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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3/07 20:54:58
Name 기차를 타고
Subject [일반] 멍청한 성격
  사람이 붐비는 많은 곳에서 그렇듯, 아침마다 지나가는 강남역 10번출구에는 항상 할머니들이 전단지를 나누어주고 계신다. 세어보진 않았지만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 중 90%는 앞에 아무도 없다는 듯이 무시하고 지나가는 듯 하다. 아주 자연스럽게, 언제나 그랬다는 듯이. 나는 지나가면서 전단지를 받아든다. 그리고 위아래로 한번 대충 읽어본다. 아주 자연스럽게, 언제나 그랬다는 듯이. 그리고 갈 길을 간다. 이제 서서히 할머니들의 얼굴마저 익숙해질 지경이다. 왠지 할머니도 나를 알아보시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것은 그저 착각이겠지. 라는 생각을 한 다음날 똑같은 장소에서, 전단지를 받는 내게 할머니께서 먼저 말을 건다. 젊은이는 왜 맨날 그냥 안 가고 이거 받아요. 아..그냥 받아서 나쁠거 없잖아요 라고 말하는 나. 멍청하다. 전단지 나눠주는 일을 옆에 있는 다른 할머니B께 맡긴 후, 할머니께서는 얘기를 계속 하신다. 자기도 이거 나눠주면 사람들이 싫어하는거 안단다. 그런데 돈벌려면 이런거라도 해야되지 않겠냐고 하신다. 나는 그럼 그냥 얘기를 옆에서 계속 듣고 있는다. 얘기를 듣다보면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맞는 것 같고 그 입장이 이해가 되는것도 같다. 말이 좋아 전단지 배부지 지나가는 사람들의 면전에다 그냥 무작정 종이쪼가리를 들이밀어 기분나쁘게 하고 싶지 않은데 어쩔수 없다는 걸로 시작한 그분의 인생이야기를 듣다보면 내가 여길 왜 지나가고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린다. 정말이지 멍청하다.


   서울 한복판을 홀로 걷다 보면 누군가 갑자기 날 부른다. 저기요 학생~! 학생은 아니지만 분명히 날 부르는 것이 맞다. 고개를 돌리면 착하게 생긴 사람이 나에게 다가온다. 학생 혹시 여기 교보문고가 어딨는지 알아요? ..아니 강남역 지하역사 지도에서도 찾을 수 있는 교보문고를, 그것도 앞으로 쭉 가기만 하면 되는데 어딨냐고 물어본다니.. 처음 오셨으면 모를 수도 있겠구나 하면서 나름의 친절을 곁들여 안내해 준다. 이쪽 방향으로 쭉 가면 지오다노 나오고 그거 지나면 미쏘 나오고 거기서 더 쭉가면 신논현역이 나오는데 그 옆건물이 교보문고 빌딩이에요 어쩌고저쩌고를 신나게 설명한다. 그런데 왠지 느낌이 쎄하다. 이분은 교보문고가 어딘지 이미 알고 있다.. 아니 그것보다는 교보문고의 위치를 궁금해 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며 설명에 집중력을 잃어가려는 찰나, 다른 사람 한명이 또 온다. 이 사람도 착해 보이네.. 새로 온 사람이 갑자기 나에게 묻는다. 학생이에요? 아니라고 대답할 시간도 없이 소책자 하나를 건넨다. 책자 겉면에는 십자가 그림이 있는걸로 봐서는 전도인 듯 한데, 한번도 정말 한번도 들어본적이 없는 종교명이다. 무슨무슨 회 로 끝난다는 것만 기억한다. 나에게 책자를 건네준 분이 잠깐 가까운 데 앉아서 얘기 하잔다. 지금 어디 가시는 중 아니셨나요 라고 내가 물어본다. 이 와중에 길거리 전도사 걱정이라니.. 정말이지 멍청하다.


   지금의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지만 나에게도 파릇파릇한 대학생 시절이 있었으며 들뜬 기분으로 학교를 다녔던 시절이 있었다. 학과 특성상 조별과제를 2학년부터 시작했던 나는 첫 조별과제에서 6명 조에서 나와 다른 한명을 제외한 4명이 여자, 그것도 모두 이쁘장한 후배로 구성되는 행운을 맞았다. 학부제였던 나는 1학년때는 공통과목 듣느라 조별과제 자체가 없었고, 2학년 되서야 과가 나뉘어 조별과제를 시작했는데 첫 조별과제에서부터 팀원이 '더 잘걸릴 수가 없을 정도로' 걸리다니. 주위 동기 남자애들이 모두 나를 부러워할 정도였으니 그 수업시간만 되면 기분이 좋아졌던 것도 어쩜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음 그런데, 뭐랄까, 서로 웃고 떠들땐 항상 즐거운데, 뭔가 과제가 진전이 안된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한 것은 조가 짜여진 지 채 10일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회식은 꽤 자주 했지만 남는 건 내 옷에 묻은 구토자국, 나의 늦은 귀가시간과 늘어난 교통비 등이었다. 단체대화방을 만들었지만 농담따먹기 할때만 활발할뿐 과제에 대한 얘기만 하면 침묵이다. A는 할아버지 병간호를 해야해서 과제에 참석하기 어려울 것 같단다. 그래, 할아버지 병간호 중요하지. B는 자기 친구 입대하는데 위로해줘야 된단다. 아.. 그래 내 입대할때 생각하면 뭐 저것까지는.. C는 친구 생일파티 때문에 모임에 못갈것 같단다. 친구 생일파티라.. 여자들은 자기 친구 생일도 끔찍이 여기는 경우 훨씬 많으니 뭐 그렇다고 치자. 대화방에 '누구누구님께서 퇴장하셨습니다'를 만드는 변명거리도 참 가지가지다. A,B,C 뭐 다 그럴 수도 있겠네. 그리고 미안해 하는 것 같잖아? 그냥 내가 하자. 화는 안나네.
정말이지 멍청하다.


  살면서 남에게 화를 내 본적이 언제였던가. 글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없었다. 나에게 화라는 감정이 있는지조차 의문스럽다. 아, 생각해보니까 화가 나긴 나는구나. 생각해보니 엄청 사소한 것을 못참고 열받고 그랬었다 나는. 예를들어 군대에 있을 때 아침 메뉴가 비엔나소시지였는데 오징어채무침으로 바뀌었다던가, 원래 한달에 한번 했던 체력측정을 내 진급 전달에만 두번 해야해서 두번 다 합격하면 진급시켜준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라던가 하는 경우이다. 그럴 때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당장 얘기하지 않고는 못견딘다. 그런데 취사병과 정작병의 그들 나름의 이유가 들어간 설명을 주저리주저리 듣고 있자면 그 화가 언제 그랬냐는 듯 눈녹듯이 사라지는 것은 함정이다.



  친구들은 나보고 귀가 너무 얇댄다. 너한테 다단계 작업하면 내가 해도 한 5분이면 성공시킬 수 있을것 같다나 뭐래나. 이 세상에서 보증 서달라고 하면 제일 먼저 알겠다는 대답 받아낼 수 있는 사람이 나란다.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에 대해서 한참을 떠든다. 듣다보면.. 또 세상이 무서운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귀가 얇은 것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좀 잘 알고 있거나 확고한 생각을 가진 분야에 대해서는 남들이 정말 뭐라고 해도 안 변하고 계속 내 할일 한다. 고등학교때 학원 과외 안하면 너 대학 잘 못간다라는 말 수없이 들었지만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삼년내내 남아있었고, 회화 잘할려면 외국 경험은 한번은 무조건 있어야 된다는 말 수없이 들었지만 지금껏 우리나라에서만 영어공부하고 있다. 그 결과가 어쨌건 간에 말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단순히 귀가 얇은 것은 아닌 것 같다.



  결국 친구들의 결론은 내가 아는 것이, 혹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많지 않아서 그렇다는 걸로 귀결된다. 내가 좀 더 많이 안다면, 좀 더 세상 여러가지 분야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남의 얘기를 들었을 때 아니다 맞다가 판단이 될거라는 얘기다. 난 그 영역이 너무 좁단다. 그래서 내가 모르는 것, 혹은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 얘기가 나오면(넓게는 세계의 정세, 좁게는 사이비종교나, 지하철에서 장사하시는 분들이 하는 몇천원짜리 물품이라던가 하는, 그런 것들)을 넓혀 갈 수록 헛돈 헛시간 안쓰고 좀 더 너에게 유익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란다. 그럼 이제부터 뭘 해야 하지? 책 많이 보고 뉴스 많이 보고, 다양한 사람들하고 더 많이 얘기해 보면 되려나? 그런다고 성격이 변할까.. 피플 네버 체인지라는 구절을 뼈저리게 실감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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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하늘
14/03/07 21:22
수정 아이콘
세상사람 모두 멍청했으면 좋겠네요.

화를 내본적이 없다니 넘넘 부럽습니다.
기차를 타고
14/03/08 13:48
수정 아이콘
화가 안 나서 그런거긴 한데.. 또 화가 나면 어떨지 모르겠네요 막 이성을 잃는다던가 크크
절름발이이리
14/03/07 22:50
수정 아이콘
화를 안낸다는 점에선 저와 거의 비슷하시네요.
기차를 타고
14/03/08 13:48
수정 아이콘
전 이리님의 다식함이 정말 부러워요... 그리고 그 논리정연함도요..(진심입니다.)
비결 좀..
[fOr]-FuRy
14/03/07 23:57
수정 아이콘
제 성격이랑 정말 너무 비슷하네요...저도 한번도 화 내 본적이 없습니다.. 거기다 + 게으름까지... 어찌보면 답이 없지만... 어떻게든 살아볼려고 하고 있습니다.
기차를 타고
14/03/08 13:50
수정 아이콘
저는 (제 생각이지만) 안 게으르게 살고있다고는 생각하는데 남들이보기엔 아닐 수도... 이게 어떻게 보면 문제가 참 많은 성격이라 저도 고민해봤는데 답이 없더라구요 ㅡ.ㅡ
켈로그김
14/03/08 00:33
수정 아이콘
저는 아는게 없어서 자르고 보는데, 그런 태도가 시간의 효율적인 사용 말고 크게 메리트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요즘은 아무리 헛소리같아도 일단은 들어보려고 해요..

예전에는 말만 걸어와도 "개수작 하실거죠?"라고 대놓고 말했는데..
기차를 타고
14/03/08 13:51
수정 아이콘
진짜로 개수작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나요? 크크크
asdqwe123
14/03/08 10:53
수정 아이콘
전 요세들어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에 제가 관심없는 이야기를 잘 못듣겠더라구요. 그냥 온몸이 간지러워지기 시작하면서 다른생각도 나는게 참 예의없는건 아는데 잘 고쳐지지가 않아서 힘들어요.

개인적으론 기차를 타고님이 부럽네요.
기차를 타고
14/03/08 13:52
수정 아이콘
아마 123님같은 반응이 예의가 없는건 전혀 아닐겁니다. 저도 뒤늦게 생각해보면 가끔은 딱 자르고갈길 가는게 좋겠다라고 생각 들때도 있고요...뭐 이런 성향도 나름의 장점이 무언가는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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