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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0/08/18 05:13:24
Name 루미큐브
Subject [일반] 파리
비오는 새벽에 청소를 한답시고
빗자루질을 구석구석 하다보니
이제는 날 기력도 떨어진 늙은 파리 하나가
자꾸만 빗자루에 이리저리 채이고 나자빠진다.

그냥 잡자니 불쌍한 구석이 있는지라
그래도 쓰레기통에 먹다버린 닭뼈를 먹으려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이놈이 측은하기도 하고
가련하기도 하여 쓰레기통에 그냥 쓸어담아버리니

그래도 죽기전에 저 놈은 지 좋아하는 거는
즐기다 가는구나 라며 위안하는데

이 놈의 파리목숨 파리목숨 하며
직장에 매달린 사람들이 파리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나가 떨어지는 순간도 많았던 걸
생각해 보면 차라리 날개라도 달린 파리가
낫다는 생각도 든다.

몇몇은 인간에게 대들다 파리채에 눌려죽고
살충제를 덮어죽고 남산타워를 올라간
용가리에 밟혀죽고
중화인민초고수의 젓가락에 낑겨죽고
쓰레기통에 들어가기 전 주부의 고무장갑
낀 투박한 손바닥에 한 번 더 확인사살까지
당한다지만 내가 잡지 않은 넌
바퀴보다 행복한 파리일지도...

대부분 자신의 영지에서 소떼라는 기사들과
유유자적하며 소꼬랑지에 맞아 온몸이 새파랗게 멍들때까지
에베레스트 산 처럼 쌓인 퇴비를 애인맞아
하루 종일 뒹굴며 원하는 여생을
살다 갈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지만

도시의 파리살이는 벽에 매달렸다
다음날 아침에 곤두박질치는 하루살이들 처럼
나날이 힘겹다는 생각이 든다.

문득 사람이 파리보다 나은게 뭐가 있을까라고
개똥철학스러운 상념에 빠져보지만
오래사는 것도 자랑이 아니게 되어버린 이 시대에 와서
나 역시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의 내용처럼
가장 아름다운 시기에 나 스스로를 죽여버릴 것이라는
우울증스러운 중얼거림을 읊어본다.

그래봤자 새벽이 이렇게 갈 뿐이고
스브스의 모닝와이드는 6시에 시작할 뿐이고
1달전까지 재미있었던 남아공 월드컵을 보내버린 난
오늘도 4년간 널 기다릴 꺼라고.. 이놈의 지긋지긋한
밤샘과 새벽과 졸음과 싸우며 홀로 중얼거리고 있다.

"비오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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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natos.OIOF7I
10/08/18 06:21
수정 아이콘
캐캐묵은 직업윤리 따윌랑은 집어던져 버리고 잠수탄지 3주만에 집밖으로
껴나와 자주간다고 표현하기엔 쑥스러운 포장마차에서 쓸쓸히 소주를 두어병
기울이던 찰나 반갑게 오시는 그분들을 보며
"비오네?"

사장님 마감하시는거 도와드리고 자취방으로 와서 피지알 기웃거리다
은근히 쓰신 문체가 마음에 들어 들이대어 봅니다.

ps. 반지하 방에서 1년넘게 혼잣말과 친숙해질 즈음
유유히 날아다니는 날파리를 보고 문득 김태원(부활) 사연이 생각나서
냅둬보았더니 정말 그의 말처럼 몇 주 후에 날파리가 한부대 되었다는 사실이...
10/08/18 11:30
수정 아이콘
"하루 종일 뒹굴며 원하는 여생을" 인데 순간 여성으로 봤어요..

..슬슬 미쳐가나 봐요..
Minkypapa
10/08/18 16:08
수정 아이콘
파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지...
파리와 모기를 보면서 저런 경멸받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라는 생각을 어떤 인간들에 이입해 본적이 몇번 있네요.

더위를 식혀줄 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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