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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08/21 11:59:08
Name 글곰
Subject [일반] 奇談 외전 - 기차는 달린다
오랜만에 글쓰기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요 근래 일이 엄청나게 많은데, 그럴수록 글 쓰기가 재미있네요.
아마도 일하기 싫어서 그런 거겠죠? 흐흐.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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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는 심야 완행열차의 낡은 의자에 몸을 파묻고 있었다. 조명의 절반이 꺼진 객차 안은 어두침침했다. 승객들 대부분은 잠에 곯아떨어진 상태였다. 깨어있는 사람은 남자뿐이었다.

  남자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열한시 오십팔 분이었다. 남자는 잠자코 기다렸다. 시침이 오십구 분을 가리켰고, 한참을 그 자리에서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결심한 듯 열두 시로 넘어갔다.

  드르륵. 객차 뒤쪽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간식거리를 판매하는 카트의 바퀴가 묵직하게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카트는 남자를 지나쳐 객차 앞쪽으로 갔다. 유니폼을 입은 머리 긴 여자가 카트를 밀고 있었다. 이윽고 객차 끝에 도착한 여자는 문을 열고 다음 객차로 넘어갔다. 문이 닫히고 여자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남자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조용히 여자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여자는 완만한 속도로 카트를 밀면서 객차 중앙의 복도를 나아가고 있었다. 승객 대부분이 잠든 객차 안에서 여자를 불러 세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도 좌우를 돌아보지 않고 정면만을 응시한 채 걸었다. 카트는 다시 객차 끝에 도달했다. 그 건너편은 일반 객차가 아니라 기관차였다. 하지만 여자는 망설임 없이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녀를 쫓던 남자는 문 앞에 서서 손목시계를 보며 기다렸다. 잠시 후, 남자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기관차 안으로 들어섰다. 남자가 문을 닫는 것과 동시에 앞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으아악!”

  남자는 날렵하게 뛰어들었다. 복도를 막고 있는 카트를 뛰어넘어 여자 앞을 가로막았다. 비명을 지르던 열차 차장이 기겁하며 남자를 쳐다보더니 여자를 손가락질하며 덜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거, 귀......”

  “귀신이란 말이지. 알고 있다.”

  남자는 냉정한 말투로 대답했다. 여자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푸르스름할 정도였고 양 눈에서 두 줄기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마의 절반이 짓뭉개져 뇌수가 보일 지경이었다. 앞으로 올린 두 팔은 금방이라도 차장의 목을 조를 것만 같은 기세였다.

  저자가 나를 죽였어

  여자는 공허하게 외쳤다. 그러나 남자는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안다. 허나 죽은 자는 저승으로 가야 하는 것이 법도. 그래서 데리러 왔다.”

  남자는 품속에서 검은 색 책자를 꺼내 펴들었다. 그리고 단조로운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이름. 이난희. 나이. 스물일곱. 직업. 기차 승무원. 사인(死因). 자살로 오인되었으나 실은 불륜 관계인 애인과 다투던 중 상대가 열차에서 떠미는 바람에 추락사. 사망시각. 이틀 전 오후 열 한 시 이십칠 분 사십사 초.”

  남자가 읽는 것을 마침과 동시에 여자는 스러지듯 사라져 버렸다. 남자는 책을 덮고 잠시 동안 여자가 사라진 자리를 내려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차장이 살았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고, 고맙습니다. 그런데 누구신지......”

  “저승사자다.”

  “예? 세상에 맙소사...... 그런 게 정말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덕분에 살았습니다.”

  차장은 다소 과장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남자는 말이 없었다.

  “그런데 저어, 아까 말씀하신 그......”

  겸연쩍게 눈치를 보던 차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나 남자는 가차 없이 차장의 말을 끊었다.  

  “가자.”

  “예?”

  “너도 명부(名簿)에 있다.”

  남자는 다시 검은 책을 폈다. 차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그가 상황을 이해하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이름. 김기현. 나이. 마흔셋. 직업. 기차 차장. 사인. 죽은 애인의 귀신을 보는 순간 극도의 공포에 의해 심장마비로 사망. 사망시각은......”

  남자는 손목시계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차장을 보더니 입술 끄트머리를 치켜 올렸다.

  “삼 분 이십 초 전.”

  기차는 어둠을 헤치고 선로를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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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8/21 12:03
수정 아이콘
오싹오싹 하면서 가벼운 반전의 묘미가 있네요!!
에위니아
13/08/21 12:09
수정 아이콘
선로가 아닌 은하수였다면 ㅠㅠ
13/08/21 12:46
수정 아이콘
우주 정거장에 햇볕에 쏟아지고, 엄마 잃은 저승사자는....응?
음음. 아무튼 사실 마지막 문장은 좀 달랐습니다만 일부러 저렇게 바꾸었습니다. ]

이렇게 알아보는 분이 계실 것 같아서요. 흐흐.
유재석
13/08/21 12:11
수정 아이콘
항상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전 그 남자가 저승사자가 아닌 해원일걸로 예상하며 읽었네요 크크
천진희
13/08/21 13:09
수정 아이콘
해..해원맥?!!! 두둥?!
13/08/21 13:22
수정 아이콘
본편 주인공 이름의 유래가 삼차사 중 해원맥 맞습니다.
대놓고 오구굿을 인용했으니 바리의 이름 유래도 누구나 아실 것 같고...
등장인물들 이름은 죄다 프로야구선수들이고...
하지만 주원순 상병의 이름 유래는 아무도 모르실 것 같네요. 크크. 이건 자신있습니다.
천진희
13/08/21 13:09
수정 아이콘
잘 봤습니다. 바리 왜 안 나와요?ㅠ
감전주의
13/08/21 14:24
수정 아이콘
헐. 그럼 기차 안에 있던 승객들은 어떻게..
13/08/21 14:31
수정 아이콘
원래 대량학살극으로 가려다가... 그만뒀습니다.
고로 기관사는 멀쩡히 살아 있습니다.
감전주의
13/08/21 17:42
수정 아이콘
아하~ 운행은 기관사가 하는거군요..
성난큰곰
13/08/21 17:08
수정 아이콘
무더운 여름을 잊게 만들어 주시는 글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기대하겠습니다 (^^)/
세인트
15/09/08 16:10
수정 아이콘
주원순 상병의 이름 유래는 혹시 주호민작가 + 박원순시장님 인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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