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에서 귀인이 온다.
"흐음..."
"..."
97년 연말이었다. 친구들과 호프집에서 나오는 길에, 연말이고 하니 신년 운세라도 보아야 하지 않겠냐는 말에 분위기를 타서 같이 들어간 사주를 보는 곳. 친구 하나는 취직운이 트인데고, 마누라가 있는 동팔이라는 녀석(본명 여부는 밝히지 않겠다.) 에게는 결혼운이 있단다. 사람 본성이 짖궂다는게 녀석, 아니 애인도 없는데 어찌 결혼입니까? 하며 너스레를 떠니, 이 양반아. 두고 보라며 참한 색시 하나 오면, 나중에 다시 한번 찾아오라면서 완전히 기정사실화 시켜버리는 것이다. 나와 친구들은 '이거 완전 돌팔이인데' 라는 눈빛을 주고받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눈이 마주치자 대충 날아간 복채에 대한 아쉬움 정도는 서로 알 수는 있었다. 어쨌든 마누라 있는 놈의 결혼에 대해서 일장 연설을 들은 뒤, 뭐 더 들을 것도 없어서 내 껀 안 보고 나가려 하는데 아 왜 너 혼자만 빠지냐고, 너도 보라고 하는 친구들 말에 분위기를 타서 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 돌팔이 점쟁이가, 서쪽에서 귀인이 온대더니 혼자서 한 5분간 인상을 쓰고 고민에 빠졌다.
마치 방망이 깎는 노인네 기다리는 것 마냥 눈만 껌벅이던 우리 세 사람을 향해, 아니 정확히는 나를 향해 점쟁이가 던진 한마디는 실로 충격적이지 못해서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지내던 98년,
동팔이가 이혼했다.
여우같은 자식들과 함께 토끼같은 마누라는 친정이라는 산으로 들어가 산토끼가 되었다.
그리고는 참한대다가 섹시하기까지 한 색시가 생겼다.
그 돌팔이 점쟁이, 아니 울트라 슈퍼 짱 예언가님께서 말한 그 한 마디가 떠오른 것은, 동팔이의 섹시한 색시 소식을 듣고 난 이후였다.
"서쪽에서 귀인이 온다. 그런데... 이게 귀인이 아니야. 귀물? 뭐라고 부를 지는 모르겠다만, 물건이야, 아니 물건도 아니야. 뭔가 아무튼 그것이 자네 운명을 확 뒤틀어 놓을걸세."
뭐, 그래봤자 초등학교 교사인 내가 더이상 바뀔 운명이 뭐가 있다고.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일과 함께 직업의 안정성에도 만족하며 살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뭔가를 새로 시작할 생각은 없었다. 지도안 짜랴, 수업연구 하랴, 연수 받으랴, 게다가 공문처리까지. 의외로 초등학교의 업무는 생각보다 많았기 때문에, 내가 꿈꾸던, 아이들 보내고 나면 한가로이 게임이나 하면서 살지 하는 나의 소박한 꿈은 아직도 답보상태였다. 가끔씩 시간내서 하긴 했지만. 요즘은 얼마전에 확장팩이 새로 나온 스타크래프트, 브루드 워 라는 게임을 하곤 한다. 돌팔이 점쟁이의 동팔이 색시 소식은 맞췄지만, 뭐 나에게 98년은 별 일 없었던 한 해로 기억되었다.
몇년 후, 적어도 그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2001년 여름, 신림동에서 방학 연수를 받고 있었다. 마치 물에빠져 익사라도 하면 행복할 것 같이 더웠던 그날도 연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다 오랫만에 게임이나 해 볼까 하는 마음에 근처에 한 피시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카운터에는 아무도 없고, 피시방 한 자리에 어떤 사람이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을 사람들이 웅성웅성대며 모여서 지켜보고 있었다. 구경꾼들의 감탄사가 연거푸 터져나오는 모습이 마치 어렸을 적 오락실에서 보글보글(Bubble Bubble 이라고들 하더라) 100판가지 가서 왕과 싸우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 같았다.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역시나 분위기를 타서 그 무리속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게임을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곳에는 마치
나의 없는 피아노 지식으로 판단해도 체르니 30번정도는 거뜬히 칠 수 있을 만큼의 손놀림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과, 광과민성 발작증세라도 유발시킬 것 같이 쉴 세없이 번뜩이는 모니터 화면과, 마치 방향키로 조종하고 있는 듯 한 파이어뱃의 움직임이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 연수를 마치자 마자 그 피시방으로 달려갔고, 어김없이 그 곳에는 그 사람이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람도 이렇게 열정적으로 매일 달려와서 옆자리에서 다음 까페만 켜 놓고 자신이 게임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왠 인간에게 호기심이 생겼는지 서로 안면을 트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같이 게임도 몇 판 해 보았지만 역시나 결과는 뻔했다. 그의 빠른 손과 뛰어난 반사신경을 나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은 배틀넷에서 개인전을 하다가 지치면 나를 끼워서 팀플을 몇 판 하기도 했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여름 방학이 끝나갈 무렵 그는 한 스타크래프트 대회에 나간다고 했다. 너는 잘 할 수 있을 거야, 격려의 말을 해 준 뒤 이제 여름 방학이 끝나서 이제 이 피시방에는 자주 오지 못할 거라고 했다. 그 때 그 친구가 흠칫 놀라며 나에게 말했다.
" 형의 머리가 이제 필요해요. 형이 제 옆에서 이제 도와주셨으면 해요."
그는 프로게이머라는 것에 대해 나에게 설명을 했고,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을 했다. 아니, 프로게이머라는 것도 생소한데, 프로게이머 코치라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는 커다란 사고만 나지 않으면 정년까지 넉넉하지는 않지만 적절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초등학교라는 직장이 있다. 그는 아쉬워했지만 이내 연락하고 지내자며 이별을 고했다. 그리고
개학 하루 전, 우리 반 한 아이의 익사 소식이 들렸다. 물놀이를 하다가 준비운동을 제대로 안 해서 순간적으로 마비가 와 헤엄을 못쳐 죽었단다. 슬픔을 느낄 사이도 없이 교육부에서 나온 사람들이 담임교사인 나의 학생생활지도기록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얄궂은 것이, 이럴 경우에 방학식날 "물놀이 전 준비운동 철저히" 라고 아이들 가정연락부에 한마디라도 적어 준 기록이 있으면 담임교사의 책임은 거의 없어진다. 하지만 없다. 모두가 내 책임이다. 보글보글에서 첫 판에 죽어버린 느낌이다. 아니, 한 세 판 까지는 왔나? 혼란스럽다. 내가 학교를 그만둬야 할 분위기가 조성이 되었다.
인생을 분위기로 사는 분위기형 인간 아니었던가. 어렸을 적 오락실에서 하나 남은 천원짜리를 동전 교환기에 집어넣던 심정으로. 다시 시작해야 할 인생이다. 이제 뭐 하지?
.
.
.
" 형의 머리가 이제 필요해요. 형이 제 옆에서 이제 도와주셨으면 해요."
.
.
.
2004년 말, 7년만에 친구들이 다시 뭉쳤다. 당시 취직운이 트였던 녀석은 컴퓨터관련 중소기업에 들어가서 적절히 바쁘게 살고 있고, 동팔이 녀석은 이제는 더이상 섹시하지 않은 색시와 함께 역시 적절히 잘 살고 있는가 보다. 우린 호프집에서 나와서, 연말이고 하니 신년 운세라도 보아야 하지 않겠냐며 분위기를 타서 사주를 보는 곳으로 들어갔다. 중소기업에 간 친구는 장사를 시작한데고, 동팔이는 복덩이가 들어온덴다. 나름대로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갸우뚱 거리고 그 다음은 내 차례. 그 점쟁이가 나를 보고 역시 미묘한 표정을 짓는다. 자세히 보니 살짝 웃고 있는것 같다.
"그래, 귀물은 만나셨소?"
지금 생각해보면 서쪽에서의 그 귀인, 아니 그 귀물? 은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이었나 보다.
"...예, 만났습니다."
"끌끌, 그렇다면, 이제 자네 운세보다는, 지금은 다른 걸 보고 싶겠구만?"
마치 꿰뚫어 보기라도 한다는 양 의기양양하다. 아니, 아니라고 하면 어쩔거야? 하지만 점쟁이가 하는 말을 들어보고자 잠자코 있었다.
"...내년에도 한번 쯤 성공하겠구만. 그리고, 자네가, 이거다 싶은 녀석은 데려 와. 자네를 믿으란 말이지."
나를 믿으라-
그래, 내가 누구야, 2002년, 남들 다 월드컵 볼 때, 난 길섭이를 우승시켰다. 그리고는 코치로서의 능력을 인정받고 이 선수 저 선수를 도와 주다가 올해, 중소기업에 취직한 친구의 소개로 처음으로 친구의 기업이 후원하는 프로게임단이라는 곳에 들어가서 전담 코치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나의 안목을 믿는다. 나를 믿는다. 더 이상 망설이지 않는다.
기분좋은 떨림과 함께, 통화버튼을 누른다.
"예, PLUS 팀 박지호 선수죠? 아, 연말 잘 보내고 계십니까? 다름이 아니라..."
-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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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후기>
팬픽이 그러하듯 이것도 다 픽션입니다. 하하.
실제의 인물과 어떠어떠한건 맞지 않는다, 요건 이렇다...
뭐 상당히 안 맞는 부분이 많긴 하겠지만, 사실 맞는 부분도 없긴 하지만
그것이 팬픽의 매력 아니겠습니까? ^^;;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이 나오면서, 여러 사람들의 운명을 바꿔놓았겠지요.
이 이야기는 스타때문에 인생이 바뀐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 그중에도
코치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만, 역시 팬픽보다는
그냥 이야기에 가까운건지 모르겠습니다. 스타크래프트 이야기 보다는
그냥 한 사람의 인생이 뒤집어지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사실 팬픽이긴 하지만 프로게이머는 등장 하지도 않습니다. 아, 한명 하는군요. 잠깐.
그나마 이름만 거론되는 사람들도 두 명 뿐입니다.
주인공은 누가 모델일까요? 친구가 취직한 중소기업은 어디일까요? 그리고 내가 취직한 프로게임단은 어디일까요?
부끄러운 글 내 놓게 되어 한심스럽습니다만 그저 편히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좋은 주말 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