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내게 뮤지컬 관람이란 쓸데없는 돈낭비에 불과했다. 만원 가량의 돈으로 스크린을 통해 수많은 영화들을 접할 수 있는 영화관을 두고 굳이 멀고먼 공연장까지 찾아가서 그 비싼 티켓값을 지불하면서까지 뮤지컬을 관람하는 행위 자체를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 더군다나 한 번의 뮤지컬 관람도 부담스러울진대 똑같은 뮤지컬을 두 번, 세 번 혹은 대여섯번씩이나 반복해서 관람하는 자칭 마니아들의 행태(?)는 내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불가였다. 결국 내게 뮤지컬이란 크리스마스 시즌 등 1년에 몇 안 되는 특별한 날에, 애인을 위해 큰 맘 먹고 지르는 데이트용 콘텐츠 정도에 불과했다. 2009년 홍지민, 오만석, 정선아를 주연으로 한국에서 초연된 뮤지컬 [드림걸즈]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뮤지컬 [드림걸즈]는 1960~7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가수로서의 성공을 꿈꾸는 흑인 여성트리오 에피, 디나, 로렐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들의 제작자이자 쇼 비지니스계에서 성공을 꿈꾸는 남자 커티스와 그녀들의 사랑과 성공, 배신 등을 그려낸 작품이다. 이 작품은 1981년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로 초연되었으며 2006년 비욘세, 제이미 폭스 주연의 영화로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어쨌든 나는 이 작품을 통해 뮤지컬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되었으니 결국 뮤지컬 [드림걸즈]는 내게, 많은 이들이 뮤지컬을 보는 이유, 다시 말해 뮤지컬 관람이란 돈지랄(?)에 대한 충실한 답변을 해준 셈이 되었다. 사실 따지고보면 그 많은 사람들이 영화관을 넘어 뮤지컬 공연장을 찾는 데는 그 나름의 까닭이 있을 것이다. 결국 영화를 통해선 느낄 수 없는 뮤지컬만의 독특하고 고유한 그 ‘무엇’이 존재한다는 얘기인데, 그렇다면 [드림걸즈]만의 특별한 그 ‘무엇’은 과연 무엇일까?
쇼의 화려함과 드라마의 감동을 동시에 선사하다
우선 [드림걸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갓 잡아 올린 활어처럼 생생하게 무대 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공연 자체의 생동감과 화려함이다. 일단 처음 이 작품을 접하며 가장 이색적으로 느꼈던 점이 한정된 무대를 최대한의 상상력으로 이용하는 무대연출의 기발함과 신선함이었다. 예를 들어 극 초반, 오디션 현장에서 가수 지망생들이 관객들을 향해 노래를 부르는 모습과 무대 뒤편 대기실 안의 모습을 하나의 무대 위에서 공간을 좌우를 나눠 동시에 보여주는 독특하고 기발한 연출법이라든지, 객석의 사람들을 때로는 뮤지컬 관객으로 만들었다가, 또 때로는 가수 지미와 드림즈의 공연 속 청중으로 끌어들여 극 안에서 배우와 함께 자연스레 호흡하게 만드는 등 영화로는 절대 체험할 수 없는 뮤지컬 공연만의 독특하고 이채로운 경험을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더불어 무대 뒤편에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라이브 밴드의 웅장하고 화려한 연주, 그리고 휘황찬란한 조명과 레이저쇼로 구성된 환상적인 무대 장치와 연출, 또 이와 어우러지는 배우들의 현란한 퍼포먼스를 보고 있자니 말 그대로 눈이 호강한다는 말 외에는 더 이상 떠오르는 단어가 없었다. 하지만 이것만이 다는 아니다. 이러한 쇼의 화려함과 흥분만을 위해 공연장을 찾는다면 오히려 유명 댄스가수의 콘서트를 관람하는 일이 더 나을지도 모를 터. 결국 [드림걸즈]는 ‘뮤지컬’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캐릭터 간의 앙상블과 자연스러운 극의 흐름, 그리고 그 가운데서 보여지는 감동적이고 멋진 넘버들을 통한 극적 감동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빼앗는다.
극 중 자신이 만든 삼인조 여성그룹 <드림즈>의 성공을 위해 라디오 DJ들과의 어두운 거래 및 폭력 등의 불법행위를 서슴지 않는, 차갑고 비정한 제작자 커티스의 모습을 카리스마와 절도 넘치는 군무로 완성시킨 'Steppin' To The Bad Side'. 뛰어난 보컬실력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미모로 <드림즈>의 메인보컬에서 밀려나게 된 주인공 에피의 처연한 심정과 그녀를 설득하는 동료들의 따뜻한 대화가 담긴 'Family'. 그리고 에피의 아픔와 서러움이 폭발하듯 표현되는 메인넘버 솔로곡 'And I'm Telling You I'm Not Going'. 이런 에피를 내친 후 성공가도를 달리는 <디나 앤 더 드림즈>의 화려한 모습을 한곡에 담아 보여주는 'One Night Only'까지. 이렇듯 때로는 음악의 힘이, 이야기의 힘을 압도하는 순간이 있음을 뮤지컬 [드림걸즈]는 스스로 관객들에게 증명한다.
더 화려해진 대신 더 경박해지다
물론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많은 갈등과 반목을 반복하던 에피와 디나가 'Listen'이라는 곡 안에서의 대화를 통해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 화해하는 부분은 뮤지컬 특유의 약점과 강점을 동시에 보여주는 대표적 장면으로, 때때로 이야기 구조의 빈약함을 ‘데우스 엑스 마키나’식으로 감동적인 뮤지컬 넘버로 한방에 쉽게 해결하려는 듯한 느낌에서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부족한 러닝타임 안에서 단 한 곡의 노래로 이야기의 개연성을 끌어올리며 관객들을 설득시키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라는 점에서, 이러한 넘버들 그 자체가 이 작품의 가장 큰 강점이자 매력인 것은 어쨌든 분명하다. 결국 감동적인 뮤지컬 넘버들 또한 또 다른 형식의 이야기라고 본다면, 이러한 [드림걸즈]의 힘은 결국 현란하고 화려한 쇼에 매몰되지 않고 끝끝내 빛을 발하는 드라마의 묵직한 감동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듯 2009년 초연에 이어 더 다양한 매력과 무기로 무장한 채 6년 만에 돌아온 [드림걸즈]는 무대장치의 발전만큼이나 더 화려해졌지만 그와 함께 초연 때의 묵직함은 사라진 채로 더 가볍고 경박해진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그 가장 큰 원인은 주요 캐릭터인 커티스의 캐릭터 변화에 있다. 초연 시절 오만석과 김승우의 더블 캐스팅으로 화제를 모았던 커티스 역은, 제이미 폭스가 열연했던 영화 속 캐릭터처럼 차갑고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전형적인 나쁜 남자였다. 성공과 야망을 위해 이성을 유혹하고 또 때로는 사랑을 희생시키는 냉혈하고도 냉철한 차도남 커티스가 2015년의 [드림걸즈]에서는 별 매력도 없는 수다쟁이 제비스타일의 사기꾼 제작자로 격하되고 만 것. 차갑고도 치명적인 매력을 뽐내며 'Steppin' To The Bad Side'를 열창하던 오만석의 매력을 지금의 김도현에게선 얼마나 느낄 수가 있나? 그리고 과연 새롭게 선보인 [드림걸즈]를 통해 얼마나 많은 관객들이 커티스의 매력에 반했을까를 생각해본다면 이것은 캐릭터 변화가 아닌 붕괴에 가깝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결국 이것은 단순한 배우 개인의 잘못이 아닌 캐릭터 구축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렇듯 극을 구성하는 주요 캐릭터의 한축을 담당하던 커티스가 무너진 데다가 ‘홍지민(에피)-정선아(디나)’로 이어지는 09년의 걸출한 조합이 2015년에는 차에피(차지연) 1인에게 집중되는 모양새를 띄다보니 이 뮤지컬이 ‘드림걸즈’가 아닌 ‘드림걸’이 되어버리는 지점들이 생겨나는 느낌이 강했다. 이를테면 마치 극 후반으로 갈수록 주인공 도나 1인에게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는 [맘마미아]처럼 말이다. 물론 윤공주의 존재감도 무시할 순 없겠으나 어쨌든 메인배우 차지연에 의해 극의 중심이 급격히 좌지우지 되는 듯한 느낌이랄까? 애초에 극의 흐름상 주인공 도나에게 집중되는 구조로 만들어진 [맘마미아]와는 다르게, 막판까지 유지되는 캐릭터 간의 긴장 관계와 앙상블이 중요한 [드림걸즈]의 이러한 ‘맘마미아화’는 분명 경계하며 한번쯤 짚어볼만한 대목이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넉살좋고 매력적인 캐릭터 지미가 이러한 빈 공간을 여유롭게 채워주며 웃음을 선사해주긴 하지만 어쨌든 지미란 캐릭터도 결국 평생 ‘드림걸즈’란 세계 안에서 겉도는 주변인일 뿐이다. 그가 아무리 관객의 배꼽을 들었다 놓으며 넉살을 부린다 해도 딱 거기까지 일 뿐, 밸런스를 잃은 여타 캐릭터들의 관계가 회복될 리는 만무하다는 얘기.
화려한 풋워크 속에 숨겨진 날카로운 한방
뭐 이렇듯 09년에 비해 달리진 이번 공연에 대해 이런저런 쓴소리를 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자체의 클래스는 여전히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려 줄만하다. 나름 적지 않은 눈엣가시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기분 좋게 관람할 수 있었던 것은, 여전히 꿈틀대듯 생동감 넘치게 빛을 발하며 관객을 쉴 틈 없이 몰아치는 멋진 넘버들의 향연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앞서 언급한 'Steppin' To The Bad Side'로 시작해서 'One Night Only'를 거쳐 'Dreamgirls Reprise'로 마무리되는 이 작품의 주요 넘버들에는 캐릭터적 아쉬움과 단점을 뛰어넘기에 충분한 카타르시스와 감동이 살아있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이 작품을 관람할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마치 정성화 주연의 뮤지컬 [영웅]이 묵직한 주먹을 지닌 하드펀처 조지 포먼과 같다면, [드림걸즈]는 소나기처럼 빠르고 화려한 풋워크 속에 날카로운 한방을 숨긴 팩맨, 매니 파퀴아오에 가깝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 전성기에 비해 기량이 하락한 팩맨이라 해도 일단 그의 경기는 경건한 마음으로 두 손 모아 집중해서 감사히 시청해야 하는 것처럼, [드림걸즈]도 마찬가지다. 다시 관람한 이작품 또한 과거 만큼의 신선한 충격은 없을지라도 여전히 눈이 호강하는, 그리고 충분히 티켓값이 아깝지 않은 그런 멋진 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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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히 생각해 보면 디나가 정말 정치왕이지요.
프로듀서랑 짝짝꿍 맞춰서 그룹의 에이스를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하고서는,
인기를 한 몸에 받다가 갑자기 영화 배우를 하겠다고 땡깡을 피우면서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은 남편을 속 썩이더니,
남편이 몰락할 것 같으니까 갑자기 에피에게 저 새끼가 나쁜 놈이고 자기는 이용만 당했다며 정치질을 시전....
정치적으로 보자면 말씀하신 대로 라인을 정말 잘 탄 캐릭터라는 데에 공감합니다. 반면 욕이란 욕은 에피가 다 먹고 말이죠 흐흐
그리고 제 기억이 맞다면, 영화에서의 디나(비욘세)는 계속 노래를 하고 싶어했는데 커티스가 영화(클레오파트라?) 같은 걸 강요했던 걸로 기억하거든요. 그래서 'Listen'이라는 노래로 항변도 했었고. 근데 뮤지컬에선 노래 잘하던 디나가 반대로 갑자기 영화하겠다고 갑툭튀해서 좀 의아했습니다. 캐릭터의 설정을 바꾸다보니 디나라는 캐릭터 자체가 무척 가벼워지고 설득력이 사라지는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