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유명한 기술자하면 장영실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사극 대왕 세종에선 기술자라기보단 거의 과학자에 더 가까운 느낌이 들지만,
사실 그는 물건을 정교히 만드는 기술자에 가까웠습니다.
그가 만든 유명한 것중 하나가 물시계인데, 그걸 만든 이론적 방법은 세종이 가르쳐주었고
이론적 방법을 숙지하여 장영실이 물시계를 만든 것이었죠.
이에 대한 내용이 실록에 나와있습니다.
"이제 자격궁루(물시계) 를 만들었는데 비록 나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였지마는,
만약 이 사람(장영실)이 아니더라면 암만해도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들으니 원나라 순제(順帝) 때에 저절로 치는 물시계가 있었다 하나,
그러나 만듦새의 정교함이 아마도 영실의 정밀함에는 미치지 못하였을 것이다.
만대에 이어 전할 기물을 능히 만들었으니 그 공이 작지 아니하므로 호군(護軍)의 관직을 더해 주고자 한다.”
그럼 장영실은 어떻게 궁중 기술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대게 세종이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노비였던 장영실을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용했다.
라고 알려있습니다. 이는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진실은 조금 다릅니다.
장영실의 아버지는 조선인이 아닌 원나라 사람이었는데, 조선으로 넘어와 기생과 결혼하였고 그래서 낳은 자식이 장영실입니다.
장영실의 능력을 처음 눈여겨 본 것은 세종이 아니라 태종이었고,
세종이 왕이 된 후에도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세종 4년 임금의 의복을 만드는 상의원 별좌로 승진시키고자 합니다.
우리가 흔히 알기로 이때 대소신료 모두가 반대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허조는 '기생의 소생을 상의원에 임용할 수 없다.' 하였고,
조말생은 '‘이런 무리는 상의원에 더욱 적합하다.' 하여 찬반의견이 모두 나오자,
세종은 다른 대신과도 의논하여 상의원에 임명할 수 있다라는 쪽이 우세를 얻어 관직을 얻게 됩니다.
후에 물시계를 만드는 공로를 인정받아 세종이 호군으로의 승진을 신하와 의논하는 것이 위의 실록 기록이고,
이때 황희의 찬성 의견으로 정4품 호군으로 승진하게 됩니다.
정리하면, 장영실을 처음 등용한 것은 세종이 아니라 태종이었다.
다만,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중용한 것은 세종이고,
그의 관직을 올려주는 것은 세종의 독단적 처리가 아닌 신하들과 논의를 통한 결정이었으며,
의외로 신하가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관직을 주는 것에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정도입니다.
장영실 뿐 아니라 조선 초기 조정에서 우대했던 기술자가 하나 더 있습니다.
장영실과 상당히 비슷한 케이스인데, 그는 조선인이 아닌 중국인이었습니다.
김새라는 이 중국인은 북방 이민족에게 포로로 잡혀 살다 겨우 도망쳐 조선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김새도 기술장인이었는데, 사실 좀 사기꾼 기질이 있었습니다.
돌맹이로 금이나 은을 만들 수 있다고 하고,
어떠한 가루 등으로 하엽록(녹색 빛을 내는 고가의 염료)을 만들 수 있다는 등의 소리를 합니다.
그래서 돌맹이를 가져다주니 ‘모두 진짜 돌이 아니다.’ 라며 금을 만드는 것에 실패합니다...
가 아니라 그냥 헛소리이니 당연히 불가능했겠지요.
그러나 가루로 하엽록을 만드는 건 실제로 보여주고,
그외 여러 기술을 가지고 있어 세종은 그를 후하게 대접하고 기생과 결혼하게 하여 조선에 살게합니다.
김새도 조선의 대접에 만족하며 중국으로 돌아가길 원치 않았기에
여기까지보면 해피엔딩인데 문제는 이 사람이 중국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북방민족에 의해 많은 명나라인이 포로로 잡혔고 도망친 이들 중 상당수가 조선으로 들어왔습니다.
조선은 중국에 사대의 예를 다해야했고, 중국측 요구가 없이도 약 1천 명의 명나라인을 본국으로 돌려보냈죠.
김새도 명나라 사람이니 돌려보내야한다는 의견과 굳이 보낼 필요 없다는 의견이 대립하는 상태라 결정이 쉬이 나지 않았고,
세종도 본심은 보내고 싶지 않는 게 당연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김새를 쫓는 중국측 사람이 요동에 머무르며 조선으로 올 수 있다는 소식에,
끝내 그를 숨길 수 없다 판단하여 결국 김새와 조선에 머물렀던 중국측 기술자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게 됩니다.
이런 조선 초기의 기술자 우대는 조선 과학의 부흥기를 이끄는데요.
이 중심엔 당연히 세종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종의 주도하에 만들어졌던 최고의 작품을 하나 꼽으라면 흠경각이 있지요.
지금은 경복궁 내에 있는 단순한 건물의 이름 정도로 알고 있지만,
흠경각은 단순한 궁궐 내 건물이 아닌, 조선 기술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곳입니다.
농업 국가였던 조선은 시간, 기후의 변화, 천체의 운행 등의 이해를 알고 싶어 했고 그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물시계, 해시계, 측우기 등을 만들었죠.
그러나 세종은 이것들로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낮과 밤 모두 사용할 수 있는 물시계인 자격루는 이동이 불가능하고, 해시계인 양부일구 낮에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문제를 모두 해결한 게 일성정시의 입니다.
원리는... 자세히 설명하면 복잡하고(사실 저도 잘 모르고-_-;)
낮에는 해시계의 원리와 같게 해의 움직임을 기반으로 시간을 알 수 있고,
밤에는 모든 별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걸 기반으로 하여,
한양의 위도를 기준으로 별의 움직임을 측정하여 시간과 날자를 모두 알 수 있었습니다.
양 계형을 기준으로 위에는 해와 별을 측정하고,
아래는 시간을 알 수 있게 했죠.
날짜를 알 수 있는 건 동지 첫 날 자정을 기준으로 하여 하루가 지나면 성구환이 1도씩 움직이며,
364일이 지나면 364도가 움직이어 365도가 지나면 다음 해 동짓날이 되는 것입니다.
다만, 기구의 오차로인해 66년마다 1도씩 오차가 생기기에 이땐 다시 측정하여 오차범위를 수정해야합니다.
뭐, 실록 기록을 보면 세종이 뭐라뭐라 하면서 그 원리와 사용 방법에 대해 '직접' 설명하는데,
미천한 전 도무지 그 뜻을 이해할 수가 없네요 ㅠㅠ...
이렇게 4개의 일성정시의를 만들어, 하나는 궁궐에, 다른 하나는 서운관에
나머지 두 개는 함길도 절제사와 평안도 도절사에 보냅니다.
일성정시의 뿐 아니라, 하늘의 적도, 자오선, 태양 궤도를 측정할 수 있는 혼의(渾儀),
수로를 이용하여 별의 움직임과 기구의 움직임을 같게 하여 하루의 길이를 측정하여 절기 변화를 알 수 있는 혼상(渾象),
별이 아닌 그림자를 이용하여 절기를 읽는 규표(圭表),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뒤집은 가마솥 모양의 해시계인 양부일천(仰釜日晷),
그리고 물시계인 금루(禁漏) 등등..
이 모든 기구들을 한데 모아 보관 관리하던 장소가 바로 흠경각입니다.
이렇게보면 흠경각은 단순이 이런 기기를 모아놓는 창고라 생각할 수 있지만 흠경각의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었습니다.
일단 흠경각 내부 중심엔 풀먹인 종이로 7자 높이의 산같은 모형물을 만들고,
옥루기 바퀴를 설치해 물을 올리게 하였습니다.
금으로 해를 만들고 오색구름을 만들어 산을 두르게 했는데 이게 하루에 한 번씩 회전하여,
낮에는 산 밖으로 나타나고 밤에는 산 안으로 들어갑니다.
금으로 만든 해 밑에는 옥으로 만든 여자 인형 넷이 목탁을 잡고 구름을 타고
동서남북으로 서있는데,
인묘진시 정시에는 동쪽에 있는 인형이 목탁을 치고,
사오미시 정시에는 남쪽에 있는 인형이,
서쪽과 북쪽에 있는 인형도 해당되는 정시가 되면 목탁을 치게끔 되어 있습니다.
기구 바닥에는 청룡과 주작등의 형상을 한 모형을 만들어 산을 바라보게 했으며,
청룡신은 인시가 되면 북쪽, 묘시엔 동쪽, 진시엔 남쪽, 사시엔 한 바퀴 돌아 다시 서쪽으로 돌아오며,
동시에 주작신이 동쪽으로 움직이며 나머지 백호와 현무 등도 이렇게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산 남쪽 기슭에는 높은 축대가 있어, 시간을 맡은 인형하나가 산을 등지고 있고,
인형 무사 셋은 각기 방망이, 북, 부채를 잡고 동, 서, 북 쪽에 서서
매 해당 시간이 되면 자동으로 종을 치고 북을 치는 식으로 설계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산 밑 평지에는 열두 방위를 맡은 신들이 자신의 자리에 엎드려 있는데,
자시가 되면 쥐 모양의 신의 구멍이 자동으로 열리며 여자 인형이 나와 자시패를 가지고 나오며,
앞의 쥐모양으로 만든 신은 그 앞에 일어섭니다.
자시가 끝나면 여자 인형은 자동으로 들어가며 구멍이 저절로 닫혀지고 쥐도 다시 도로 엎드리며,
동시에 축시가 되어 소모양의 신이 일어나는 식으로 12시간 동안 매 시간 이렇게 돌아가며 작동합니다.
이 모든 것은 물로 인해 작동되며,
산 동쪽에는 봄의 경치를, 남쪽엔 여름 경치, 서쪽과 북쪽에도 가을과 겨울 경치를 만들어 미적 가치를 더했습니다.
이런 비슷한 물건은 당, 송 시대에도 있었으나 모두 한 가지씩만 되어 있을 뿐이고,
그마저도 사람이 직접 작동을 해야했습니다.
하지만 흠경각의 이 작품은 사신(四神)·십이신(十二神)·고인(鼓人)·종인(鍾人)·사신(司辰)·옥녀(玉女) 등의
여러 기구를 복합적으로 설계했고,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저절로 치고 저절로 운행되는,
단순한 장난감으로 볼 수 없는 당시 조선 기술의 결정체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흠경각의 이 작품과 더불어 안에 있던 모든 것들을 다 잃어버리는 사태가 발생하는데,
명종 8년 경복궁의 화제 때문이었습니다.
궁인들이 놀라 불이 난 와중에도 들어가 기구들을 꺼내려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단지 서책 몇 권만을 가져오는데 성공했을 뿐이었습니다.
다른 기구등들은 그래도 복구가 가능했는데 흠경각안에 있던 이 장치는 단 하나 뿐이었기에,
복구를 할 수 있을까 여간 걱정이 아니었습니다만..
다행히 관원들의 노력에 의해 그 설계도를 작성하는데 성공하고,
다음해엔 기기까지 완전히 복원하는데 성공합니다.
여기에서 끝나면 천만 다행이었겟지만....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전부 불타버리며 또 다시 소실됩니다.
이를 광해군이 다시 복원하고자하는 의지를 보이지만,
성공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개인적으로 찾을 수 없어 모르겠으며,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 했을 때도 안의 기구는 복원치 않고(혹은 할 수도 없었고) 건물만 복원하는 것에 그칩니다.
지금은 복원하고 싶어도 기구의 복잡함에 비해 어떠한 설계도도 남아있지 않아 복원이 불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장영실 이야기를 하다가 글이 이상한 곳으로 빠져 너무 길어졌네요.
매일 그냥 삘받아 글을 막 작성하다보니 마무리가 어색한 느낌이 듭니다.
재미있게 읽으셨길 바랍니다.
* 信主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3-07-05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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