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가난한 사람들을 적당히 도와주고 적당히 만족감을 얻는 봉사 활동은, 물론 사회에 전반적으로 좋은 영향을 끼치긴 하겠지만, '별것도 아닌 일 하면서 생색 (남에 대한 생색이든 자기 자신에 대한 생색이든) 은 무지하게 내는구먼'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 봉사 활동이 특정 종교 집단에서 행할 경우에는 봉사 활동 자체가 목적인지 선교를 위해 봉사를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인 지도 불분명해지기 때문에 앞에서 말씀드린 느낌이 더욱 커지기도 하고요. 저도 자그마하게 이런저런 봉사 활동을 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만, 그런 일을 하면서도 이게 인류애라는 거창한 대의명분을 위해서 하는 것인지 자기만족을 위해서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니고 그냥 싸구려 의무감 때문인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봉사활동이란 것이 또 본질적으로 별것도 아닌 일인데도 시간은 무지하게 잡아먹는지라, '내가 이 시간에 이런 봉사 활동하느니 차라리 열심히 돈이나 벌어서 기부하는 게 오히려 더 낫겠구먼!' 이라는 생각이 점점 들더군요.
그래서 장기적으로 믿고 기부할 단체를 좀 찾아봤습니다. 제가 성당을 다니긴 하지만 위에서 말씀드린 이유 때문에 종교 단체는 일단 배제하고, 지나치게 거대한 조직은 내가 알 수 없는 정치 논리에 휘둘릴 거라고 생각해서 배제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소거법을 적용하면서 찾아다니다 보니 한 단체가 눈에 밟히더군요. 그게 제목에서 말씀드린 국경없는 의사회입니다. 원래 프랑스에서 시작한 집단이고, 불어로 Médecins Sans Frontières(MSF) 입니다.
불특정 다수를 일단 까고 시작하는 엔하위키에 소개되어있는 문구입니다.
국경 없는 의사회 (MSF) 는 전쟁, 자연재해, 그로 인한 극심한 가난 등으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에게 인도적 도움을 제공하는 비정부적 국제 구호기관이다. 여타 구호기관들이 너무 큰 위험 때문에 꺼리는 지역에도 들어가 구호활동을 펼치며, 바깥에서 지뢰가 터지고 총알이 코 앞을 스쳐 지나가도 촛불에 의지해 수술을 진행한다거나 군대가 바로 코앞에 밀려오기 직전까지 환자를 돌보다가 마지막 순간에 결국 탈출했다는 등의 드라마틱한 사연이 유난히 많은 곳이다. 무서운 것은, 이것이 실제 일어났고, 현재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란 것. 한 줄로 요약해 진정한 용자들과 대인배들의 집단.
이 사람들은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준다는 수준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당장 생명이 위험한, 그러나 돈이 없거나 정치 논리에 희생되어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의료 활동을 합니다. 물론 알츠하이머병에 시달리는 독일의 어떤 부자도 불행하겠고 악성 종양 때문에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은 일본의 어떤 중산층도 불행하겠지만, "당장 5만 원만 있으면 살 수 있는데 5만 원이 없어서 지금 곧 죽어야 하는 사람들"부터 구하자는 이념을 가진 집단이지요. 고로 정상적인 국가의 빈곤층을 구호 대상으로 보지 않고, 국가가 파탄 났다든지 내전 중이라든지 대지진이 일어났다든지 하는 곳에 긴급 파견 활동을 통해서 개입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그러다 보니 종종 자원봉사자가 살해당하는 일도 벌어지는, 그야말로 극단적으로 위험하고 형편없는 환경에서 봉사 활동을 펼치는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해당 지역의 긴급 상황이 해제되면 그 지역을 떠나기 때문에, 자신들의 봉사로 인해 그 지역이 행복해지는 것은 보지 못하는 이상한 집단입니다.
1971년에 적십자가가 비아프라 내전에 '한쪽 편을 드는 것은 정치적으로 오해를 살 수 있다' 라는 이유로 의사 파견을 거절하는 일이 있었고, 그것에 반발하여 '인종, 종교, 정치적 성향 등에 상관없이 누구나 의료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다' 라는 이념으로 국경없는 의사회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 의료 활동을 하면서 정치나 종교에 관해서 자신의 이념을 설파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고 합니다. (파푸아 뉴기니처럼 아직도 마녀를 화형하는 전통이 있는 곳에서도 취향이니 존중할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1999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은 단체이며, 현재는 약 3만 명의 자원봉사자 (대부분 의사와 간호사지만 당연히 사무직이나 물류 담당자도 있으며 심지어는 해당 지역에 우물이나 집수기를 파주는 엔지니어도 있다고 하네요) 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연간 예산은 4억 불 정도이며, 정치 논리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 정부 보조금은 되도록 받지 않고 예산의 80% 정도를 개인 기부를 통해서 충당합니다. 예산 지출의 중 86.3% 가까이가 실제 봉사 활동에 사용되며 12.3% 정도가 모금 활동에, 1.3% 정도만이 조직 운영에 사용될 정도로 효율적인 자금 집행이 이루어지는 조직이고, 이를 모니터링할 외부 감사원도 두고 있습니다.
이 정도 용자 집단이라면 사명감과 확신에 불타서 고민 따위는 없는 사람들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입니다. 문명사회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매일매일 일어나는 상황에 노출된 의사들은 그야말로 멘붕을 겪기 때문에, 첫 봉사 활동을 끝으로 MSF 를 떠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더군요. 이 집단을 대상으로 촬영한 다큐멘터리 필름이 2009년 오스카 다큐멘터리 최종 리스트에 올랐었는데, 애초부터 상업적인 목적의 영화가 아니었던지라 MSF 에서 이 필름을 공개해놓았습니다. 아래가 그 필름:
내전 중인 콩고와 내전 직후의 라이베리아를 배경으로 촬영한 이 필름을 보시면, MSF 가 대충 어떤 집단인지 느낌이 옵니다. 몇몇 인상적인 대사들을 꼽아보자면:
7:50 - "장비가 열악하니 그냥 다리를 자를 수밖에 없지요. 어쩔 수 없어요"
10:30 - "내 나라에서야 환자 한 명을 의사 예닐곱이 돌보지요. 여기서는 저 하나가 서른 명을 돌봐야 해요. 이 책임감이란 게 참 힘들지요"
13:00 - "MSF 에서 만든 시설이 이 지역 의료 시설의 75% 정도에요. 사실 이 county 전체 국립 의료시설보다 MSF 에서 만든 게 더 많아요.
18:00 - (어린이가 눈이 퉁퉁 부었는데 여기 시설로는 못 고치는 듯) "이거 심부전증이에요. 근데 이거 놔두면 눈이 상하거든요. 알긴 아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어제 xx가 많이 아팠는데 밤에 죽었어요 여긴 매일 죽어요. 처음에는 사람 하나 죽으면 너무 마음이 아팠는데, 이젠 내 일의 일부라고 받아들이고 그냥 최선을 다할 뿐이에요."
28:00 - "좋은 약으로 한 명 제대로 살릴 건지 후진 약으로 여러 명을 대충 살릴 건지 선택해야 해요. 우리는 타협할 수밖에 없지요"
물론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지만, 자기들끼리도 싸웁니다!
41:00 -
A: "내가 뭐 어쨌다고!!!"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B: "아 여기 관두고 싶어...."
49:00 -
C: "물건이 오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어. 장갑을 재활용하는 수밖에"
D: "그래도 그건 좀 그렇지 않냐?'
C: "시끄러워 입만 살아가지고. 그냥 장갑 재활용해!"
E: "애초에 물류 담당은 너였잖아 이 자식아!"
그리고 에필로그를 보면 네 명의 주인공들은 MSF 를 때려치운 사람부터 소말리아로 떠난 용자까지 다양합니다.
뭐랄까.... 개인적으로 도덕의 절대성에 대해서 강한 회의를 가진 1인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저런 사람들한테는 모자 한번 벗어주는 정도의 예의는 갖춰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이 단체에 기부를 하려고요. 단체의 성격상 "불우 어린이와 1:1 결연" 이딴 건 기대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 단체 이상으로 제 돈이 좋은 일에 쓰인다고 확실할 수 있는 곳이 없을 듯합니다.
* 信主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3-06-24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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