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1/11/05 20:53:12
Name 헥스밤
Subject 배팅장에서 고인의 명복을 빌다.


여자친구와 놀다가 배팅장에 들어갔다. 친구로 말할 것 같으면, 올해부터 야구를 보게 되었으며, 'SK의 광팬'이라는 유순한 표현보다는 '진성솩충' 정도의 표현이 어울리는 솩빠이며, 점차 야덕화가 심하게 진행중이고, 여성 사회인 야구단을 물색중이고, 내게 최정 싸인볼을 강탈해갔고, 플옵이 한창이던 부산에서 전화로 '야 김강민이 최고지. 전준우 <따위>를 김강민하고 비교하는건 김강민한테 진짜 실례다'라고 소리치다가 목숨을 잃을 뻔한, 훌륭한 사회학도다. 야구를 보기 전까지는 내가 배팅장에 가끔 가거나 할 때 내게 지극한 경멸의 시선을 보내는 데 주저함이 없는 인간이었지만, 자기가 야구를 본 이후에는 길을 걷다 배팅장을 보면 지갑을 뒤적거리며 천원짜리를 세고 있는 그런 인간이다.

이재영 불지를 확률과 비슷한 확률로 언제나처럼 나는 그날도 무언가 잘못을 했고, 정대현 세이브할 확률과 비슷한 확률로 여자친구는 그런 상황에서 빡치는 편이었다. 어떻게든 화해의 실마리를 찾으며 걷다가 다행히 배팅장을 발견했다, 라기보다는 싸우며 나는 계속 그 쪽으로 길을 유도하고 있었다. 김성근 감독님에 대한 오마쥬랄까, 나는 작전을 사랑한다. '미안해. 기분 풀고 빠따질이나 한번 하고 가자.' 라는 장기적인 작전 하에 나는 이호준처럼 욕먹으며 배팅장을 향해 걷고 있었고, 마침내 도착했다. 그리고 말했다. 미안해. 기분 풀고 빠따질이나 한번 하고 가자.

내가 먼저 타석에 들어섰다. 비록 실력은 형편없지만, 언제나 무엇을 하건 이론과 폼을 중요시하는 나답게 폼은 나름대로 안정적이었다. 나는 마치 박재상처럼 아름다운 헛스윙을 반복하고 내려왔다. 그리고 멋쩍게 웃으며 친구와 타석을 교대했다. 볼이 좀 높네. 물론 볼은 높지 않았다. 내 배트가 낮을 뿐이지. 그렇게 친구가 타석에 섰다.

나는 나름 내가 아는 지식과 이론과 썰을 총동원해서 지난 몇 달 간 친구의 타격자세를 지도해왔다. 머리 붙이고. 풀스윙 하지 말고. 손목 너무 꺾지 말고. 무게중심 움직이는 거 신경 쓰고. 팔만 휘두르지 말고 다리부터 허리로 올라오는 기분으로. 다리좀 벌리고. 등등. 등등. 덕분에 친구의 타격자세는 여자 치고는 좋은 편이다. 라기보다는 아주 엉망진창은 아닌 수준이다. 라기보다는 이대형보다는 보기 좋다. 이려나. 어쨌거나 친구는 폼은 나쁘지 않은 자세로 공을 잘 맞추었다. 오. 잘 맞추네. 하고 중얼거리고 있던 순간, 한 커플이 대기실로 올라왔다.

평범한 인상의 대학생인 듯한 평범한 커플이었다. 그들은 들어와 내가 앉아 있는 벤치 근처에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남자의 시선은 타석에 서 있던 내 친구에게로 고정되었다. 하긴. 나도 배팅장에 갔는데 키 150이 될까말까한 여자가 배트를 들고 있으면 신기한 눈으로 구경하고 있었게지.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물론 나라면 구경만 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그 남자처럼 여자친구를 옆에 두고

"와. 저사람 여잔데 진짜 잘치네."
"타격자세 좋다. 몸 다 쓰면서 치네."
"저거 그냥 맞추기도 힘든데 배트 가운데 잘 맞추네."
"남자도 연습 안해보면 저거 제대로 저렇게 맞추는거 엄청 어려운데."
"사회인 야구 해보면 공이 저정도 속도로 날아오는데, 치기 엄청 힘들어."
"남자애들도 팔만 겨우 돌려서 치는 애들 많은데. 잘하네."
"와. 옆타석에 저 남자보다 잘 치네."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니 그처럼 약 10분간 쉴새없이 말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물론.

나는 웃음을 참는 건지 민망함을 참는 건지 아무튼 무언가를 참으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날 친구가 잘 치긴 했다. 가을의 박정권마냥. 물론 친구가 항상 잘 치는 건 아니다. 보통은 시즌 중의 박정권 정도로 못 친다. 나름 나는 보람을 느꼈다. 이게 지도자의 기쁨인가. 음하핫. 하지만 역시 민망했다. 곧 그 남자가 타석에 들어갔다. 오. 상당히 잘 쳤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타석에 들어가 정상호마냥 배트를 붕붕 휘둘렀다. 정상호처럼 참 못 맞췄다. 다시 친구가 타석에 들어가고, 나온 내 옆에서 그 남자는 예의 타격자세 드립을 계속 날리고 있었다. 대략 10여분간 그런 상태가 지속되었다.

일반적으로 여자친구 앞에서 다른 여자를 칭찬했을 때 사단이 날 확률은 정우람 박희수 이재영 이승호 정대현 엄정욱 고효준 고든 중 한 명이 경기에 등판할 확률과 비슷하다. 그런 위험한 짓을 그는 하고 있었다. 이쯤 되니 조금 걱정이 들었다.

"야. 너도 한번 해볼래. 내가 잘 가르쳐줄께."

라는 그의 말을 들었을 때, 뭔가 내가 눈앞이 아찔해졌다. 여자친구 앞에서 다른 여자를 칭찬한 후에 여자친구에게 그걸 한 번 해 보라고 하는 건 이만수를 감독으로 쓰는 것 보다 위험할텐데. 저분 저거 나중에 어떻게 수습하려고 그러시나. 여자분의 반응을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고개를 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무튼 그들은 내가 타석에 선 어느 순간에 사라져 있었고, 나는 친구와 몇 번 더 치고 배팅장을 나왔다.

그 남자. 무사하려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아마 무사하긴 힘들 것 같은데. 이건 마치 코리안시리즈 박빙 상황에서 이재영을 올리는 것 만큼이나 위험한 일일 텐데. 나는 그 때 먹던 치킨을 집어던지며 TV를 껐고 팀은 예상대로 패배했다. 배팅장을 나오며 나는 안 봐도 뻔할 그의 명복을 빌었다.
* OrBef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11-07 11:43)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방과후티타임
11/11/05 20:54
수정 아이콘
그 남자분에게 Rest in Peace
11/11/05 20:57
수정 아이콘
이 글에서 엄청난걸 깨닫고 갑니다.
엊그제 잘 놀고 헤어져서 다음날부터 지금까지 왜 하루종일 날선모드였는지 이해가 가네요.
abstracteller
11/11/05 20:58
수정 아이콘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크크 깨알같은 비유로 쉽게 이해 할 수 있네요.
부엉이바위
11/11/05 21:00
수정 아이콘
그렇죠..여친님과 함께 있을때는

여친님은 우주의 중심이자 세계의 핵이며 70억 인류중의 최고 미모를 가지고 있으며 사서를 뒤져보아도 클레이파트라나 양귀비가 쬐금 뒤를 따라오는 최강 미모 얼짱이라 생각하셔야죠..

압구정에서 저녁을 먹는데 전 잘모르는 신인 여배우가 지나갔습니다.

사람들이 쳐다보는데 전 식당 찾느라 딴곳을 봤지요..

여친님께서는 굉장한 칭찬과 머리 쓰다듬음을 시전하셨습니다.

인생 뭐 있겠어요..
태연효성수지
11/11/05 21:06
수정 아이콘
제 전 여친은 길가다 "와 저 여자 치마 엄청 짧다. 다리가 이쁘니까 저런걸 입는 거지, 팬티보이겠다."
순간적으로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낚인겁니다. 쩝
Empire State Of Mind
11/11/05 21:06
수정 아이콘
Aㅏ.................. ▶◀

애도.. ㅠㅠ

Bar 운영 하시는분이 헥스밤 님이셨군요!

칵테일 관련해서 여쭤볼게 있는데 쪽지 드려도 되나요??
Biemann Integral
11/11/05 22:01
수정 아이콘
글이 맛깔나는게 딱 제스탈이네요.
花非花
11/11/05 22:10
수정 아이콘
역시 헥스밤님 글은 소소한 재미가 있네요. 야구를 전혀 몰라도 재밌습니다.

덧, 저는 여자친구 앞에서 예쁜 여자 스캔 잘만 합니다. 같이 구경도 하구요. 흐흐 저 같은 커플도 많을 듯
13롯데우승
11/11/06 01:31
수정 아이콘
미연시(에로게)라면 위 상황에서
1. 승부근성 있고 지기 싫어하는 아가씨 계 츤데레 or 열혈 체육계 츤데레 - 훨씬 깔끔한 타격폼으로 간단하게 모든 공을 안타 처리하고 주인공에게 브이자를 그리며 놀라는 남자에게 씨익 웃은 뒤 야구배트로 주인공을 가리키며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 같은 여자와 사귈 수 있는 걸 영광으로 알라구!' 하면서 훈훈하게 마무리..

2. 소꿉친구 계열 or 여동생 계열 -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화났다는 걸 어필하면서 배팅케이지 안으로 입장. '두고 보라구! 지지 않을테니까..!' 라고 호기롭게 외치며 배트를 휘두르지만 공이 오는 족족 헛스윙. '이런거 인정 못해~!' 라고 외치며 남자에게 500원짜리를 독촉하며 계속 배팅. 그러다가 숨이 턱까지 차올라 결국 포기하고 헉헉거리다가 손발을 바둥거리면서 귀엽게 징징거림. 다시 볼을 부풀리고 남자를 째려보는데 남자가 다가가서 머리를 쓰다듬고 '그런 모습까지 포함해서 네가 좋아' 뭐 이런 대사 날려주면 여자가 얼굴 붉히면서 훈훈하게 마무리...

3. 운동신경 떨어지는 천연 계열 - 배트 휘두르다가 몸까지 따라가서 2회전 반 하고 넘어져서 아프다고 움. 그러면 남자가 머리 쓰다듬어주면서 토닥토닥 해 주고 여자가 얼굴 붉히면서 부끄럽다고 하면서 훈훈하게 마무리...

현실은?

데이트 끝나고 or 다음날이나 며칠 후
'오빠가 뭘 잘못한지는 알아?'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1538 (10)구라꾼과 백지꾼 그리고 타짜 [20] fd테란7515 10/01/17 7515
1537 (10)최근 하이브 이후 테저전의 핵심에 관하여. [20] ipa7150 10/01/11 7150
1536 업무 인생을 획귀적으로 바꾸어줄지 모르는 윈도우용 프로그램 3종 (+사족) [34] UMC6511 11/11/07 6511
1535 다단계 피해 예방 혹은 ‘Anti’를 위한 글(+링크 모음) 本(본) 편 : 미팅Ⅱ [4] 르웰린견습생4602 11/11/06 4602
1534 배팅장에서 고인의 명복을 빌다. [16] 헥스밤6967 11/11/05 6967
1533 왜 종교인가? [111] 글장6530 11/11/05 6530
1532 (10)이영호 vs 김윤환 관전평 [25] fd테란8836 10/01/03 8836
1531 (09)[인증해피] 피지알 2009년 활동을 정리하며... [28] 해피5938 09/12/28 5938
1530 (09)MSL을 위한 조언 [26] becker5942 09/12/11 5942
1529 적的은 가까이에... [32] 삭제됨5486 11/11/04 5486
1528 [영상] Dear. 이현주... [7] 염력의세계4904 11/10/29 4904
1527 경험자가 바라본 무상급식관련 의견입니다. [18] Kemicion4720 11/11/04 4720
1526 [야구] 2011 시즌 <프로야구> 팀별 성적 + 선수별 성적 총정리.. # 1 [17] k`3730 11/11/04 3730
1525 그들이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어야한다. 한국 홍보의 문제점. [15] sungsik4416 11/11/02 4416
1524 (09)고백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 [42] Love&Hate11368 09/12/09 11368
1523 (09)내가 진짜로 듣고 싶었던 말 [23] 키큰꼬마8092 09/12/04 8092
1522 (09)멀어지는 과정. [17] 50b5317 09/11/19 5317
1521 왕자의 난 - (1) 조선의 장량 [10] 눈시BBver.25047 11/11/02 5047
1520 다단계 피해 예방 혹은 ‘Anti’를 위한 글(+링크 모음) 本(본) 편 : 초대Ⅰ [4] 르웰린견습생5575 11/11/01 5575
1519 한미 FTA에 대해 알아봅시다. [92] Toppick8154 11/10/29 8154
1518 (09)[고발] 데일리e스포츠, 그들이 묻어버린 이름 '위메이드' [60] The xian12190 09/11/08 12190
1517 (09)라이터가 없다. [7] kapH4753 09/11/03 4753
1516 고려의 마지막 명장 - (5) 폐가입진, 해가 이미 저물었구나 [5] 눈시BBver.23939 11/10/26 3939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