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전장 카트르브라에서 성공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전장 몽생장으로 후퇴한 웰링턴은
결국 이 때문에 전투에서 이기게 됩니다.
1815년 벨기에의 한지방에서 향후 한세대를 결정지을 중요한 전투가 일어 납니다.
나폴레옹이 12만 8000명의 프랑스 군이 국경을 넘어 웰링턴과 블뤄허가 이끄는 총 21만7000명의
영국- 프로이센 연합군을 공격하면서 시작된 이 전투는
리니와 카트르브라, 그리고 와브르를 거쳐 몽생장에서 절정을 맞이하게 됩니다.
정작 워털루에서 전투가 일어 나지 않았는데, 우리는 워털루 전투로 알고 있는 전투가 바로
그것입니다.
프랑스 군
프랑스 군은 20년 이상 지속된 전쟁을 통해 명성을 쌓은 전설로 이루어 졌습니다. 물론 프랑스 혁명전
쟁이나 나폴레옹 전생을 통틀어 최고 드림팀은 아니었지만, 비범치 않은 인물로만 이루어졌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정점에 역사상 최고의 장군 나폴레옹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존재 만으로도 최강국
영국을 비롯하여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 당대 열강을 뭉치게 만들 정도 였습니다.
총사령관 나폴레옹
나폴레옹은 이시기 분명히 한물이 간건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당대 최고의 장군이었던
건 사실입니다. 나폴레옹의 절묘한 전략 때문에 12만의 병력을 가지고 21만의 병력과 싸워 거의 이
길 뻔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집중력과 판단력이 떨어진 건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워털루 전투 전초전인 리니와 카트르
브라 전투의 결과 질 수 없는 전투를 결국 그가 범한 실수 때문에 패했기 때문었습니다.
(마치 은하영웅전설의 라인하르트가 열병 때문에 소설 후반 전투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과
비슷합니다.
참모장 쟝 술트
술트는 변호사 출신이었으나 병사부터 시작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혁명기의 영웅이었습니다. 라인전선과
네덜란드, 이탈리아에서 모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1803년 부터 시작된 나폴레옹 전쟁 부터는 기량이 많이 하락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는 이탈리아 전역에
얻은 부상 때문이 컸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순발력이 많이 하락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서도 프리들란드 전투와 코루나 전투에서 프로이센군과 영국군을 패배시켰습니다. 그러나 이베리
아 반도에서 영국의 애송이 아서 웰즐리에서 패배하여 명성에 흠을 입습니다.
그리고 워털루에서 전후 생소한 참모장 역할을 맡게 됩니다. 사실 계속 야전 지휘관만 한 그에게는 그 직책
은 무리였다는 걸 전투 내내 보여 줍니다.
하지만 그를 참모장에 임명한 책임은 비록 사고로 죽은 전임 참모장 베르티에가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를 임명한 나폴레옹이 져야 했습니다.
좌익- 미셸 네
네는 나폴레옹의 매제이자 당대 최고의 기병 사령관 뮈라 보다는 못하지만 좀더 머리 면에서 나은
용장이었습니다.
그는 전직 공증인이자 광산 감독관 출신었습니다. 원래 나폴레옹 보다는 그의 경쟁자이자 뛰어난
장군 모로의 휘하 출신었습니다. 그러나 운이 좋게 모로의 반역에도 살아남은 그는 능력을 인정
받아 원수로 기용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격이 급하고 충동적인 그는 나폴레옹도 분명히 사고 능력에 한계가 있는 장군으로 생각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침착하고 꾀 많은 웰링턴과 상대하는 좌익에 위치한 것은 진정한 진정한 인선 실패 였
습니다. 그는 변변히 웰링턴의 꾀에 넘어 갔고, 본 전투에서 몇차례 잘못된 명령을 내림으로써,
전투에 패배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우익- 그루쉬
프랑스 왕정의 기병 출신인 그루쉬는 나폴레옹의 마지막 원수 였습니다. 이 때문에 정작 나폴레옹
전쟁의 대부분은 군단이 아닌 기병 지휘관으로 활약했습니다. 사실상 보병- 포병- 기병으로 구성된
종합적인 군단을 지휘한 건 워털루가 거의 처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것 치고 리니와 와브르에서 잘한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잘못된 명령
과 기병 사령관 답지 않은 신중함 때문에 본 전투에서 노는 병력이 됨으로써, 워털루 전투의 패배
책임을 지게 됩니다. 패배를 상징하는 문장 Where is Grouchy? 이 때문 상당히 억울한 면이 있었
습니다.
영연방군- 네덜란드 연합군
반면 영국은 프랑스와 달리 애송이들이 많았습니다. 물론 웰링턴이나 군단장 힐, 그리고 몇몇 사단장들은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군단장의 많은 경우 거의 정치적인 이유로 선정된 애송이들이었습니다. 즉 그 질은 프랑스 군에
비교되지 않았습니다. 실재 웰링턴과 이베리아 반도에서 싸웠던 지휘관들은 많은 경우에는
1812년 영미 전쟁 때문에 미국에 가 있었습니다.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
웰링턴은 아일랜드 귀족 출신이었습니다. 이 때분에 영국 특유의 매관 매직 때문에 빠르게 진급할 수 있었
습니다. 플랑드르에서 요크 공 프리데릭 왕자의 패배 당시 선전을 함으로써 명성을 쌓은 그는 인도 총독이었
던 형을 따라 인도로 가서 마리타 왕국 술탄 티푸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웁니다. 그리고 다시 이베리아
반도에서 두차례 원정에서 큰 공을 세워 웰링턴 공작의 작위를 받게 됩니다.
나폴레옹이 지는 별이었다면 그는 뜨는 해였습니다. 물론 그의 모국 영국의 과대선전에 의한 과대평가도
있었지만 말이죠.
지휘관으로써 그는 전형적인 귀족이었습니다. 부하들을 아끼긴 하지만 부하들하고 친하지 않은 장군 말이죠.
하지만 상승의 명성과 귀족적 카리스마로 병사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전술과 전략적인 면에서 그는
상당히 꾀가 많은 지장이었습니다. 특히 그가 잘한 건 전장 선정이었습니다. 원하는 전장으로 상대방과
유인하여 싸우는 것에 특히 능했습니다.
사실상 패배가 확정된 워털루 본 전투에서 역전이 가능했던 그의 전장 선정 능력과 상대방을 끌어들이는 능력
이었습니다.
네덜란드 군 사령관 오렌지(오랑주) 공
후에 네덜란드 국왕이 되는 그는 웰링턴에게는 적보다 더 두려운 무능한 아군이었습니다. 군사적 능력은 없는 주제
에 자만감이 심했던 그를 제어 하는 게 웰링턴에게 어려운 일었습니다. 또한 그의 군대는 뛰어나긴 했지만
친 프랑스 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에 상당히 영국군의 애로사항이 됩니다.
(영국 드라마 샤프에서 샤프가 자신의 상관이 된 오렌지 공을 이 때문에 쏴 죽일려고 합니다. )
기병 사령관 욱스브리지 백작
일개 대령인 그가 기병 사령관이 된건 오렌지 공 처럼 낙하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능력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웰링턴은 그를 싫어 했는데, 이는 웰링턴의 제수를 욱스브리지가 유혹해서 야반도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왠만하면 욱스브리지는 웰링턴의 입장에서 보고 싶지 않은 지휘관이었습니다.
프로이센 군
프로이센은 영국보다 나은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지휘관은 뛰어나지 않았지만 인망 있는 발슈타트 공작 게르하르트
폰 블뤄허 였으며, 참모장은 독일 참모본부를 만든 나이트하르트 백작 빌헬름 폰 그나이제나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총사령관 블뤄허
블뤄허는 상당한 노장으로 군인 가문이었습니다. 인생을 즐기자는 주의의 그는 술과 여자, 도박을 너무 사랑했
으며 능력도 당대에 수많은 명장 중에 상당히 평범한 축이었습니다.
그는 본래 프랑스를 싫어했지만, 예나 전투에서 참패한 후 프랑스의 포로가 되면서 더욱 프랑스를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종종 나폴레옹을 처형하자!, 파리에 예나 다리를 불태우자! 라는 발언을 즐겨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인간적인 면은 병사들의 사기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또한 영국 혐오증을 가진 그나이제
나우를 생각했을 때, 그의 존재는 영국- 프로이센 연합군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참모장 그나이제나우
역시 프로이센 군인 귀족 출신인 그는 예나 전쟁의 패배 이후 많은 젊은 장교들이 그러하듯 프로이센을 떠나
복수를 위해 러시아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원정 실패 이후 다시 프로이센으로 돌아온 그는 참모로써
프랑스와 싸우게 됩니다.
워털루에서도 리니에서 붕괴된 프로이센 군을 재편한 건 그의 공이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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