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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5/07 08:15:04
Name 눈시BB
File #1 명량_이전.JPG (72.7 KB), Download : 72
Subject [일반]  정유재란 - 5.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



bgm은 영화 천군 OST입니다. 아는 후배가 하는 말이 "천군은 마지막 5분 명량해전 부분을 위해 만든 영화"라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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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극도의 혼란에 빠진 조선 조정은 의외로 침착하게 바로 이순신을 통제사에 임명됩니다. 김식의 보고보다 더 정확한, 수군이 전멸한 것이 아니라 흩어진 것이라는 보고가 들어온 것 같습니다. 권율도 곧바로 이순신을 추천했죠. 사실 방법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이순신이 지휘할 배가 남아 있기나 할까, 그리고 이순신이 그것을 받을까 하는 거였죠.

이순신은 곧바로 길을 떠나 18일에 삼가 -> 19일 단성 -> 20일 진주 -> 21일 곤양에 이릅니다. 이 때까지는 수군이 패했다 하나 적이 진격하지 않았고 동산산성, 정개산성 등 아직 우도의 산성들이 기능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백성들도 추수하고 있었다고 하죠. 하지만 말 그대로 폭풍전야였습니다.
이 날 이순신은 노량으로 가서 그렇게 보고 싶었던 수군을 만납니다. 거제 현령 안위, 영등포 만호 조계종 등이 와서 통곡했죠.
"피해 나온 군사들과 백성들이 호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경상 수사는 도망가서 보이지 않고 우후 이의득이 찾아왔거늘, 패하게 된 상황을 물었더니 사람들이 모두 울면서 말하기를, 대장 원균이 적을 보고는 먼저 달아나 뭍으로 올라가고 여러 장수들도 그를 따라 뭍으로 달아나 이런 극한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대장의 과오를 말하는 것은 입에 담아 형언할 수 없고, 그 살점을 뜯어먹고 싶다고 했다."
그 날은 안위의 배에서 자면서 밤새도록 얘기했는데, 그 때문에 눈병이 생겼다고 합니다.
다음 날에는 도망 갔던 배설이 돌아와서 많은 얘기를 나눕니다. 남해현령 박대남도 찾아 오죠. 23일에는 배흥립을 만납니다. 이들이 병에 걸려서 전투에 참가 못 한 게 오히려 다행이었죠. 이 때 상황을 정리해서 권율에게 보냅니다.
25일에는 조방장 김언공이 제석산성의 병력을 수군에 인계하기 위해 이순신을 찾아 오지만, 아직 직책이 없던 이순신은 이를 인수하지 못 합니다. 이 병력은 다른 곳을 지키다가 흩어졌다고 합니다.

이후 수군에 대해 여러 사람들과 만나며 회의를 했지만 정작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 했습니다. 그는 아무런 직책이 없었으니까요. 한편, 일본군은 예열을 끝내고 드디어 진격을 개시합니다.

적의 진격이 시작된 8월 3일, 그는 삼도 수군 통제사에 재임명됩니다. 그 위급한 상황에서 23일날 조정에서 보낸 선전관이 3일에야 도착한 거였죠. 정유년의 기적은 그렇게 시작부터 아슬아슬했습니다. 2일 왕명을 받을 꿈을 꾸었다는데 신통하네요.

이 때 교서의 내용을 약간 옮기면 이렇습니다.

"임금은 이같이 이르노라. 아아! 나라가 의지하고 든든함으로 삼는 것은 오직 수군 뿐이었노라. 그런데 하늘이 아직도 화 내린 것을 후회하지 않았으니, 적의 칼날이 다시 번뜩여 삼도의 대군이 한번 싸움에 모두 흩어지고 말았도다. 앞으로 바닷가 고을들을 누가 지켜주랴? 한산을 이미 잃었으니 적이 무엇을 두려워하랴?"

"생간건대 경은 일찍이 수군절도사를 제수받은 날로부터 널리 알려졌고 임진년 대첩이 있고 나자 다시 그 이름을 크게 떨쳤도다. 이로써 변방의 군사들은 경을 장성처럼 든든히 믿었노라."

"그런데 근자에 경을 직책에서 물러나게 하고 죄를 진 채 종군하도록 처벌한 것은 역시 사람의 꾀가 두텁지 못한 데서 비롯됐노라. 그래서 오늘날 이렇게 패배의 욕됨에 이르렀으니,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선조는 이렇게 자신의 모든 죄를 인정하며 부디 삼도 수군 통제사를 맡아 달라고 사정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상중임에도 일으켜 세우고 백의종군에서 해제해서 통제사 직에 다시 앉힌다고 하죠. 조선시대에 효를 위해 직책을 사양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저 왕의 뜻이 자기와 안 맞아서, 혹은 자기의 존재감을 알리려고 출사를 늦추는 것은 언제나 있는 일이었고, 상중이라는 것은 최고의 변명거리였습니다. 송시열만 해도 수틀리면 바로 벼슬 버리고 가 버렸는데요 뭐.

조정은 이순신이 그것을 거부할까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냥 쌓인 한 때문에, 아니면 자기의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한 번쯤 튕길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모든 게 늦어 버립니다. 일본군의 진격이 시작된 상황에서 더 이상의 기회는 없었습니다. 모든 것은 이순신의 결단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선조가 제대로 대접해줬나 하면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교서는 현재 품계 부분이 지워져서 판독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듬해 명량 해전을 거치고도 정 3품 절충장군 그대로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통제사에 임명하면서 정 2품 정헌대부도, 종 2품 가선대부도 돌려주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간단히 명량에서 중군장으로 참전한 미조항첨사 김응함도 절충장군이었고, 배흥립도 통정대부로 동급이었습니다. 수군은 임진년의 승전으로 많은 이들이 자기 직책보다 높은 품계를 가지고 있었죠. 말 그대로 당하관(종 3품 이하)보다 당상관(정 3품 이상)이 많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딱 정 3품만 돌려준 거죠. 제대로 엿을 먹인 겁니다.

이순신 개인으로서는 한 번 튕겨도 나라 빼고는 아무런 해도 없는 상황, 하지만 그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숙배한 후 받자온 서장을 써서 봉해 올리고 발 그날로 길을 떠나 곧장 두치 가는 길로 들어섰다."

이 너무도 간단한 한 줄에 얼마나 큰 결심이 담겨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그는 육로로 떠납니다.

2. 신에게는 아직 열 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
곧바로 두치 (전남 광양)으로 떠난 이순신은 남해 현령 박대남이 길을 잃기도 하고 -_-; 하다가 구례로 갑니다. 이후 옥과로 갔다가 배경남을 남원으로 떠나 보내고 순천에 이르죠.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 광양으로 바로 가는 길을 가지 않고 구례로 갔다가 순천으로 갑니다. 먼 길을 돌아가는 거죠. 통설은 이렇게 돌아가며 병력과 군량, 화약 등을 모았다는 것인데 김경진님은 적이 섬진강을 장악했기 때문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추정하시더군요.

실제 이순신이 통제사에 재임명된 3일은 적이 진주를 함락한 날이었고, 한편 시마즈 요시히로군은 하동에 상륙해 남원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적의 점령지 내에서 움직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단 한 순간만 적에게 발각되었어도 그 날로 그의 운명은, 조선의 운명은 끝이었습니다.

이순신은 어떻게든 전라좌수영 경내를 이동하면서 물자 및 장수들을 모집하려 했습니다. 5일에는 옥과현에 도착해서 정사준 등을 만났고, 옥과 현감 홍요좌는 병이 났다는 핑계로 오지 않다가 처벌하려고 하자 옵니다. 7일에 순천으로 갔고, 거기서 곳곳이 청야된 것을 보게 되죠. 광양 현감, 나주 판관, 옥구 현감 등이 와서 질책하니 모두 병사 이복남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9일에 낙안에 도착했을 때도 이복남이 적이 쳐들어 온다면서 창고에 불을 지르고 도망가서 병사들이 흩어졌다고 하죠.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복남은 남원으로 당당히 들어가서 전사했습니다. 전라도의 혼란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거죠.
그래놓고 정작 순천부의 창고는 불태워지지 않았는데, 이순신은 이것을 휘하 군관들이 들 수 있을 정도만 남기고 없애 버립니다. 아무래도 이복남이 이순신을 위해 남겨 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 날 우치적을 만납니다. 이 때 적은 남원을 공략하는 데 집중하고 있어서 약간의 여유가 있었던 듯 합니다. 그리고 이 약간의 여유가 조선 수군에게는 천금과도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7일자 일기를 보면 선전관 원집을 만나 밀지를 받았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순신은 이에 대한 답장과 수군의 상황을 적은 장계 7통을 윤선각에게 주어 서울로 올려보냅니다.

이순신이 패해서 숨어 있는 수군 장수들을 만나고 남은 함대의 수를 알게 된 것은 13일이었습니다. 이 날 거제 현령 안위, 발포 만호 소계남이 왔다 갔고 수사와 여러 장수, 피해 나온 사람들이 묵고 있는 곳을 알았다고 하죠. 한편 전라좌수영 우후 이몽구가 드디어 나타났는데, 좌수영의 군기와 군량을 버리고 갔다는 죄로 곤장 80대를 맞습니다. 그가 맡고 있는 것이 정말 중요했기에 도망간 다른 수군 장수들에 비해 큰 죄를 입은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그는 조정의 명에 의해 참수당하죠. 다 같이 도망간 것을 생각하면 그 혼자에게 너무 가혹했나 싶긴 하지만, 도망간 건 죄가 맞죠. 또한 이 날 3일에 진주 등의 군대가 흩어졌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통탄할 노릇이라고 했지만, 단 하루라도 늦었을 경우 어떻게 됐을지 몰랐다는 사실을 알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모르겠네요.

14일에는 어사 임몽정을 만나야 돼서 보성으로 갔고, 15일에는 선전관 박천봉이 찾아옵니다. 그 내용은 바로 수군을 폐하고 육지로 와도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순신은 바로 그 답장을 씁니다.

이 장계가 바로 지금 너무나도 유명한 그 장계죠.

"5~6년간 적은 감히 호남으로 곧바로 쳐들어오지 못 하였습니다. 이는 수군이 그 길목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남아 있습니다. 죽기로 힘을 다 해 싸운다면 오히려 해 볼 만 합니다. 만일 수군을 폐한다면 이것은 적이 가장 기뻐하는 바로써, 호남을 거쳐 한강으로 올라올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비록 전선의 수가 적지만,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 할 것입니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역사상 최고의 명언 중 하나가 이 때 나온 것입니다. 당시 조정은 수군이 흩어졌다 하나 어느 정도 규모가 남아 있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 수가 너무나도 적자 이길 수 없으리라 생각한 듯 합니다. 이게 당연하죠.

  微臣不死則不敢侮我矣. 하지만 이순신은 내가 살아 있는 한 적이 우리를 우습게 보지 못 한 다는, 지금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한 마디로 모든 것을 반박합니다.

당시 조선에서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한 사람은 단 한 명, 이순신 그 자신 뿐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죽지 않았으니 적이 업신여기지 못 할 것이라는 강력한 자신감을 피력하는데, 이것은 잘난 척이 아닌 사실이었습니다.


선조나 조선 대신들은 괜히 생각해 준 것일지 몰라도 이들과 만나는 것은 이순신을 짜증나게 하는 짓일 뿐이었죠. 수군 추스릴 시간도 부족한데 이들은 임금의 명이니 하면서 만나야 했습니다. 이순신이 마침내 장흥에 도착한 것은 18일이었습니다. 전날 배설은 약속을 어기고 배를 보내지 않았고, 이 날에도 배멀미를 핑계로 오지 않았습니다.

3. 배설은 숙배하지 않았다.
마침내 수군의 장수들이 다 모였습니다. 이순신은 임금이 보낸 교서를 꺼내 들죠. 하지만 여기서 배설은 숙배,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책들에서야 이 사건을 단순히 배설의 항명으로만 보지만, 이는 엄청나게 큰 것입니다. 임금의 명을 받드는 것을 거부하는 거니까요. 교서는 곧 임금의 말씀, 여기에 절을 하지 않는 것은 임금을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배설은 조선 수군의 실세였고 큰 처벌은 하지 못 합니다. 경상우수영 군관들을 벌 줄 뿐이었죠.
한편 민정붕은 명의 관리인지 상인인지 모를 위덕의에게 술과 음식을 받아 먹고 판옥선을 빌려줬다는 것으로 곤장 20대를 맞죠. -_-;

이후 배설은 적이 온다는 말만 듣고도 도망가려고 하다가 30일에 병세가 위중해서 요양한다는 핑계를 대고 육지로 가려고 합니다. 이순신도 처리하여 보냈죠.
9월 2일의 일기는 아주 짧습니다.
"맑음. 배설이 도망갔다."

배설이 그냥 도망만 간 무능한 장수라고 알려져 있지만, 김경진님은 이에 대해 다른 해석을 하십니다. 원균이 충청도로 간 후 경상우수사가 된 배설은 일을 열심히 해서 경상우수영의 배가 25척 이상으로 늘어났고, 경상우수군의 굶주림도 어느 정도 해결됐다고 하시네요. 제가 확인해 볼 수 있었던 것은 배설이 우수사에서 물러날 때, 그것도 자기의 심복이었던 권준과 교체되는데도 이순신이 매우 아쉬워했다는 구절 뿐이었습니다.
이후 칠천량 해전 과정에서 8척을 깨뜨려 유일한 전공을 올린 것도 배설이었고 적이 야습을 가할 때 김완과 함께 맞서려 한 것도 배설이었습니다. 그리고  아군을 견내량으로 도주시켜 전력을 보존하게 한 것도 배설이었죠.

이전에 썼지만, 견내량을 통과해 도주한 것은 경상우수영의 12척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이 배가 12척이었는가도 의문이죠. 권율이 따로 나주목사 이정언에게서 받은 보고에 따르면 탈출한 배는 7척이었습니다. 실제 명량해전 당시 12척 중 전라우수영, 좌수영의 배가 섞여 있었고 배설과 같이 탈출했다는 옥포만호의 배는 포함돼 있지 않았습니다. 즉 그가 실제 탈출한 게 몇 척이었는지는 의문인 거죠. 그렇다면 12척의 배를 끌어 모으고 유지한 것은 배설이 한 것으로 봐도 될 것입니다.

이런 점을 보아 김경진님은 이 때 배설이 보여 준 소극적인 모습은 이미 적에게 한 번 당한 것에서 나온 전쟁공포증과 또 다른 이유 때문이라고 주장하십니다.

왕의 교서에 숙배하지 않은 점, 후에 배설이 도망가자 배설의 고향인 성주를 가지 않고 수군으로 와서 무언가를 의심하는 느낌이라서 이순신이 화를 낸 점, 후에 배설이 "무슨 일을 벌이다" 권율에게 잡혀 사형 당한 점 등을 본 거죠.

난중일기에는 "나도 그 사정을 알지만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의 계책이 아니므로 몰래 참고 있는데"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배설이 도망가려고 했다는 것에 딸린 문장일 수도 있지만, 따로 보면 뭔가 의미심장하죠. 정작 배설이 도망가려 한다고 욕했던 이순신은 그가 육지로 간다고 하니 바로 허락해 줬고, 도망갔다고 하자 그냥 덤덤하게 도망갔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둘의 갈등은 도망가자 싸우자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일 수도 있다는 거겠죠.

어찌됐든 배설은 도망갔습니다. 그것도 적의 점령지인 전라도와 경상우도를 통해서 집으로 갔죠.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4. 폭풍전야
20일. 포구가 좁아서 창사로 진을 옮겼다고 합니다. 현재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입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음했다고 합니다.
21일. 새벽 2시에 곽란이 일어나서 소주를 마셔서 치료하려고 했다가 인사불성이 되었다고 합니다. 거의 죽기 직전에 토하기를 10여 차례 하고 밤새도록 앓았다고 합니다.
22일. 여전히 곽란에 시달려 대변도 볼 수 없었다고 하죠.
23일에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배에서 나와서 잤다고 합니다.

24일에는 조금 나아졌는지 어란포 앞바다로 향했습니다. 25일에는 보자기들이 소를 훔쳐 놓고 적이 가까이 왔다고 거짓말을 해서 참수하고 그 목을 효시합니다. 상황이 안정됐는데 배설은 이미 도망가고 있었다고 하네요.
26일 임준영이 와서 적이 이미 이진에 도달했다는 보고를 합니다. 또한 이 날 김억추가 판옥선 한 척을 이끌고 가세하죠. 조선 최고의 소드마스터가 왔으니 얼마나 힘이 났을까요. -_-; 27일에는 배설을 만나서 따집니다. 배설은 이 때도 두려워 하고 있었다고 하네요.
28일에는 적선 8척이 새벽에 야습을 해 옵니다. 적도 이순신이 돌아온 걸 알고 있었고, 소수지만 무시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 척의 배들이 겁을 잔뜩 집어먹고 물러가려고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깃발을 휘두르며 추격하라고 명하니, 여러 배들이 뒤쫓아 갈두에 이르자 적선이 멀리 도망하므로 끝까지 쫓지 않았다"
배설 뿐만이 아니었죠. 이미 조선 수군은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 때 후방에 50척이 더 있었다고 하니 칠천량처럼 조선 수군이 무너지면 바로 공격해 왔겠죠.
29일에는 벽파진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이 날 척후를 많이 보냈고, 배설이 육지로 간 것도 이 때입니다.

이렇게 9월이 다가왔습니다.
2일에는 배설이 도망갔고, 3일 밤부터 5일까지 거센 북풍이 불었습니다. 6일에 조금 나아졌다고 하네요.
7일에 군관 임중형이 적선 55척 중 13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에 여러 장수들에게 몇 번이고 엄중하게 경계하라고 하죠. 4시경에 적선 12척이 이르러서 추격했다고 합니다. 다시 장수들을 모아서 야습이 있을 것이니 경계하라고 다짐했고, 역시 밤 10시경에 적이 와서 덤볐습니다. 이순신은 직접 앞장서서 적을 맞서 싸웠고, 적은 네 번이나 나왔다 물러갔다만 반복하다가 새벽 1시경에 돌아갑니다.

8일에 장수들을 불러모아서 회의를 하는데, 여기서 그 유명한 "김억추는 일개 만호 수준"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지만 김응남과 친하다는 이유로 억지로 보냈다고 하죠.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때를 만나지 못 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보통 조정이라는 말을 쓸 경우 누구를 향해서 말 하는 걸까요.

9일은 중양절로 추석과 비교할 만한 명절이었죠. 이 날 제주도에서 보낸 소 5마리를 병사들에게 먹입니다. 비록 상 중이었다 하나 이것을 잊을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이 날 적선 2척이 아군을 정찰하기에 영등포 만호 조계종이 추적했다고 합니다. 10일에도 적선이 멀리 도망갔다는 기록이 있네요.

11일. "홀로 배 위에 앉았으니 그리운 회포로 눈물을 흘렸다. 천지간에 어찌 나 같은 사람이 있으리오. 아들 회가 내 심정을 알고 몹시 언짢아했다."

11일부터 14일까지는 다시 날씨가 나빠집니다. 13일에는 꿈을 꿨는데 임진년에 크게 승전할 때의 꿈과 비슷했다고 하네요. 14일에는 정찰병이 와서 50여 척이 벌써 어란으로 왔다고 합니다. 또 이 때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김중걸의 말이 나왔는데, 왜장들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조선 수군 10여 척이 우리 배를 추격해서 혹은 쏘아 죽이고 또 배를 불태웠으니 극히 통분할 일이요, 각처의 배를 불러 모아 수군을 모조리 죽인 뒤 바로 경강으로 가자고 하더라는 것이다"
일본어를 얼마나 알았는지 몰라도 적이 몰래 의논하는 걸 들었다니 차암 -_-; 아무튼 여기서 "병력을 모아" "수군을 친 후" "서울로 간다"는 계획을 알게 된 거죠. 이 날 피난민들을 급히 뭍으로 올라가게 했습니다. 적이 마침내 오고 있었습니다.



5. 必死則生 必生則死. 一夫當逕 足懼千夫
15일 벽파진에서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깁니다. 이 날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을 불러모은 후 말 합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라고 했고, 또 한 사람이 길을 지키면 천 사람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으니 지금 우를 두고 이름이라.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영을 어긴다면 즉각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일망정 용납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 날의 회의 결과는 간단했습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싸운다는 것이었죠.

조선 수군에게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습니다. 적의 목표가 확실해진 지금 적을 서해로 들인다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선택이었죠. 지금까지 일본 수군은 칠천량 때 그랬던 것처럼 소수의 병력으로 야습을 했습니다. 당연히 조선 수군은 물러나려고 했지만 이순신은 직접 돌격해서 이들을 몰아내었죠. 그렇게 해서 겨우 안정시킨 조선 수군입니다. 더 이상 물러날 경우 좋은 전장을 찾기도 힘들었고, 기껏 모은 수군이 다시 흩어질 염려가 있습니다. 김억추는 도움이 전혀 안 되었고, 바로 근처인 무안에 있는 임치첨사 홍견은 아직도 오지 않았습니다. 경기수사는 한강 방어를 위해 동원됐고, 충청 수군 역시 임금을 지키기 위해 오지 않았죠. 그에게 있던 배는 단 열 세척 뿐이었습니다.
+) 첨사는 무관직에서는 수사 바로 밑으로, 수사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두 명의 첨사가 각 도의 수군 절반씩을 맡았습니다. 임치첨사의 병력이 칠천량에서 별 손해를 입지 않았을 경우 동원할 수 있는 판옥선은 열 척에 달했죠. 하지만 그는 격군을 핑계로 오지 않았습니다.

그 날 밤, 이순신은 꿈에서 신인을 만납니다. 이와 같이 하면 크게 이기고, 이와 같이 하면 지게 된다는 거였죠. 자세한 건 적지 않았죠.

잠시 김경진님의 임진왜란에서 나온 걸 적어 보죠.

"충청수사나 경기수사, 임치첨사 홍견이 판옥선 10여 척 이상을 몰고 올 경우 크게 이긴다. 그러나 그 인간들은 오지 않아. 자네 부하들이 열심히 싸워도 크게 이긴다. 글쎄. 이건 두고 봐. 그리고 분명히 말해두겠는데, 자넨 혼자 싸워도 지지 않아."
"그렇다면 제가 어떻게 하면 집니까?"
어떻게 보면 가장 구체적인 질문이었다.
"자네가 지레 겁을 먹고 물러서거나, 포기하고 자진하거나, 왜놈에게 항복하면 진다."
"제가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물론이지. 그래서 자네는 무조건 이긴다."

왜 이런 엄청난 스포일러를 적었는지 모르겠지만, :) 참 재밌게 만들었네요.

9월 16일. 날 일기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맑음. 이른 아침에 별진군이 보고하기를, 적선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명량을 거쳐 바로 우리가 진치고 있는 곳을 향하여 들어온다고 했다."

이렇게 전 세계 역사상 가장 말도 안 되고 어이 없는 전투가 시작됩니다. 장소는 명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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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음 편 "명량, 천행"에서 뵙기로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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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이님
11/05/07 08:28
수정 아이콘
영광스런 첫 댓글이네요
자스에서 본 그 사람입니다 크크
어서 다음편이 기대됩니다...!
그런데 통상대감의 저 말도 안되는 해전이
세계에는 얼마나 알려져 있는건가요??
11/05/07 08:51
수정 아이콘
제가 제대로 알고 있는건지 모르겠지만 명량 해전 때 처음 전투 개시 후 기함 한 척으로 수십척의 적 군선을 맞받아쳤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겨지지가 않습니다. 어떤 전쟁영화를 만들고 소설을 쓰더라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 같은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상상이 되지 않네요.

제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고 가정하더라도, 저 패배의식이 가득한 몇 안되는 수군과 고작 열두척의 배를 보고 담담히 아직 나에게는 열두척의 배와 군사가 있다고 담담하게 보고하며 그 의지를 과연 따라잡을 수 있을지... 제 한 사람의 몫조차 버거워서 심신이 지쳐가는 요즘인데 충무공의 나라의 존망을 어깨에 짊어지고 사지로 향하는 그 모습이 그려지면 마음이 벅차오르면서 작고 미약한 제 자신을 반성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푸른날개
11/05/07 08:57
수정 아이콘
갓이죠 갓
그냥 말그대로 갓입니다.
조선 아니 반만년 한반도 역사에서 유일하게 갓이라고 불려도 무방함이 없는분이십니다.
이건뭐 다른 장수들은 인간계에서 싸우는데 이분은 신과 우주의 영역에서 지켜보고계시니.....
11/05/07 09:41
수정 아이콘
정말 원균은 두고두고 까여도 싸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만명의 병사와 250여척의 수군을 몰살시켜버린 주범이니

은영전에서 양웬리가 그랬죠
'우리 아군은 항상 손발을 묶어놓고 싸우게 만든단 말야'
전방의 적보다 후방의 무능한 아군이 더 무섭다는건 임진란때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고작 열두척의 배라니, 만약 이순신이 계속 삼도수군통제사의 지위에 있었다면 정유재란은 순식간에 종결됬을텐데 말이죠
fd테란
11/05/07 09:56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내용이 클라이막스로 다다름과 동시에 눈시bb님의 필력도 점점 더 올라가는 느낌이네요.
벤카슬러
11/05/07 10:17
수정 아이콘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남아 있습니다.
비록 전선의 수가 적지만,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 할 것입니다.

아... 도대체 누가 감히 이 분을 깐단 말입니까 ㅠ.ㅠ
폭주유모차
11/05/07 11:29
수정 아이콘
왕의 귀환.....아니 신의 재림........ 도대체 이분은 진짜 하늘의 버프라도 온몸으로 받으셨던건가....

진짜 이분........드래곤이셨던건....;;;;
deathknt
11/05/07 11:34
수정 아이콘
장군이 내려오면서, 무기와 곡식을 수습하는데, 거의 방치된 상황이라 들었습니다.
창고는 문이 잠겨있고, 버려진 물품도 있었으니, 이정도면 당시 관리들의 대처하는 방식의 수준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덕분에 이순신 장군이 가지고 올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니, 조금 아이러니 합니다.

그리고 배설(이분 성함이..ㅡ.ㅡ)이 전투에 주저하는 부분은 당시 상황에 비추어보면 명확할 것 같습니다.
말도 안되는 상항으로 이순신 장군이 압송되었고, 이어지는 칠천량 전투의 대패(?)한 후, 실질적으로 병력이 와해된 상황입니다.
더군다나 격군들도 많이 줄어들었고, 여러가지 지원도 없고(하긴 이순신 장군이 보급을 준 적이 있어도 받은적은 거의 없었음),
또 다시 싸우라고 하니 누가 가려고 할까요?

아무튼 다음편 내용 기대하겠습니다.
카서스
11/05/07 11:34
수정 아이콘
명량에 가봤었는데.... 정말 저긴 천혜의 요충지입니다.

길목이 좁고 물살도 화창한 날씨였음에도 엄청 험하더군요 -_-;

현대라면모를까, 당시 노에 의존하는 배들은 저곳은 악몽이였을겁니다.

아참, 철쇄설은 거의 정설로 취급되는걸로 알고있습니다.
11/05/07 11:38
수정 아이콘
배설의 마음이 역(逆)이든 겁(怯)이든 그것이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마음이 아니였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역(逆)에 무게를 조금 더 두고 싶네요. 그리고 이순신 장군님에 대한 찬양은 다음회 까지 일단 모아 두겠습니다. 흐흐
체러티
11/05/07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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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시작이군요 말도 안되는 전투;; 다 읽어오니 더 극적으로 느껴지네요..
Langrriser
11/05/07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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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이순신장군님은 조선과(정확히는 조선정부겠죠?;;;) 일본 양쪽과 전쟁중이셨다고 보는게 맞을것 같습니다 -_-;;;
오직 백성들을 위해 벌이는 2:1의 전쟁...
저 같아도 선조 이 XXX! 하면서 난리를 피웠을것 같은데...(그러고 전후에 역적으로 시망테크..겠죠?;;;)
탄신일때 그냥 까맣게 잊고 말았는데...언젠가 시간내서 제승당에 한번 가야할듯...^^
모모리
11/05/07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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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배설의 반응이 인간적이죠. 저 지경에도 임금을 받드는 마음이 정말.... 장군님 날 가져요 ㅠㅠ
양정인
11/05/07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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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쇄설은...
철쇄를 연결한 듯한 장치가 진도대교를 건설하기 전에도 있었다고하죠.
철쇄와 육지를 연결하는 장치가 육지에 있었고, 그것은 진도대교를 건설하면서 철거했다고 하더군요.
뭐.. 그 장치를 찍은 사진이 존재하기는 합니다. 현재도 그 장치가 있다면 탄소연대 측정등을 통해서 언제 만들어진건지
조사한다던가... 그러겠지만 그러지는 못하고, 다만 그곳에서 살고있는 주민들에게 구전되어오는 이야기들을 통해서
철쇄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추측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워낙 명량해전 자체가 말이 안되는 일어날 수 없는 해전이기에 이런 '설'이 나오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거기에 불멸의 이순신이 철쇄설에 단단히 한몫했죠. 또 강강수월래의 유래가 또 한몫했구요.

그리고, 제 부모님 고향이 진도입니다.
때문에 저... 울돌목을 아주 잘 아시죠.
부모님이 고향에 살고 계실 무렵 배를 타고 많이 다녔는데... 저 울돌목을 자주 지나다니셨는데
저 울돌목의 위력을 지금도 혀를 내두르십니다.
'모터' 를 이용한 동력선도 저곳을 통과하기가 굉장히 힘이 들다고 합니다.
썰물때와 밀물때 각각 그 흐름을 거슬러 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4~500년전 인간의 힘으로만 그 흐름을 거스르는 것은 불가능이죠.
11/05/07 13:40
수정 아이콘
제발 이 다음편 빨리 해주세요..
저 숨넘어가서 꼴까닥 하면 글쓴이 책임입니다..^^
정말 제가 가장 좋아하는 위인인...이순신장군님..
군인 으로써 이보다 더한 인물상을 과연 세계사에서 찾아 볼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진짜 읽다보면 이거 소설 아냐?
하는 생각마저도 들게 한다는..
정말 말그대로 이순 신 입니다...신...이름도 신이네요.
그러니 빨리 다음편 연재해주세요..제발...!!
키스도사
11/05/07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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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戰船雖寡 微臣不死則不敢侮我矣

아 정말 대단합니다. 저 장계가 쓰여질 당시엔 조선수군도, 본인의 몸도 최악으로 치닫고 있을 무렵인데 저런 자신감을 보여주는것도 그렇지만 저 말을 지켜냇다는게 정말 대단합니다.
11/05/07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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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시작이군요.
오히려 기적같은 명량해전보다,
그 명량해전을 앞두고 있었던 이순신 장군의 의연한 태도가 더욱 가치롭게 느껴집니다.

막상 싸움은 '에라 모르겠다' 라고 할 수 있다지만,
누가 나보고 죽을 자리로 걸어 들어가라고 하면, 그리고 혈육같은 부하들을 그 사지로 함께 끌고 들어가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장군님은 그럼에도 한 마디로 대답하셨군요.

"내가 살아 있는 한, 우리를 우습게 보지 못할 것이다."
11/05/07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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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구를 곱씹으며 천천히 읽었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느낌이네요. 좋은 글 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m]
나이트해머
11/05/07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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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해전 철쇄설, 현재 논문 확인중.

'시뮬레이션을 이용한 역사적 전투사례의 승패요인 분석: 임진왜란시 명랑해전 사례 연구'(저자 조성진(국방대학교 운용분석), 2010년 3월자) -> 철쇄의 유무와는 결과가 크게 차이나지 않음을 시뮬레이션을 통해 확인. 따라서 무의미함.
'명랑해전의 경과와 주요 쟁점 고찰'(저자 이민웅(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02년) -> '이순신이 함대를 인수한 후 명량해전 전까지 철쇄를 가설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사료된다'
'명량해전 연구'(저자 조성도(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1982년) -> 한자가 많아 알아보긴 힘들지만 전투 경과 설명에 철쇄의 존재 없음.

현재로썬 학계의 대세는 '철쇄가 없었다' 라고밖엔 볼 수 없는 결과인데요. 이거.
여타 주제에 비해 국회도서관이라던가 하는데로 완전히 넘어간 게 많아 제휴사이트 활용으로 찾는데 의외로 어려움을 겪고 있긴 합니다만, 위의 논문들에서 철쇄설에 대해 다루는 건 별로 주목할 거 없는 가설 정도고 이를 가볍게 반박하는 걸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한국학술정보를 뒤져봐야겠지만 제휴사이트도 아니다보니 이게 또 상당히 돈이 들어가는 짓이라...(최소 3만원 결제?!)

하나 더 추가.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난중일기(亂中日記)》,《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나타난 Combat Sports -MechiKoff & Estes(1998)의 이론에 근거를 토대로-' (저자 김산(한국체육대학교), 안진규(충남대학교), 박용범(중앙대학교), 2011년) -> 명량해전에 대해서 명량해협을 이용한 이순신의 전략 및 전술의 승리라고 평하고 있음. 마찬가지로 철쇄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존재하지 않음.

하나 더 추가. '정유재란기 명량해전의 주요쟁점과 승리요인 재검토' (저자 제장명(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08년) -> '수중철쇄를 설치하여 일본군선들을 걸어 넘어뜨렸다고 하는 전투 방법에 대해서도 이는 설화이지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는 점에 필자도 동의하면서...',
검은창트롤
11/05/07 14:24
수정 아이콘
이건 신화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데...영화 300보다 100배는 더 드라마틱하네요.
키스도사
11/05/07 14:39
수정 아이콘
철쇄설은 개인적으로 말도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 계산으로 한척당 1톤씩만 잡아도 300톤이 넘는 배들이 밀고 오는 것을 감당할정도로 단단한 철쇄를 만드는 기술이 조선시대에 있었을까요??? 거기다 물살이 거세 배들이 달려오는 속도까지 계산하면 1m 이상의 철판을 세워 놓지 않는 이상 힘들어 보이는데요....
거기다 판옥선과 세부키네의 흘수의 차이까지 계산해서 철쇄를 330m가 넘는 해협에 정확하게 설치할 시간도 없어 보이구요.

철쇄설이 나온 기록은 택리지와 행장록뿐인데 행장록의 경우엔 김억추가 검기를 날렸다는둥의 내용이 담겨져 있어서 ;;;
눈시BB
11/05/07 14:56
수정 아이콘
마실 님// 모모리 님// 나이트해머 님// 키스도사 님//
왠지 문맥상 "전설"의 오타가 아닐까 싶은데요 (...) 아니면 울돌목 현지의 얘기를 하신 거니 현지에서 그렇게 취급되고 있다라든가요.
나이트해머님은 좀 진정하셨으면 합니다. 논쟁 불 붙은 상태라면 몰라도 이런 상황에서 너무 과격하십니다
카서스
11/05/07 16:56
수정 아이콘
음? 수많은 댓글이 있군요. 제가 정설이라고 한건

일단, 역사스페셜과 그곳 명량 기념관에 가면 실제로 철쇄설을 대문짝하게 (.....) 붙어있으며, 그때 철쇠를 걸었다는, 배들을 물살에 떠네려가지 않게 쇠사슬을 묶었었다는 기둥이 세워져 있었기 떄문입니다.

같이 가신 교수님의 말에 따르면, 만약 철쇄설이 사실이라면, 그때 사용한 사슬은 그 지역에서 배들이 물살에 떠네려가지 않게 묶어둔 사슬들을 이어서 만들었을 것이며, 조선과 일본 선박의 구조를 봤을때 저지가 가능하다면, 혹은 버티다 끊어져도 어느정도의 선두 저지효과만 있더라도 격파된 선두의 배들이 일종의 바리게이트역활을 해줄것이기 때문에 효과가 있을것이다. 라고 하셔서 정설로 동의되고 있는줄 알았죠 (...)

생각해보니 저도, 그 교수님도 전공이 그쪽이 아니군요.
28살 2학년
11/05/07 17:01
수정 아이콘
저는 그저 닥치고 이순甲느님만 지켜볼뿐...
deathknt
11/05/07 17:20
수정 아이콘
저도 개인적으로는 철쇄론을 믿지 못합니다.
그런 정황상 철쇄를 운용할 여유가 전혀 없을뿐더러, 이순신 장군의 기록에도(난중일기) 그 부분에 대한 훈련에 대한 기록도 없습니다.
(비상시국에 밑의 지휘관에게 철쇄와 같은 중요한 상황을 빠뜨릴수 없으니까요)
거기다가 철쇄를 운용할 인력이 있으면 바로 격군이나 수군으로 편입시켰을것입니다.(격군의 수가 대푹 감소)
워낙에 극적인 승리인데, 이것을 설명하려고 하니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다보니 그런것 같습니다.

택리지인가? 아무튼 거기에 울돌목 근처에 철쇄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부분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지역간 왔다갔다 하기위해 설치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방영한 불멸의 이순신은 참 불편했습니다. 백병전 / 강강수월래 / 철쇄 삼종 세트가 나오더군요.
그덕분에 저렇게 믿는 사람들도 많구요.(백병전은 참으로 어이가 없었습니다.)
카서스
11/05/07 17:38
수정 아이콘
그리고 나이트헤머님 말대로 현 사학계는 전쟁경과와 같은 지엽적인 것은 전혀 관심이 없죠.

아직 아날학파의 초기 역사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까요? 임진왜란 역시 사회구조적 관점으로 접근합니다.

왜냐하면, 기록이 없기때문이죠 -_- 더 정확히 말하면 신뢰되는 증거가 별로 없다고나 할까요?

역사에서 학설은 사료의 교차검증과 그 학설을 뒷받침해줘야할 정황, 유물등의 물적증거등이 뒷받침 되어야 하지만

미시적인것, 특히 전쟁과 같은것은 승자와 패자의 기록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교차검증도 힘들뿐더러, 파괴적 행위기 때문에 물적증거도 남기 힘듭니다. 남은것은 정황상 증거밖에 없는데, 이 정황상 증거는 모더니즘으로 대표되는 역사학에서는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려나 있는 증거이기도 하죠.

'난중일기'를 예로 들면, 사료적 가치가 있긴 하지만 이 자체가 사실이라고는 말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순신이 아무리 최대한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해도 글쓴이의 관점은 그 글에 무조건적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를 신뢰하긴 하지만, 교차검증이 안되는 부분은 설득력이 떨어지죠. 그런데 교차검증을 할수도 없는게 당시에 남아있는 쇄미록, 난중잡록 등등의 수많은 기록은 서로 다른부분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다만 난중일기가 그 두자료보다 더 설득력있는건 당시 실제로 그자리에서 지휘했던 이순신의 서술이라는 점 떄문이기는 하지요. 하지만 진짜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서술했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습니다. 카이사르나 투키디데스의 서술을 그대로 믿는 사람이 없듯이요.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역사학은 저 한계를 뛰어넘으려 하지만... 애초에 네러티브에 반해서 등장한것이 모더니즘인데 이 모더니즘을 극복하기 위해 다시 내러티브로 돌아간다? 안타깝지만 이 모순된점을 해결하지는 못하죠. 오죽하면 포스트모더니즘 역사가들은 주장만 할뿐 반론을 하지 못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겠습니까.

써보니 글과는 전혀 관계가 없군요;

어쨋든, 개인적으로는 눈시bb님이 대단하다고 느껴집니다. 저 사료들을 일일히 다 보고 정리하셔야할텐데 -_- 쉬운작업이 아니죠. 저만해도 여러 주제로 글을 써보려고 몇번이나 생각했는데 포기했는데 말이죠;
서주현
11/05/07 18:48
수정 아이콘
드디어 충격과 공포의 명량대첩인가요...
하나린
11/05/07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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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가슴이 두근두근할정도로 멋집니다. 눈물이 핑 돌것같아요ㅠㅠ
다음편 기대할게요~ 잘보고갑니다!
메밀국수밑힌자와사비
11/05/07 20:19
수정 아이콘
참... 선조가 신하들 견제하고 경쟁시키면서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던 거야 이해되지만(그걸로 선조 업적을 쳐 주는 사람들도 있지만, 솔직히 원균 옹호론보다 좀 더 낫다뿐이다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강화하고 싶었다는 왕권 물려줄 때는 왜 그리 개차반으로...), 믿을 만한 신하들조차 너무 견제했던 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런 마인드라면 왜 원균은 내치지 않은 건지... 물론 이순신을 키워 준 것도 선조였겠지만 죽인 것도 선조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메밀국수밑힌자와사비
11/05/07 20:24
수정 아이콘
문득 생각났는데, 김훈이 쓴 '칼의 노래'에서는 배설이 육지에 남겠다고 한 뒤, 무단으로 탈영해 목포 방면으로 도망간 것으로 서술해 놓았더군요. 그 전에는 적절히 이순신에게 소인배같은 변명을 했던 것으로 묘사... 이순신은 권율에게 배설을 죽여야 한다고 말을 했다고 서술해놓았는데 이건 추후 권율이 배설을 벤 것과 관련해서 추리한 것인지, 관련 서신이 실제로 있어서 그리 서술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벤카슬러
11/05/07 22:36
수정 아이콘
오오... 임진왜란 초기에 버닝하다가 잠잠하던 댓글이 명랑대첩을 앞두고 다시 버닝하는군요.
월산명박
11/05/07 22:50
수정 아이콘
충武공깽 이순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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