던 지역을 맡았다는 것은 그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이후 웅주는 백제에게로 넘어가고, 왕건이 북쪽 운주를 함락시켜 웅주 이북의 성들이 대거 항복할 때도 웅주만은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해에 왕건이 직접 공격했는데도 함락되지 않았죠. 이 정도면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백제와의 연관성도 무시할 순 없지만요) 반란을 일으킬 거면 그 자리에서 직접 하지 왜 굳이 수도로 올라갔느냐 하는 등의 의문점은 있겠습니다만, 환선길과의 연관성, 고려 개국 후에 곧바로 반란으로 참수당한 점, 마군대장군이라는 직함과 웅주를 맡고 있었다는 점 등에서 궁예 휘하의 명장이라 한다면 이흔암이 유력하다고 봅니다.
- 은부, 종간
태조 왕건에서 그 카리스마를 펼쳤던 두 사람이죠. 이흔암과 마찬가지 이유로 쿠테타 후에 바로 죽었다는 것만으로 둘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은부의 경우 내군장군, 말 그대로 친위대였죠. 종간 역시 드라마에서의 카리스마 있는 모습이든 사서에 적혀 있는 간신이든 궁예의 최측근이었을 겁니다. -_-; 뭐 일단 기록은 간사, 아첨, 어질고 착한 이를 참소, 이런 말들로 나옵니다.
- 금대검모흔장귀평장일
궁예가 명주(강릉)을 얻은 후 다시 태백산맥을 넘어 서진할 때 사상, 각 부대의 대장으로 임명한 인물들입니다. 크게 김대검, 모흔, 장귀평, 장일로 나누거나 금대, 검모, 흔장, 귀평, 장일로 나누죠. 전 후자 쪽을 편듭니다만... 이 이후엔 등장 안 합니다. 아마 후고구려 건국 후 초적 출신이라서 밀려났거나 고려 건국 후 숙청에 포함되었던가, 이름이 다르게 적힐 뿐 여전히 잘 살았거나 했겠죠. 이 중 그나마 찾을 수 있는 사람이 귀평으로 호족 출신이라서 궁예가 성공한 후 자기 땅으로 돌아갔다는 말도 있고 고려 건국 직후 관직을 받은 사람 중에 귀평이라는 이름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한자는 다릅니다만.
3 백제
- 관흔
공산 전투 직후에 갑자기 보이는 인물입니다. 현 김천시 서쪽 영동군, 양산성에 축성을 하다 고려의 왕충이 방해하자 대야성으로 후퇴, 후에 다시 북상해서 대목군 구미시 남쪽 칠곡군, 대목군을 함락, 다시 북쪽으로 가서 오어곡성을 함락하죠. 왕건이 항복한 장수 6명의 처자식을 죽인 바로 그 오어곡성입니다. 백제가 승승장구할 때 이름이 나오는, 아니 기록에서 승리한 장수로 나오는 정말 몇 안 되는 백제 장수입니다. 계속된 백제의 공격으로 조령과 죽령이 모두 백제에게 먹히는데 역시 이 때도 참전하지 않았을까 하네요. 그렇게 따지면 백제의 에이스라고 볼 수도 있는데... 이 이후 기록이 없습니다. 고창 전투 때 전사라도 한 건지 신검이 숙청이라도 해서 거기서 죽은 건지...
기록에 남은 백제의 승장이라는 것 때문에 조조전 기반 게임인 태조왕건전에서는 홍유도 이길 뻔 하고 유금필의 라이벌로 나옵니다. 지금 생각하면 드라마에서 안 나온 게 참 아쉬운 인물입니다. 딱 공산 전투 직후 경남에서 경북으로 왕건을 압박하는 포스가 대단할 거 같은데요.
- 추허조, 수달
927년 7월, 그렇게 힘들게 얻었던 대야성은 고려에게 무너집니다. 이 때 잡혀서 처형된 장수가 추허조였죠. 이 때 사로잡힌 병사가 겨우 30명. 전투 후 성을 부쉈다는 점에서 엄청난 혈전이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고 (오죽 때려부쉈으면 -_-;) 이 요충지를 맡았다는 점과 후에 왕건이 견훤에게 보낸 답서에도 그의 이름(추조라고 언급됩니다)이 나오는 걸로 봐서 그의 위치를 추측할 수 있죠. 예. 추측만요. ㅠ_- 덕분에 드라마에서 견훤의 거병 당시 장수였다는 특혜를 입습니다.
수달은 서남해 일대의 해적으로 왕건이 한창 나주를 공격할 때 기습해서 죽이려는 걸 오히려 반대로 기습해서 잡았고, 궁예에게 바쳤다고 합니다. 정말 해적 소속이든 견훤 휘하였든 꽤나 영향력 있었을 거라는 짐작이 가죠. 그래서 드라마에서는 견훤의 창업 기반 중 하나로 의형제로 나옵니다. '수달이가 죽었어!' 는 다들 기억하시죠?
- 상귀, 상애
상귀는 백제의 일길찬으로 932년 수군을 거느리고 예성강을 공격, 사흘간 머물면서 배들을 다 불태우고 300필의 말을 잡아 옵니다. 예성강이라면 정말 코 앞인데 말이죠. 상애는 그 뒤를 이어 대우도를 공격, 노략질 했다고 합니다.
... 관흔과 함께 승리한 걸로 남은 백제 장수들입니다. 이 셋 빼면 없어요.
- 최견
거란에 외교 사절로 갔다가 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당나라 등주에 상륙했다가 잡혀 죽었습니다. 묵념.
- 상달, 최필
운주성 전투에서 사로잡힙니다. 그래도 '용맹한'이라는 수식은 해 줬네요.
- 덕술, 애술, 효봉, 명길
일리천 전투에서 견훤과 싸우기 싫어 항복. 뭐 그냥 고려군이 너무 세 보여서 항복했을지도요.
- 견달, 부달, 흔강, 우봉, 영식, 은술
일리천 전투에서 패배해서 생포. 글 쓰기 참 쉽네요.
진짜 이 정도가 다예요. 물론 후백제의 주요 거점 무진주를 맡아서 방어해 낸 견훤의 사이 지훤, 몇 번이나 주인을 갈아 탄 공직, 궁예 후손이라는 이상한 기록이 남은 김총, 궁예와 빼 놓고 얘기할 수 없는 김순식 등 호족들에 대해서 할 얘기 많지만 그건 다른 글에서 하는 게 나을 것 같구요. 그럼... 여기까지 봐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4. 유검필/유금필
드디어 나왔습니다. 유금필! 고려의 에이스! 후삼국시대에서 결코 빼 놓을 수 없는 주역! 시작합니다.
원래 이름은 유검필로 읽어야 된다고 합니다. 검, 금으로 읽을 수 있는데 사람이름으로 할 때는 검이라고 불러야 된다고 하네요. 금이라고 읽을 경우는 묘지명에 쓸 때나 한다고 하는데 어째 유금필로 너무 알려져 버렸습니다. 평주 호족 박지윤의 휘하로 후에 궁예 아래에서 마군장군에까지 오릅니다. 하지만 그의 활약은 거의 볼 수 없죠. 고려 개국 공신에도 4기장에 밀리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설마 병졸 출신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아래부터는 유검필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아마 궁예 시절에도 북쪽을 주로 맡지 않았나 싶네요. 왜냐면 그의 첫 활약도 북방 안정이었거든요. 그럼 시작합니다. 뭐 가볍게 전적을 살펴보죠.
우선 역성혁명 직후, 918년에 청주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홍유와 함께 그 곳에 주둔합니다. 여기까지는 홍유와 함께 움직였죠. 어쩌면 홍유 휘하의 장수였을지도 모르겠네요.
920년. 북방 골암진에 오랑캐가 자꾸 침입해 오자 왕건은 유검필을 보냅니다. 그 3년 후, 유검필은 추장 300여명을 초대해서 잔치를 열고 한창 분위기가 달아올랐을 때 다 붙잡아서 위협합니다. 여기에 겁먹은 추장들이 항복하고 그 추장들의 본거지에 전령을 파견해서 '니들 대장 항복했으니 니들도 항복해라'고 해서 모두 항복. 이 때 귀부한 자가 천오백이고 구출한 고려 사람이 삼천 명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윽박지르기만 한 건 아닌지 나중에 유검필은 이들에게 대추장이라고 불렸다고 하네요. 실제 일리천 전투에서도 북방 기병들을 이끌었던 걸 보면 꾸준히 여기에 투입되어서 나름 큰 세력을 만든 거 같습니다. 태조 왕건에서 유검필이 탄핵 당할 때도 왕 대신에 오랑캐들에게 만세 소리를 들었다는 게 명분이었죠.
925년. 유검필은 정서대장군이 되어 충청도에 주둔합니다. 10월에 연산진(충북 문의), 임존군(충남 예산)을 쳐서 적장 길환을 죽이고 3000여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고 합니다. 역시 같은 달에 조물성 전투가 벌어졌는데, 왕건은 상중하 삼군 중 둘이 무너지고 하군의 박수경이 분발해서 겨우 패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견훤에게 철저히 밀리는 가운데 유검필이 참전했죠. 그러자 전력은 백중세. 겨우 화친이 맺어지죠. 왕건이 견훤을 상보라고 불러야 될 정도의 상황이었으니 역전하진 못 한 거 같지만, 유검필이 도착한 것만으로도 전력이 비슷해졌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길공구님은 이 두 전투가 같은 10월에 벌어졌다는 걸 생각해서 조물성에서 왕건이 위험하자 유검필이 백제의 방어진을 뚫고 도착했다는 가설을 세우시더군요. 이게 맞을 경우 유검필은 200KM를 돌진하면서 성 두 개를 깨뜨리고 왕건을 구한 겁니다.
928년. 그의 진정한 활약이 시작됩니다. 이 때 왕건은 공산 전투의 패전으로 다수의 장수를 잃은 상태였죠. 이를 타개해 보려고 삼년산성을 쳤지만 패배, 적은 궁예 때부터 고려 영토였던 청주까지 밀려듭니다. 유검필은 이를 급히 구원, 왕건을 구합니다. 결국 이 때까지 유검필은 백제에 대해서는 주장의 위치가 아니었다는 거겠죠. 아마 신숭겸, 김락 등의 전사와 홍유 등의 공신세력이 백제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계속 패하면서 구원투수로 등장한 게 아닐가 합니다.
929년. 고창 전투. 왕건군은 계속되는 패전으로 사기가 땅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공훤, 홍유 같은 공신조차도 도망갈 길을 확보해 놔야 된다고 했죠. 하지만 유검필은 여기서 밀리면 안 된다면서 공격을 주장, 선봉에 서서 적을 크게 무너뜨립니다. 왕건은 고창의 승전을 유검필의 공이라면서 크게 칭찬하구요.
931년. 유검필은 참소를 당해 유배를 갑니다. 그 곡은 곡도. 하지만 정황상 개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섬이었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죄인의 몸으로 병력을 훈련시킬 정도면 정말 죄를 지어서 간 유배가 아니라는 거겠죠. 이건 그의 기반이 그리 탄탄하지 않았다는 것 (패서 출신인데도 말이죠), 이래저래 정치적으로 밀려서 견제를 많이 받았다는 것, 하지만 왕건의 신뢰를 엄청나게 받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딱 이 시기에 백제는 수군으로 예성강 등에 빈집털이를 시도했고, 유검필은 이에 맞서 '백제가 우리 해안을 공격하고 있지만 내가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막고 있으니 걱정 말라'는 상소를 올립니다. 여기에 감동한 왕건은 그를 귀양에서 풀어주죠. 역시 정치적인 부분이 큰 귀양이었을 겁니다.
933년. 유검필은 정남대장군으로, 마침내 후백제를 상대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이 때 신검이 경주 주변을 공격하며 서라벌을 공격할 움직임을 보이는데 하필 왕건에게는 급히 움직일 병력이 없었습니다. 유검필 말고는 말이죠. 유검필이 급히 동원할 수 있는 병력 역시 소수. 하지만 유검필은 단 80기의 장사들을 뽑아 출전합니다. 중간에 사탄이라는 여울에서 신검군과 만나게 되는데, 유검필은 "여기서 적을 만났으니 살아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니네 목숨이 걱정되니 알아서 살 길을 찾아라"고 하고 혼자서라도 가려고 하죠. 이에 부하들이 "어찌 장군 혼자만 죽게 하겠습니까" 하면서 80의 소수 정예에 강력한 버프가 걸리고, 신검군은 이에 두려워서 도망갑니다. 예. 단 80기로요.
그 길로 경주에 도착한 유검필은 일주일 동안 머물면서 신라를 안심시키고 돌아갑니다. 이 때 아마 추가 지원군이 도착했겠죠. 돌아가는 길에 다시 신검을 만나서 또 격파, 적장 7명을 생포합니다. 이쯤 되면 백제의 악몽, 신검의 악몽입니다.
934년. 충청도 운주에서 견훤은 최후의 공격을 감행합니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고려의 대군에 쫄아버리죠. 나이 때문일지, 이미 승기가 기운 것 때문일지 견훤은 화친을 청합니다. 왕건은 이를 듣고 받아들일까 고민 하죠. 이 때 다시 유검필이 나섭니다. 유검필은 미처 준비가 안 된 백제군을 공격, 3000을 참하고 최필, 종훈 등 많은 장수들을 생포합니다. 이걸로 백제의 최후의 저항은 허망하게 끝나 버립니다.
935년. 왕건은 나주를 수복할 계획을 세웁니다. 박술희와 홍유가 나서지만 왕건은 유검필을 보내죠. 왕건은 직접 예성강 포구에 나가 유검필을 격려하고, 유검필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나주를 점령하고 돌아옵니다. 역시 왕건은 예성강까지 가서 맞이하죠. 같은 해 견훤은 금산사를 탈출하고 유검필은 다시 나주로 가서 견훤을 데려 옵니다.
... 이 정도면 후삼국시대 후기에 유검필 없이 진행된 사건이 대체 뭐가 있을까요?
936년. 일리천 전투에서 유검필은 흑수, 철륵, 달고 등 북방의 기병 9500을 거느리고 중군장으로 참전합니다. 여기서 후삼국의 통일을 본 후 941년 세상을 떠나죠. 유검필이 죽은 후 왕건은 그의 자손이 무슨 죄를 지어도 묻지 말고 중용하라고 했습니다. 덕분에 죄를 저질렀음에도 조상 잘 만나서 용서 받고 벼슬을 받은 이들도 있을 정도였죠.
이렇게 북쪽에서는 대추장이요 남쪽에서는 백제의 악몽으로 남은 장수가 유검필입니다. 지다가도 유검필이 가면 이기고 그의 말만 들으면 무조건 이기는, 이런 모습을 보여 준 사람은 정말 찾기 힘듭니다. 소설로 쓴다면 좀 현실적으로 쓰라고 욕 먹을 것이고 역사에 나오면 사료의 조작을 의심해야 될 정도죠. 드라마에서도 박술희와는 신나게 싸우던 애술이 유검필 보면 무섭다고 도망가고, 궁예의 맹장으로 설정된 환선길도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구요.
사실상 삼한통일의 일등공신이며 고려 전기 최고의 명장이었습니다. 정말 이를 누구에 비유해야 될까요? 불펜에서 몸 푸는 선동렬? 언제 선발로 나온다는 말로도 상대를 포기하게 하는 류현진? 팀원이 다 지자 손 풀고 일어나는 이영호?
인물 중심으로, 영웅 중심으로 보는 걸 그리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역시 이런 존재는 정말 혼자서 역사를 바꾼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게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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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좀 급히 내용을 너무 몰아서 두 편을 썼습니다. 이 두 편은 본편 들어가기 전에 정리한다는 느낌으로 생각해 주시구요. 현재 생각하고 있는 주제는 이렇습니다.
- 신라를 접수하는 자, 삼한을 접수한다 : 경상도에서의 혈전. 아마 대야성과 상주 등을 중심으로 얘기를 다룰 듯 합니다.
- 장보고의 후예 : 예성강, 나주, 강주에 이르는 제해권을 다투는 이야기. 뭔가 장보고 얘기는 안 나올 건데 제목만 멋드러지게 만들었네요.
- 놈놈놈 : 후삼국시대의 주인공 세 명이죠. 허스트 3세는 후삼국시대를 얘기하면서 왕건-견훤-궁예에 서부 영화의 놈놈놈 법칙을 대입했습니다.
- 호족시대 : 때론 장군을 자칭하고 대세에 따라 고개를 숙이던 그 당시 호족들의 이야기죠.
잘 쓸 수 있을지... 일단 해 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