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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19 06:22
국민학교 2학년 때부터 이런저런 이유로 가계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었고 중학교 1학년 때 바닥을 찍었을 겁니다.
아버지는 타지에서 직장생활 하셨고 저, 형, 할머님 이렇게 세식구가 반지하 단칸방에 생활 했었습니다. 방 옆으로 문 열고 나가면 연탄보일러가 있는 부엌 비스무리 한 공간이 있는 구조였지요. 화장실은 공동으로 쓰던 재래식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할머님이 시골에 일보러 내려가셔서 형과 둘이 며칠 지낼 때였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와 연탄을 갈려고 부엌으로 들어 갔더니 연탄보일러 뚜겅이 조금 열려 있었습니다. 그걸 보고도 아무생각 없이 새 연탄을 집게로 집으려 할때 갑자기 현기증이 나면서 온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순간적으로 '아 내가 지금 연탄가스 먹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졌구요. 그 당황한 정신에도 여기 있으면 죽겠구나 싶어 온 힘을 쥐어 짜내 바닥을 기기 시작했습니다. 어찌 어찌 죽을힘을 다해 겨우 밖으로 기어나와 마당에 그대로 오징어마냥 뻗어버렸죠. 크크크크 그때 2층 상하방에 세들어 살던 신혼부부 남편이 쓰레기 버리러 나왔다 저를 발견 했습니다. 그 아저씨가 제 볼을 때리며 왜 그러느냐 정신 차려라했지만 축 늘어진 채 끅끅 거리기만 할 뿐 목구멍으로 말이 안나오더군요. 그러다 제가 살던 반지하 방에 들어가더니 상황 파악이 된듯 연탄보일러 뚜껑을 닫고 문을 다 열어 환기를 시켜 놓고 저를 안아 들고 병원으로 가려고 하셨었죠. 그때 즈음 저는 몸에 힘이 돌아왔고 그 아저씨께 이제 괜찮다고 했었습니다. 병원에 가면 돈 나올텐데 집에 돈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병원에 가야된다는 아저씨를 한사코 거부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 아저씨는 걱정이 되셨는지 귤과 동치미를 퍼오셨습니다. 연탄가스 먹었을 때는 신게 좋다고 말이죠.(그 민간요법이 효과가 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때 연탄가스를 먹어서 내가 이렇게 바보인가 봅니다. 크크크크
14/05/19 09:53
저는 어린시절에 부족하게 살았다는 기억이 없습니다. 저희 형제가 커가면서 집안 살림 안정화되고 여유가 많이 생기면서부터 부모님께 지난 시절 얘기를 듣기 시작했는데, 알고보니 부모님만, 특히 아버지께서 힘들게 살아오셨더군요.
아버지는 시골 집안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셨고, 공부가 너무 하고 싶으셨지만 지원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대학교를 가겠다는 일념으로 무턱대고 상경해서 가족, 친척에 손벌리고 눈칫밥 먹어가며 삼수까지 하셨지만 결국 실패하고 맨손으로 사회에 뛰어드셨죠. 군대를 갔다오시고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신 후 저를 낳은 뒤 이전에 살고 있던 단칸방의 잘못된 계약 때문에 방에서 나가야 했고, 2월 겨울에 서울 어떤 산 속 건물에 딸린 작은 창고를 얻어 살림을 차리셨습니다. 그런데 이사할 때 가구를 넣기에 문의 폭이 비좁아서 어쩔 수 없이 뜯었던 창문을 다시 붙일 수가 없어 임시방편으로 창문에 비닐을 여러 겹 붙여놓았다고 합니다. 그 한겨울 추운 산 속에서 그런 집에서 밤에 잠이 올 리가 없죠. 이사한 날 너무 추워서 어린 제가 잠을 자지 못하고 앵앵 울었다고 합니다. 부모님은 저를 껴안고 같이 엉엉 우셨고, 불쌍한 가족은 그 추운 밤을 버텨내었지요. 그 후에 아버지께서 오토바이 하나로 우유배달, 신문배달 등으로 돈을 모아 지인과 시작한 작은 사업은 사기를 당해 망해버렸습니다. 지방으로 내려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셨는데, 부모님은 그 없는 생활에도 저는 뭐 하나 부족함 없이 키우려고 노력하셨습니다. 옷도 가능하면 좋은 걸 입히시고, 생일선물로 1990년대 중반쯤 당시 동네 문구점에 있던 10만원을 호가하던 레고 제품이 생일 선물로 갖고 싶다고 조르던 저에게 기꺼이 사주시던 것도 기억나네요. 하지만 피자를 한 달에 끽해야 한 번 허락받아 먹을 수 있었으니 역시 생활이 그리 좋진 않았겠지요. 그런 사정도 모르고 친척 모임 때 리조트에 놀러가서 피자를 먹을 일이 있었을 때, 게걸스럽게 먹는 저에게 어머니께서 누가 보면 굶기는 줄 알겠다고 말하자 "안 시켜주잖아!!" 하고 철없이 따지던 제가 생각나네요. 그 때 아무 대답이 없던 부모님 모습이 지금에서야 너무 안타깝습니다. 참고로 지금도 아버지가 정말 좋아하시는 음식 중 하나는 피자입니다. 어릴 적엔 어머니는 저희 형제를 열심히 가르치고 챙겨주시는 이미지였던 반면 아버지는 평소에는 무뚝뚝한 편이셔서 저희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였고 항상 밤 늦게 들어와서 주무시거나 가끔 담배 냄새, 술 냄새 풍기고 수염 가득한 얼굴을 부비며 술주정하는 분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삶에 여유가 없었으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고 계셨으면 그랬을까 싶어 눈물이 납니다. 다행히도 지금은 많이 여유를 가질 정도로 집안 사정이 좋아졌고 저 역시 재수 후 좋은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합격 당시엔 부모님께서, 특히 아버지께서 그렇게 좋아하시는 이유를 몰랐는데 아버지께서 말하시길 당신이 못 이룬 꿈을 제가 대신 이뤄준 셈이니 어떻게 안 기쁠 수 있겠냐는 얘기를 듣고 가슴이 뭉클하더군요. 성격이 무뚝뚝해서 마음은 안 그러면서도 표현을 안 했는데, 언제 한 번 집에 찾아가 술 한잔 하면서 부모님께 사랑한단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14/05/19 13:50
아버님이 하급(?)공무원이셔서 잘살지는 못했지만.. IMF때 특별히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예전에도 돈없었고,그때도 돈없었고.. 다행히 닥달하는 사람은 없고... 근데 대학교들어가기전까지 피자,치킨이나 짜장면 거의 못사먹었긴 했네요. 다행히 부모님도 제 형제도 별다른 사고없이 착실히 살아서,지금은 그럭저럭 중산층정도로 삽니다. 혼자사는 저는 1주에 1~2번은 꼭 족발이나 탕수육,치킨을 시켜먹습니다 -,.- 아버님은 유복자로 태어나셔서 집에 별다른 도움을 못받았고(땅5마지기를 받았는데 큰집에서 날려먹었다나..) 어머님도 그닥 잘사는 집안은 아니셨습니다. 두분도 젊은 시절 나름 고단하셨구나 싶은 생각은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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