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또래 소년들과 마을에서 즐겁게 살았습니다.
마치 작은 마을 울타리 안이 세상의 전부인냥 바깥세상을 쳐다보지 않았고,
하루하루를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또 일하고, 또 일하며 살았습니다.
갑자기 또래 소년들이 하나 둘씩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머리에 동백꽃을 열송이 꽂은 아낙처럼 처럼 배실배실 웃는 또래소년들은 어김없이
마을에서 갑자기 사라지거나, 가슴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 세상이 무너진 듯 집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습니다.
차츰 또래 소년들이 사라지고 집안에 박혀 나오지 않는 횟수가 늘어나자 문득 소년은 자신의 가슴에 난 상처가 생각났습니다.
언제 생겼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고, 잘 보이진 않지만 왼쪽 가슴 아래 손톱보다 작은 상처에 차가운 한기가 스며오는 것을 느끼고는
밖에 나가 옹벽을 또 한번 두텁게 발랐습니다.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두텁고 높은 벽을 쌓으리라 마음먹은 소년은 그날도 열심히 일한 자신을 다독이며
집에 들어와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잠자리에 들기전에 이상하리만치 살랑거리는 바람에 잠못이루던 소년은
두려움이었는지, 혹은 부러움이었는지 모를 작은 감정의 흔들림을 느끼며
"언젠가는 나도 이곳에서 사라질지도 몰라. 언젠가는... 언젠가는..."
이라 되뇌이며, 깊은 밤속 산책을 떠났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소년은 마을에 여행을 다녀오겠단 다소 성의 없어 보이는 짧은 글과 함께 마을을 떠났습니다.
또래 소년들이 느낄 두려움이었는지, 혹은 부러움이었는지 모를 감정의 흔들림을 생각하며 소년은 다소 음흉해보이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분명 그것은 부러움일거란 확신이 들었습니다.
세상에서 처음 느껴보는 행복감과 즐거움. 그의 동반자와 함께 떠나기 시작한 여행은 오랜시간 생활해온 작은 마을이 기억조차 나지
않을만큼 소년의 온 마음을 진한 향기로 물들였습니다.
소년의 동반자가 그 여행을 빛나게 해주는 이유라는 것은 그 소년을 본 그 누구라도 알 수 있었습니다.
둘은 깍지낀 손을 힘차게 흔들며 둘만의 여행을 떠났습니다.
소년의 동반자는 민트향이 진하게 배어나던 매력적인 작은 민트초코 기린이었습니다.
소년보다 조금 작은 기린은 소년이 가는 길에 향기를 더해주고, 소년이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주었습니다.
기린은 양떼를 모는 소년 앞에 어느날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양떼사이에서 갑작스레 빠꼼히 내미는 얼굴에 소년은 얼이 빠진듯 멍하니 기린을 바라봤습니다.
정신을 차릴때 즈음 기린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냥 소년의 맘에 깊숙히 박혔습니다.
차분하고 단아한 머리결과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눈매,
그리고 무엇보다 곁에 있을때면 진한 민트향이 배어나올 것만 같은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까지.
정신을 차릴 즈음 소년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릴적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지금은 작은 상처가 되어버린 손톱보다 작은 상처를 바라보며 깊숙히 박힌 조각을 떼어내려면
얼마나 많은 아픔과 큰 상처를 안고 살아야 하는지 알기에 더 깊숙히 박히지 않도록 조심스레 거리를 두려는 마음과 동시에
기린과 함께라면 얼마나 행복할지 상상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소년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루하루 양떼를 모는 언덕에 가서 기린을 기다리는 날들이 늘어나고,
기린이 멀리서 보이기만 해도 옷매무새를 고쳐잡고, 멋지게 양떼를 몰아보려 갖은 멋진 자세를 잡기 일쑤였습니다.
소년은 양떼를 모는 언덕에서만 볼 수 있던 기린이 너무나도 좋았지만, 그럴수록 집앞 옹벽을 더 두텁게 바르기 시작했습니다.
기린이 갑자기 마을에 온다면, 자신이 살고 있는 작고 허름한 집을 본다면 그 기린이 더 이상 언덕에 오지 않을 것만 같아서
매일 같이 기린을 기다리고, 두려워하는 생활을 반복했습니다.
소년의 맘에 금이 가기 시작한건 얼마지나지 않아 기린이 소년의 집앞에서 소년을 바라보는 일이 생긴 후였습니다.
지친 몸을 끌고 집으로 들어갈즈음 달콤한 향기에 눈을 돌려보니 민트초코 기린이 자신을 따듯한 미소로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화들짝 놀라 대문을 닫고 숨을 고르고 있었고, 기린은 그렇게 한참을 집앞에서 서성이다 사라졌습니다.
쿵덕이던 가슴을 가까스로 추스르고 나니 우려했던일이 현실로 찾아왔다는 생각에 소년은 무서워졌습니다.
두려움은 소년을 얼음장처럼 차갑게 만들었고, 그 차가움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린에게 쏟아내려는 듯 매몰차게 변했습니다.
다음 날도 기린은 양떼를 몰고 돌아가는 소년을 따라 집으로 찾아왔고, 소년은 기다렸다는 듯 마을이 쩌렁쩌렁 울리게 문을 걸어잠궜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닫혀진 문틈 사이로 기린을 바라봤습니다.
그렁그렁한 기린의 눈은 닫혀진 문을 보고는 한참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다가 이내 고개를 떨구고는 숲으로 사라졌습니다.
매일같이 고개를 떨구고 사라지는 기린을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날 수록, 깊은 밤속 산책을 가는 시간보다
민트향에 취해 잠 못 이루는 시간이 늘어날 수록 소년은 초라하게 살고 있는 자신이 두려워졌고,
기린을 바라보던 문틈마저 막아버리고 더 이상 양떼를 몰러 나가서도 기린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이튿날 양떼를 몰고 돌아온 소년은 문을 잠그자마자 막아버린 문틈 새를 원망하며 한숨을 쉬었습니다.
하루, 이틀이 지날수록 소년은 기린이 집앞에 있을지, 서성이며 자신을 원망하지 않을지 궁금해졌습니다.
마침 소년의 머릿속엔 12시를 알리는 시계가 맞춰지는 순간처럼 또각 하는 소리와 함께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기린은 절대! 알 수 없도록 옹벽에 작은 구멍을 뚫어두고 지켜보리라. 기린이 언젠가 계속해서 차갑게 문을 닫는 내 모습을 보면
언젠간 따라오지 않으리라. 소년은 자신이 해낸 생각을 그 누구도 모르리라 하며 키득키득 웃으며 깊은 밤속 산책을 떠났습니다.
소년만 모르고 있었을까요.
작은 금에는 어느새 민트향이 차츰 배어가고 있었고, 매일같이 작은 구멍에 눈을 맞추고 바라보는 시간이 같은 하루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 되어가는 것을.
그러던 어느날, 여느때처럼 담 밖을 훔쳐보던 소년은 깜짝 놀라 뒤로 넘어졌습니다.
작은 소년의 눈에 자신을 정확히 바라보며 활짝 웃어주는 민트초코 기린이 보였습니다.
순간 넘어져 있던 소년에게 괜찮다고 말하는 듯 온 몸을 감싸는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여지껏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부드러운 느낌에 잠시 정신을 잃었다 깨어보니
어느새 긴 시간동안 한켜 한켜 쌓아올렸던 옹벽은 온데간데 없고
여름으로 향해가는 높아져가는 햇님과, 코끝을 살랑살랑 간지러주는 달콤한 초코 내음,
그리고 드디어 빠져버린 깊은 눈매 속의 작은 소년이 보였습니다.
작은 소년은 그렇게 민트초코기린의 손을 잡고 일어났습니다.
그동안 고민해왔던 크고 작은 고민들은 잠시 언덕 저편으로 던져버리고,
기린과 함께 먼길을 떠나보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